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갑자기 들린 음성에 둘의 고개가 돌아갔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에 선 얼굴은 방금 지후를 부른 사람인 듯했다. 관중석과 운동장 사이의 펜스에 서서 둘을 올려다보는 얼굴이 낯선 듯 익숙했다. 어……? 얼빠진 신음을 내던 대현은 오늘만 해도 세 번이나 의식하게 된 얼굴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다. 대현과 눈을 마주치자마자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호남형의 남자가 누군지를 말이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 맞나.”
예스의 리더, 김지웅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을 숨기지 못한 대현이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두고 눈을 깜빡댔다.
“어?”
얼떨결에 대답은 했다만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눈만 멀뚱히 맞추고 있는 대현을 보던 그의 눈이 또 휘어졌다. 볼에 팬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대현은 그가 잘생겼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즉시 뭔가 배신이라도 한 듯한 느낌에 화들짝 놀라 얼굴을 굳히긴 했지만.
“너 이런 데 잘 안 오잖아. 아닌가? 한 번도 못 본 것 같은데.”
“아…… 어. 그랬…… 지?”
“누구 보러 온 거야?”
“그…… 우리 팀 멤버가 여기 있어서.”
“설마 윤성이?”
“응.”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어내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 때문인지 뜬금없는 상황에 당황해있던 대현마저도 어느새 막힘없이 대답을 내놓고 있었다. 펜스에 반쯤 기대어 대화를 이어가던 그가 대현의 마지막 대답에 말을 멈추고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을 정도로 빤히 바라보는 그에 대현이 헛기침을 내놓을 때가 되서야 그가 움직였다. 펜스를 가볍게 뛰어넘은 그에 대현이 깜짝 놀라 물러섰다. 말없이 대현과 지웅의 대화를 지켜보던 우람이 대신 인상을 찡그렸다.
거기다 갑자기 펜스를 넘은 그에 놀란 건 대현뿐만이 아니었다.
“김지웅! 거기서 뭐 하냐!”
멀리서부터 들린 고함에 대현이 동그란 눈을 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이어나간다는 거에 너무 당황했던 탓인가, 눈치가 빠른 대현답지 않게 이쪽으로 몰리고 있던 시선을 이제야 알아챘다. 벤치에 앉은 멤버 중 하나가 지웅 쪽으로 입을 모아 소리치는 걸 보던 대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웅을 봤다. 대현과 우람이 앉은 좌석 앞 통로에 선 지웅이 몸을 돌려 손을 모아 소리쳤다.
“나 빼고 하고 있어! 가서 음료수 좀 사올게!”
방금 들은 말대로라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을 테다. 안심한 표정으로 하던 대현이 방금 뱉은 말과 달리 여전히 제 앞에 서 있는 지웅을 흘끔거렸다. 인사를 하고 가려고 저러나.
“나 좀 도와줄래?”
그러나 지웅이 건넨 건 인사가 아니었다. 장난스럽게 손을 모으며 묻는 그를 본 대현이 멍한 표정을 했다.
“거기 포카리도 몇 개 더 집어줄 수 있어?”
“이거?”
“응. 고마워.”
지웅이 부탁한 것까지 집어 들고 나니 손에 들기에는 음료수 캔이 많았다. 결국 품 안으로 조심스레 옮겨 든 대현이 앞장서는 지웅을 따라 계산대로 향했다. 먼저 들고 간 캔들을 모두 계산대 위로 올려놓은 지웅이 자연스레 손을 뻗어 대현의 품에 안긴 음료수 몇 개를 가져갔다. 지갑을 꺼내 계산하는 그를 보던 대현이 알바생에게 물었다.
“저, 혹시 큰 봉지 있으면 주실 수 있을까요?”
알바생이 허둥지둥 카운터 밑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봉지를 받아든 대현이 당황한 표정을 하고는 그녀를 쳐다봤다.
“저, 이거…… 쓰레기봉투인데…….”
“아, 아, 죄송…… 죄송해요!”
뛸 듯이 놀라며 대현이 다시 내민 쓰레기봉투를 가져가는 얼굴은 유독 붉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현과 지웅이 편의점에 들어온 순간부터 어딘가 이상하게 굴던 그녀였다. 지웅의 팬인 모양이다. 대수롭잖게 생각한 대현이 다시 건네받은 봉지 안으로 캔을 넣기 시작했다.
“플러그 팬이시죠?”
그러니까, 지웅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뜬금없는 지웅의 물음에 대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건 앞의 알바생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지웅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긍정의 대답에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짧게 스쳐 지나갔다. 카운터 밑으로 손을 뻗은 그녀가 곧 대현의 앞으로 하얀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어떻게 모르겠어요. 제 얼굴은 잘 쳐다보시면서, 이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시던데.”
그 와중에도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지웅은 하하 사람 좋은 웃음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어…… 당황한 대현이 종이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여기에 싸인해야 되는 건가……? 그래도 삼 년간 팬으로 쌓았던 내공이 있어서인지, 지후의 싸인을 대충 흉내 내어 싸인을 마친 대현이 그녀 쪽으로 종이를 건네다 말고 멈칫했다. 종이를 받으려고 내민 그녀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대현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더 빨개지는 얼굴을 본 대현이 꾸벅 허리를 숙이며 종이를 건넸다.
“감, 감사해요…….”
“아…… 아니에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어색하게 허리를 꾸벅대는 둘은 가만두면 계속 그러고 있을 모양새였다. 지웅이 계산대 위에 올려놓은 봉지를 양손에 들며 대현을 툭 쳤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올게요~!”
쾌활한 지웅의 인사에 알바생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두 손 가득 든 봉지 덕에 어깨로 문을 열려는 지웅을 본 대현이 빠르게 달려가 문을 열어줬다.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며 나가는 뒷모습을 따라 나가던 대현이 뒤를 돌아봤다. 나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던 듯, 바로 눈이 마주친 그녀가 황급히 계산대를 청소하는 척을 했다. 대현이 다시 한 번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문을 닫았다.
먼저 나간 지웅은 대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재촉 한번 하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대현이 옆에 서자 그제야 걸음을 옮기는 얼굴에는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대현이 손을 뻗었다.
“줘. 나눠 들자.”
“어?”
“도와달라며.”
애초에 이렇게 같이 편의점까지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한 지웅의 말까지 언급하며 대현이 결국 봉지 하나를 가져갔다. 얼떨결에 봉지 하나를 건네준 지웅이 곤란한 표정을 지우고는 픽 웃었다.
“요새 하도 말이 많길래 걱정했는데.”
“어?”
“너네, 해체설 돈 거. 우리도 봤거든.”
뜬금없는 방향으로 튀는 대화에 대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덩달아 걸음 속도를 늦춘 지웅이 곧 멈춰 섰다. 얘는 뭐 하러 이런 얘기를 이지후한테 하고 있는 걸까. 표정에 악의는 없어 보이긴 한다만. 묘한 기분이 된 대현이 그를 마주봤다.
“아닌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에게서 들을 거라고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예스는 플러그와 라이벌로 묶이던 그룹이었다. 해체를 한다면 예스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대현이 결국 질문했다.
“왜?”
“어?”
“그러니까. 왜 다행이라고 느낀 건지 잘 모르겠어서.”
의도하던 것보다 더 날카롭게 나간 듯한 말에 대현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다행히 지웅은 오해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을 다시 얼굴에 띠운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왜긴. 동료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슬프지. 특히나 너네랑 우리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데뷔 때부터 쭉 붙어 있었잖아.”
“…….”
“처음에는 회사에서 너네랑 활동 시기 겹치게 할 때마다 진짜 짜증났거든. 싸우라고 부추기는 것만 같아서. 근데 나중에는 안 겹치면 서운하더라고.”
“아…….”
“그리고 사실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해.”
플러그랑 항상 많이 붙어 있던 그룹이기에 예스에 대해서는 대현은 원치 않아도 이것저것 주워듣게 된 정보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웅에 대한 거였다. 성격이 좋아 그렇게 발이 넓다더니, 라이벌 그룹의 안위를 걱정할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현이 저를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웅은 계속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가 쑥스러운 듯한 얼굴로 덧붙였다.
“너랑 친해지고 싶었거든, 나.”
“뭐?”
“뭘 그렇게 놀라.”
펄쩍 뛸 정도로 놀란 대현을 보던 그가 그제야 멋쩍은 듯한 웃음을 지었다. 만난 직후부터 줄곧 여유로웠던 그가 처음 보이는 표정이었다.
“몰랐어? 티를 그렇게 냈는데.”
“……몰랐는데.”
“그럼 그 철벽이 다 의도치 않은 거였다고?”
이제 어이없어 하는 건 지웅 쪽이었다. 고개를 저으며 픽 웃던 그가 다시 대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난 이래로 늘 장난기가 가득하던 눈이 조금은 진지한 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쨌든 넌 내가 사람과 친해지는 게 어려울 수도 있구나, 깨달은 첫 케이스야. 그래서 사실 반쯤 포기하기도 했고.”
“…….”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데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었거든.”
“…….”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어?”
굳이 따지자면 네가 만든 인연이지. 얼떨떨한 상태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던 대현이 제 앞에 불쑥 내밀어진 핸드폰을 내려다봤다.
“친해지자.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