33화(Ch 3_1. 돌입)
“돌았냐?”
“형…… 그건…….”
이런 반응을 예상 못한 건 아니다만 앞의 앉은 두 명의 표정을 보니 제가 요 며칠 하던 생각은 확실히 기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현이 대답 대신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그가 입을 연 건 둘이 진정했다고 느껴질 때가 되어서였다.
“나도 이게 무리수가 될 수 있단 건 알아.”
“…….”
“…….”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관계가 나아졌다는 것을 보여줄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서 그래.”
진정을 했음에도 부리부리한 눈으로 대현을 바라보고 있던 우람이 이내 한 풀 꺾인 표정을 했다. 윤성도 마찬가지였다. 착잡해졌던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현을 바라보는 눈빛은 불안해 보이긴 했지만 대현에 대한 신뢰감이 기저에 깔려 있기도 했다.
“전…… 형이 이유가 없이 그렇게 하자고 하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침을 꿀꺽 삼킨 윤성이 입을 열었다. 지난 삼 년간의 분위기 때문일까. 유독 제 의견을 내놓는 거에 있어 조심스러워 보이던 그라서 그런지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심지어 제 의견에 동의해 줬다는 것보다도 더 말이다.
“그러니까, 전…… 형 믿어요.”
제게 올곧이 쏟아지는 시선에 얼굴이 반쯤 빨개진 얼굴로도 말을 끝낸 윤성이 대현의 눈치를 봤다. 대현이 테이블을 넘어 윤성의 머리를 쓱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대현의 손길을 받았을 때만 해도 얼어버렸던 윤성은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그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고마워, 윤성아. 그리고 알지?”
“…….”
“형도 늘 너 믿어. 우람이도 그렇고.”
난 왜? 눈꼴 시린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던 우람이 인상을 구기며 쳐다보는 게 느꼈지만 모른 척 말을 끝낸 대현이 그제야 우람을 응시했다. 제 차례가 돌아온 걸 알았는지 움찔하는 얼굴은 볼 때마다 너무 잘 읽혀서 신기할 지경이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표현하고야 마는 얼굴은 가끔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마치 지금처럼.
“뭐 어떻게 할 건데 그래서. 지원도 없다며.”
이미 다 따라올 것 같은 표정을 하고서도 저렇게 틱틱대는 것도 그렇고. 가끔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잠시 웃던 대현이 이내 진지한 눈빛을 하고는 둘을 번갈아 응시했다.
“일단은 내가 해보려고.”
“뭐?”
바로 눈썹을 찡그리며 물어오는 얼굴을 마주하던 대현의 얼굴 위로 짧게 멋쩍은 표정이 지나갔다.
“편집 관련해서 좀 배운 게 있어서 그래.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조금 할 줄 알아.”
“……그거야 그렇다 쳐도, 그럼 찍는 건.”
“그것도 내가 조금…… 할 줄 알아.”
아까부터 입을 반쯤 벌리고 쳐다보는 윤성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반쯤 경악한 표정이 된 우람을 본 대현이 머리를 긁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생각했을 때부터 제일 걱정되던 부분이긴 했다. 예고를 다니던 시절, 대현은 방송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전공인 피아노 외에 대현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부활동이기도 했고, 그 덕분인지 방송부장까지 해보기도 했다. 그렇기에 영상을 찍고 편집하는 것에 익숙한 대현이었지만, 아이돌인 지후가 갑자기 이런 기술이 있다고 하면 누구라도 의아하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눈앞의 둘이라고 다를 리 없었고.
그치만 회사에서의 지원은 없다고 못 박은 상태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비록 기술을 배운 경로에 대해서 거짓말을 좀 해야 할지 몰라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굳이 썩힐 필요까진 없다는 말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하나라도 아쉬운 상황에서는.
며칠간 꾸준히 해오던 생각들을 되짚던 대현이 스스로를 납득시키려는 것처럼 짧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너 누구냐 진짜.”
우람의 음성이 넘어온 건. 깜짝 놀란 표정이 된 대현의 시선에도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고 그를 바라보는 우람의 의심스러운 눈빛은 쉽게 거둬지지 않았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신기해서 그런다. 신기해서. 아무리 우리가 그, ……사이가 안 좋았…… 아니 그러니까 안 친했다 해도. 가끔 너 보면 진짜…….”
“…….”
“모르는 사람 보는 것 같다고.”
안 친하다는 부분에서 버벅거렸던 우람이 끝말을 흐렸다.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물은 건 아닌 듯했으나 그의 말처럼 신기해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 순간 무너질 뻔한 표정을 애써 관리한 대현이 모른 척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럼 다들 동의한 거지?”
“……뭐.”
“네. 근데 형, 그런 건 언제 배우셨어요?”
눈을 반짝거리며 물어오는 윤성의 머리를 쓰다듬은 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 형. 부엌으로 향하는 대현과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는 윤성을 보던 우람이 이내 인상을 구기며 외쳤다.
“아, 뭘 또 밥을 해! 대충 시켜먹어.”
* * *
지후는 아까부터 앞자리에 사이좋게 앉은 뒤통수를 뚫어버릴 듯 노려보고 있었다. 어떻게 비행기를 탔고, 또 내렸고, 렌터카까지 찾아 탔다. 그 모든 과정에서 잔뜩 예민한 표정을 하고 틱틱댔는데도, 대현의 친구들은 이상하리만치 그런 지후를 신경 안 쓰는 모양새였다. 그게 더 짜증났다. 보통 이 정도로 날을 세우면 멈칫하거나 안 건드리거나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근데 얘네는 어째…….
“정대. 꽈자?”
“…….”
“손 떨어진다 나~”
그 반대냐고. 생각을 마친 지후가 밑을 내려다봤다. 앞좌석에서 뻗어온 팔이 제 팔뚝 근처에 과자 봉지를 들이밀고 있었다. 대답 없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과자 봉지의 입구 부분을 더욱 격렬하게 흔들어대는 모양새가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 같았다. 미간을 구기며 과자 봉지를 내려다보는 지후를 아는지 모르는지, 촐싹맞게 한참을 더 그러고 있는 그를 보다 못한 지후가 입을 열었다.
“안 먹어.”
“왜! 너 이거 좋아하잖아. 일부러 사 왔는데.”
뚱하니 내뱉자마자 몸을 돌려 물어오는 얼굴은 진짜 걱정이라도 하는 것 같아 보였다.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은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지후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 상황을 못 견디겠는 이유 중 하나는 이거였다.
“다른 거 줄까? 어? 너 이것도 좋아하지 않았어?”
제게 온전히 쏟아지는 관심. 품에 안고 있던 봉지를 마구 뒤적여 마구잡이로 건네는 과자들을 보던 지후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어색했다. 제가 뭐라고, 그리고 과자가 뭐라고. 봉지를 탈탈 털 기세인 그를 보던 지후가 결국 눈앞에 내밀어진 과자 중 가장 가벼운 것을 집어 들었다. 부러 봉지를 뜯어 입에 넣는 척까지 해주자 그제야 봉지를 뒤적이던 행동이 멈췄다.
“그래, 새끼야. 잘 먹으니까 얼마나 좋아.”
그 말을 끝으로 더 요구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돌아서는 뒤통수를 바라보던 지후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 시선에 움찔했다. 묵묵히 운전을 하던 대현의 친구였다.
“잘했어.”
누가 들으면 개에게 칭찬이라도 하는 줄 알 것 같은 말투였다. 인상을 구기며 시비를 걸려던 지후가 멈칫했다. 마주본 눈이 둥글게 휘어진다. 그리고 따뜻한 시선. 선연히 눈에 보이는 애정에 지후가 멈칫했다. 뭐랄까,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지후가 욕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여행이 짧은 일정이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이다. 안타깝게도 트렁크에 가득 찬 짐을 본 이상 별로 실현 가능성 없는 바람으로 보였지만.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어느 한적한 마을이었다. 제주도에 이렇게 조용한 데도 있었나. 지후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가 그러고 있는 동안에도, 앞좌석의 둘은 벌써 내려서 짐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때마침 지후 앞으로 종이 상자가 하나 불쑥 내밀어졌다.
“얼른 옮기고 밥 먹자. 나 배고파.”
오는 내내 귀찮게 굴던 놈이었다. 이름이 뭐랬지. 영민이랬나. 오는 내내 다른 놈이 불러대는 걸 들어서인지 자신도 모르게 외운 이름을 애써 무시하려 애쓰며 지후가 짐을 받아들었다. 꽤 무게가 나갔다.
“어디다 가져다 놓으면 되는 건데? ……야.”
짐만 안겨주고는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야. 투덜거리다 말고 지후가 말을 멈췄다. 발을 조금만 내디뎌도 성큼 다가올 것 같은 바다 때문이었다.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파도 소리마저도 지나치리만큼 잘 들렸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젖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지후는 숨조차 멈추고 제게 다가오는 바다를 마주했다.
“추워서 물놀이 못해, 지금은.”
기척을 느낀 지후가 그제야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 자신처럼 바다를 고요히 응시하고 있는 옆모습이 보였다. 바다에서 시선을 떼서 지후를 쳐다본 그가 뒤로 고갯짓을 했다. 그 방향을 따라 눈을 굴리자 그제야 저 멀리 있는 펜션이 보였다. 그 앞에서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영민까지도.
“가자.”
손에 들고 있던 게 마지막 짐이었던 듯 트렁크를 닫은 그가 앞장섰다.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지후는 자꾸 바다를 흘끔거리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아름다웠다. 오는 내내 툴툴거리던 제가 부끄러울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