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괜찮아?”
지웅보다 앞서 뛰어갔던 지후가 넘어진 사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손을 잡아 일으키고 다친 곳이 없나 살펴보는 뒷모습을 보던 지웅의 표정이 묘해졌다. 다음으로 시선이 향한 곳은 그 옆에 선 우람이었다. 넘어진 은호를 앞에 두고서도 태연자약하게 서 있던 그는 지후가 소란의 중심으로 뛰어들고 나서야 어딘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는데, 은호를 일으킨 지후가 저를 쳐다보자마자 시선을 피해 딴청을 피우기까지 했다.
의외였다. 운동장에 들어서 이 풍경을 보았을 때만 해도 당연히 지후가 우람에게 달려갈 거라 생각했는데. 지후에게 음료수를 사러 가자고 부탁할 때도 지후의 옆에 있던 건 우람이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티격태격하는 얼굴들은 모르긴 몰라도 친해 보였다. 거기다 은호와 지후가 같이 있는 풍경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터라, 무의식중에 지후랑 우람이 더 친하겠거니 생각을 했던 모양이었다.
“괜찮아?”
지후가 말을 시작하자마자 주변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네.”
한 박자 늦은 은호의 대답을 들은 지후가 그제야 우람 쪽으로 뒤돌았다.
“무슨 일이야?”
“…….”
“한우람.”
“내 잘못 아냐. 저 병ㅅ…… 아니, 그러니까 저 새끼가 지나가다가 내 발에 걸려 넘어진 거라고.”
단호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지후에 변명이라도 하듯 내뱉는 우람이 보였다. 지후가 우람과 은호를 번갈아 쳐다봤다. 한숨을 푹 내쉰 그가 우람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려 명령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럼 사과해야지.”
“뭐? 야, 너 내가 방금 한 말 듣긴 했냐?”
“의도했든 안 했든, 네 발에 걸려 넘어졌다는 거 아냐. 사과해.”
“이지후!”
“한우람.”
억울하다는 듯 외치던 우람은 제 이름을 조용히 읊조리는 지후와 몇 초 눈을 마주하더니 의외로 빨리 꼬리를 내렸다. 반항이라도 하듯 터벅터벅 걸어 은호의 앞에 다가선 그가 허리를 조금 구부려 은호의 무릎을 힘주어 털어내는 게 보였다. 멍하니 서 있었던 은호가 짜증을 내며 뒤로 물러설 때가 되서야 멈추고서 입을 연 우람은 한 쪽 입꼬리를 끌어올린 채였다.
“미…… 안하다. 네가 비록 병신같이 내가 서 있던 쪽으로 걸어오긴 했지만.”
“한우람!”
“내 발이 거기 있던 건 잘못했네.”
“……괜찮아요.”
저게 사과인가, 시비인가. 지웅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도 우람의 사과와 은호의 대답으로 대충 소란이 정리되어 가는 듯했다. 몰려 있던 사람들이 흥미를 잃고 하나둘 제자리로 돌아가는 걸 둘러보던 지웅이 다시 가운데에 선 넷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유은호. 내 몸 상태가 별로거든 요새. 걸림돌마다 족족 걸려서 넘어지고 그래. 그러니까. 또 그럴지도 모른다고.”
“…….”
“조심해.”
지후가 억지로 하게 한 화해 때문일지는 몰라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꽤나 강렬했다. 물론 다시 그 사이를 가르고 선 지후 때문에 피 튀기는 눈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윤성아, 경기 끝난 거야?”
“네? 아…… 잘 모르겠는데.”
어쩔 줄 모르고 중간에 서 있던 윤성에게 다가간 그가 지웅을 돌아봤다
“끝난 거지?”
“어? 어. 그런 것 같은데.”
갑자기 제게 돌아온 시선에 놀랐던 지웅이 곧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가 옆에 선 우람과 윤성의 팔을 잡는 게 보였다.
“나중에 보자.”
“어? 어.”
그 와중에 눈이 마주친 지웅에게 짧은 인사를 건네는 것까지도 잊지 않은 그가 곧 우람과 윤성을 끌고 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을 되짚으며 픽 웃던 지웅이 고개를 돌렸다. 소란 아닌 소란을 만든 넷 중, 한 명이 남아 있었다.
“넌 안 가?”
저처럼 셋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은호가 고개를 돌려 저를 응시했다. 은호와는 오며가며 여러 번 마주친 사이였다. 은호가 플러그 멤버들 사이에서 그나마 가장 아이돌 친목활동에 자주 참여하는 멤버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표정은 못 봤었는데.
“전…….”
“…….”
“됐어요.”
짓씹듯 뱉은 얼굴이 곧 뒤돌았다. 셋이 걸어가고 있는 입구 쪽을 한 번, 은호가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한 벤치 쪽을 한 번 쳐다본 지웅이 곧 어깨를 으쓱했다. 멋대로 판단하고 싶지는 않다. 각자 사정이 있는 거겠지.
고개를 돌린 그가 한곳에 몰려 저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해산하자!”
“뭐, 뭐!”
“아무 말 안 했는데.”
“사람 쫄리게…… 잔소리 할 거면 빨리 하던가.”
그래도 자기가 잘못한 건 아나 보다. 택시를 탄 순간부터 눈치를 보더니 결국 배 째라는 식으로 구시렁거리는 우람에 나름 심각한 생각을 하고 있던 대현의 입가가 흐트러졌다. 대현이 웃는 걸 보고 더 미심쩍다는 얼굴로 변한 우람은 옆에 앉은 윤성까지 밀치고서 뒷자리 가운데를 떡하니 차지하고서는 그를 흘끔대고 있는 중이었다. 덩치만 커가지고, 저거 진짜. 한숨을 쉰 대현이 기사 아저씨께 작게 양해를 구하고 뒤돌았다.
“잔소리 하면 들을래?”
“뭐?”
“들을 거냐고. 너 내 말 지지리도 안 듣잖아.”
“내가 언제!”
“일례로, 오늘 오면서 내가 사고 치지 말라고 했었지.”
“그건! 유은호 그 새끼가!”
“뭐. 멀쩡히 지나다니는 게 싫었어? 네 앞에서?”
풀로 입을 붙인 것처럼 입을 딱 다무는 얼굴을 보고 대현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혹시나 했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경기장에 들어서는 은호의 멀쩡한 모습을 보고 화가 나 일을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지웅이 도와달라 했을 때 우람도 데리고 가는 건데. 남아있겠다는 말에 지웅과 어색한 모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제가 멍청했다. 그러나 후회는 늦었고, 이미 우람이 은호의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는 건 일어난 일이었다. 거기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사람들까지.
“할 거면 다음엔 사람 없는 데서 해.”
“……뭐?”
“모두 보는 앞에서 사이 안 좋은 거 광고하듯이 그러지 말란 말야. 잊었어? 우리 얘기했던 거?”
“…….”
“싸워도 우리 선에서 싸우고, 해결도 우리 선에서 하자고 했잖아, 이제. 거기다 윤성이는 무슨 죄야. 우린 거기 멤버도 아니고 윤성이 보러 간 거였는데 형들이 그렇게 싸우면 쟤가 뭐가 되겠냐고. 아, 기사님. 저기서 내려주시겠어요?”
제가 생각했던 잔소리가 아니었는지 어딘가 벙벙해진 얼굴을 확인한 대현이 이내 고개를 돌려 기사 아저씨께 오른쪽 길가를 가리켰다. 곧 차가 멈추고 택시비를 지불한 대현이 먼저 내려 뒷좌석에서 나오는 윤성과 우람을 기다렸다. 오는 내내 우람과 대현 사이에서 숨죽이고 있던 윤성을 떠올린 대현이 그에게 다가가 땀으로 젖은 앞머리를 정리해 줬다.
“배고프지?”
“네? 아, 전 뭐…….”
“난 배고픈데. 뭐 먹고 들어갈래? 아니면 들어가서 먹어도 되고. 그러고 보니 저번에 고기 사둔 거 좀 남은 것 같은데. 쌈 채소만 좀 사가지고 들어가서 구워 먹을까?”
시무룩하게 대답하던 윤성이 고기란 말에 고개를 번쩍 든다. 대현이 그를 마주보고는 씩 웃었다. 윤성을 볼 때마다 깨닫는 거지만, 우람과 윤성 모두 애 같은 면이 있어도 확실히 키우고 싶은 건 윤성 쪽이다.
“그럼 고기 먹는 걸로 하고. 저기 마트 들렀다 가자.”
“……고기 먹으면 먹는 거지 귀찮게 무슨 또 마트를.”
지은 죄가 있으니 차마 메뉴 결정에 토를 달지는 못하고 투덜거리는 우람을 본 대현이 씁-소리를 내며 엄한 얼굴을 했다. 대현의 고갯짓에 따라 또 다시 둘의 눈치를 보는 윤성을 확인한 우람이 표정을 구기며 앞서 걸었다. 셋이 가끔 들르곤 하는 마트 쪽이었다. 그래도 아까 체육관에서 윤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라고 잔소리한 걸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안 오면 버리고 간다.”
짜증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도 돌아보며 협박하는 게 웃겼다. 화들짝 놀란 윤성은 어느새 우람을 졸졸 쫓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면서도 대현이 오고 있나 돌아보는 게 귀여웠다. 형, 빨리요! 얼른 오라며 손짓을 하는 얼굴을 본 대현이 걸음을 옮기다 말고 자리에 멈췄다. 바지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한 대현이 이내 윤성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나 전화. 먼저 들어가 있어.”
“형…….”
“빨리 갈게. 우람이가 뭔 짓 하면 내가 혼내줄 테니까 걱정 하지 말고.”
반쯤 울상을 하고서도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람을 따라가는 뒷모습이 짠하고도 웃겼다. 웃으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대현이 곧 미간을 모았다.
“이지후?”
[야, 정대현. 너 이 새끼들 뭐야. 돌았어?]
“뭐야. 갑자기 전화해서 왜 욕부터 하고 지랄이야.”
갑자기 넘어온 욕설 때문이었다. 뭔지도 모르고 덩달아 짜증을 내던 대현이 이내 멈칫했다.
[얘네 뭐냐고!]
“엉? 얘네? 누구?”
[네 친구라는 새끼들! 제주도 여행인지 뭔지 가야 된다면서 아침부터 여기에 쳐들어왔다고!]
그제야 떠올랐다. 이마를 짚은 대현이 핸드폰을 귀에서 떼고 캘린더 어플을 실행시켰다. 12월 14일…… 오늘 맞다. 아차 하는 표정을 지은 대현이 말을 잇기도 전에 지후의 음성이 건너왔다. 그답지 않은 다급한 음성이었다.
[정대현? 야!]
“아…… 미안. 까먹고 있었다, 내가. 그래서 걔들 지금 뭐 하는데?”
[몰라, 아씨 아까는 나보고 아직도 짐 안 쌌다고 지랄하더니 지금은 대신 싸주고 있어. 얘네 어떻게 내쫓아? 무슨 말을 해도 처듣질 않아!]
평소보다 거친 숨소리에다가 빠른 말투까지 당황함이 여실히 느껴지는 음성은 듣다 보니 어딘가 웃겼다. 더군다나 욕하면서도 짐을 대신 싸고 있을 영민과 선우를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웃음소리가 들렸는지 바로 넘어온 지후의 욕을 듣던 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걔네 원래 내 말 잘 안 들어.”
[뭐? 야, 그럼 어떻게 하라고!]
“이 김에 그냥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미친. 너 지금 장난하냐?]
“뭐 어때. 제주도 공기 좋고 물 좋고. 그리고 야, 너.”
[…….]
“어차피 집에 있어도 할 것도 없잖아. 우중충하게 집에만 있을 거면서.”
[야, 아무리 그렇다 해도…….]
“다녀와. 내 친구들 나쁜 애들 아냐.”
[말이 되는 소릴…… 야, 정대현! 야!]
대답을 하지 않자 불안한지 소리를 높여 물어오는 지후의 말을 듣던 대현이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그리고 화면의 빨간 버튼을 눌렀다. 금방 다시 전화가 들어왔지만 못 본 척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대현은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잘된 상황이라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저번에 찾아갔을 때 얼굴 보니 밥이라도 제대로 잘 먹고 있는 건지 걱정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딱 봐도 집에서 하는 거라고는 텔레비전 보는 거랑 책 보는 것밖에 없어 보였는데. 이 김에 바람도 쐬고 하면 괜찮겠지. 거기다 제 친구들은 그런 지후를 귀찮게 할 수는 있어도, 괴롭힐 수는 없는 애들이었다. 괜찮을 것이다.
모순적일 정도로 후련하기까지 한 마음을 뒤로 하고 대현이 걸음을 옮겼다. 마트에 들어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운동용품 앞에서 기웃거리는 우람과 그 옆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윤성이 눈에 들어왔다.
“형!”
달려오는 윤성을 대충 안아주며 대현이 우람 쪽을 향해 눈을 찌릿했다. 찔린 표정으로 들고 있던 보조제를 내려놓는 그에게 대현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카트까지 끌고 오는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겨우 참은 대현이 우람을 재촉했다.
“빨리 안 와?”
“가고 있다고! 머슴도 아니고 진짜…….”
“너 같이 말 안 듣는 머슴이 이 세상에 있냐?”
“……꺼져라 진짜.”
토라진 듯 오다 말고 홱 방향을 트는 카트를 본 대현이 결국 소리 내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대현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표정이 풀린 윤성은 그의 옆에서 착실히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옆과 앞을 둘러보던 대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것도 꽤 나쁘지 않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