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훤칠한 외모, 적당한 자신감, 어딜 가든 분위기를 이끄는 면이 있는 지웅은 노력하지 않아도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보이기 전에 그 사람이 먼저 다가오는 일이 많았고, 드물게 그 반대의 경우가 있어도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가까워질 수 있었다. 연예계에 들어서서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한 아이돌들은 오히려 가까워지기 더 편했다. 그중 다수가 지웅에게 다가왔고, 때로는 지웅이 다가갔으며, 친구가 되는 건 쉬웠다. 그러니까, 지후가 그의 관심사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작은 의외의 곳에서였다. 같이 나갔던 예능 프로그램에서였다. 딱 봐도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수단으로 고용된 아이돌들 사이에 선 지웅은 평소처럼 웃고 있었다. 구색을 맞추기 위한 수단으로 몇몇 아이돌 그룹의 리더들이 모인 자리였다. 선배 그룹이 둘, 후배 그룹이 하나, 그리고 예스와 데뷔 시기가 같은 플러그의 리더 지후가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지후에게 시선을 뒀던 지웅이 그를 보자마자 습관처럼 웃어 보였다.
표정 변화 없이 제게서 떨어지는 눈은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음악방송 때마다 좋으나 싫으나 마주치는 지후는 한결같이 무표정했으며, 지웅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리고 그건 지웅에게만 한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모두에게 철벽을 치는 듯한 그가 흥미로웠던 것도 한두 번이지, 가끔 지나가다 하는 인사조차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은 그를 더 이상은 귀찮게 할 생각이 없었던 지웅은 금방 관심을 껐다. 평소처럼 별 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던 지웅은 곧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오프닝에서 들었던 짝짓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촬영장 모두의 시선이 엠씨와 말장난을 하고 있는 여자 연예인을 향하고 있었다. 여성 출연자에 비해 남성 출연자가 많은 촬영장에서 벌어진 게임은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여왕벌이 만들어지는 시스템이었다.
문제는, 첫 타자로 나서는 여자 연예인이 외모 관련해 짓궂게 놀림을 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거다.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외모였음에도, 그녀가 그곳에서 유일한 개그우먼인 데다가 다소 집요한 엠씨들의 장난도 잘 맞받아치는 털털한 이미지였던 덕에 게임에 나서기도 전에 그래서 선택은 받을 수 있겠냐는 엠씨들의 집중포화를 받고 있었다.
아이돌을 꿈꾸며 한국에 온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외모를 가지고 놀리는 한국 예능의 풍조는 지웅이 자라면서 배워온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접할 때마다 거북했다. 굳어지는 표정을 애써 관리한 지웅이 조용히 혀를 찼다. 그러는 사이에 이미 놀림을 실컷 당한 여자는 일부러 더 오버를 하며 남성 출연자에게서 호응을 유도하고 있는 중이었다. 선택을 받는 곳이기도 한 세트 의자에 앉아 남성 출연자들에게 사랑의 총알을 쏘는 모습을 보며 지웅이 조심스레 주위를 살폈다.
옆을 보니 지웅보다 몇 번의 더 방송 짬이 있는 선배 그룹의 리더들은 분위기에 맞춰 장난스러운 표정만 짓고 있었고, 후배 그룹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분위기에 맞춰야 할지, 아니면 그냥 나가야 할지 모르겠는 표정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는 지웅을 발견했는지 지웅에게 다가온 엠씨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웅 씨, 나가시는 겁니까? 지금 경쟁자들 견제하는 건가요?”
“그런 말 하면 나가야 되는데, 애먼 친구 괴롭히지 마세요.”
말을 끊고 들어온 남자 개그맨의 애드리브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가야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나간다 해도 더 불편한 상황만 만들어질 것 같았다. 지웅이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일 때였다. 웃음이 가득하던 세트장에 잠시 정적이 맴돌았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고개를 돌린 지웅이 곧 눈을 크게 떴다.
“받아주세요.”
“……어…….”
모두의 시선이 몰린 곳에는 촬영장에서 이런 관심을 받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은 인물이서 있었다. 출발선에 있던 장미꽃을 들고 성큼성큼 걷던 등이 행동을 멈추고 당황한 표정을 하는 개그우먼 앞에서 멈춰 섰다. 장미를 건네고서야 출발선에 선 연예인들을 돌아보는 눈은 주변에 관심이 없어 보이던 아까와 다를 바 없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인가요. 지후 씨……!”
정적을 깬 건 지웅의 옆에서 그를 몰아가던 엠씨였다. 얼어붙은 분위기를 살리려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감탄사를 뱉은 그가 지후와 개그우먼에게 다가섰다.
“받아주실 겁니까?”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커플 탄생! 와. 지후 씨, 들어가시지 말고 잠깐만요.”
그걸로 됐다는 듯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려 하는 지후를 잡은 엠씨가 질문을 이어나갔다. 당황한 듯 보였던 그의 눈이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잘하면 재미있는 장면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을 마친 모양이었다.
“특별히 한영 씰 선택하신 이유라도?”
질문이 들리자마자 웅성거리던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말없이 게스트들을 훑던 지후의 시선이 방송 시작 이후 유독 개그우먼의 외모에 대해 걸고넘어지던 남자 개그맨에게 멈췄다. 아까 엠씨가 지웅을 인터뷰하려 할 때 말을 끊고 들어온 이기도 했다. 지후의 시선을 느낀 건 지웅만이 아니었던 듯 촬영장 안 모두의 시선이 개그맨 쪽으로 향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시선을 끊고 고개를 돌린 지후가 옆의 엠씨에게 답했다.
“아름다우시잖아요.”
1초, 2초, 3초. 정적만 흐르던 세트장이 시끄러워졌다. 와아아아아- 아까의 정적을 메우려는 듯 두 배로 시끄러워지는 듯한 주위에도 지웅의 시선은 올곧게 지후를 향하고 있었다. 폭탄선언을 한 것치고는 태연한 얼굴을 보던 눈빛이 바뀌었다. 결국 입꼬리를 올려 웃고 만 지웅은 그 순간 생각했다. 나 쟤랑 친구해야겠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가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게 얼마나 건방진 생각이었던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번호를 알려달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또 내뺀 지후를 찾던 지웅이 한숨을 쉬었다.
대기실에서도, 심지어 모든 가수들이 올라가야 할 음악방송의 마지막 수상 순서에서도 지후와 대화를 나누기 어려웠다. 애초에 마주치기가 어려웠으며, 마주쳐도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지후는 아이돌 간의 사적 모임에도 전혀 얼굴을 비추지 않는 인물이었다.
“포기해, 형.”
“뭘 포기해? 설마.”
“또 허탕치셨단다.”
“미친…… 내가 살다가 김지웅이 누구랑 못 친해지는 것도 보고.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오래 살고 볼 일이긴. 너 열아홉 살이다, 이 자식아. 대기실에 들어선 자신을 놀리는 멤버 동생들의 머리를 쥐어박던 지웅이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댔다. 포기하고 싶지 않아도 곧 있으면 포기해야 할 거였다. 겹치는 활동기간도 마지막인 데다가 다음 활동이 겹칠지 안 겹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착실하게 인기 아이돌의 수순을 밟아가는 예스는 여러 문제가 불거지는 플러그와 이미 눈에 보이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소속사라고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인지 예스의 소속사는 이제 플러그를 예스의 라이벌로 생각지도 않는 듯했다. 일례로 늘 활동을 시작할 때 유니버스의 소식을 예의 주시하던 그들은, 이번에는 그런 절차조차 없이 예스의 후속활동을 기획했다. 제 그룹이 잘 되는 건 좋지만…… 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인 지웅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정말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 * *
그리고 오늘이었다. 제 시선을 느낀 듯 돌아보는 얼굴은 이지후가 맞았다. 평생 친해지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안 들어갈 것인지 묻는 얼굴을 보고서야 과거 회상을 멈춘 지웅이 걸음을 옮겼다. 지웅보다 몇 걸음 앞에 걷던 지후가 입구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뒤따르던 지웅이 멈칫했다. 지후 때문이었다. 걸음을 멈춘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운동장 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의아한 낯으로 그 시선을 따라가던 지웅도 이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구장 구석에 동그랗게 무리 지어 몰려 있는 얼굴들을 확인하자마자 질문이 튀어나갔다. 옆에 있던 지후가 봉지를 바닥에 내려놓고 달려가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었다. 그의 물음을 듣고 돌아보는 이는 있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웅이 상황 파악을 위해 빠르게 눈을 굴렸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이 길을 터줬다. 결국 원의 중앙으로 간 지웅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한 명은 넘어져 있고, 한 명은 서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관찰이라도 하듯 둘러싸고 있었고. 아, 아니구나. 무리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온 한 명이 그 둘 사이에 서 있는 것까지 훑어본 지웅은 그제야 그 셋이 모두 한 그룹으로 묶일 수 있는 사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방금 달려간 지후까지 합하면 넷 모두가 플러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