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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27화 (27/119)

27화

“……한우람?”

대현이 눈을 비비며 우람을 불렀다. 작은 부름이었음에도 화들짝 놀라 뒤도는 사람은 우람이 맞았다. 거실로 걸어가 시간을 확인한 대현이 다시 부엌으로 돌아왔다. 놀라 뒤돌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 있는 우람을 훑은 대현이 그에게 다가섰다.

“뭐 해. 이 밤에.”

“아니, 그게.”

“설거지하고 있는 거야?”

“오지 마!”

우람이 당황한 얼굴로 뒤돌았다. 개수대에 몸을 딱 붙인 그는 대현이 못 보게 하려는 것 같았지만, 대현은 이미 상황파악에 필요한 것들을 다 본 상태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이해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요 며칠간 병원에 있어 숙소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우람이 이 늦은 시간에 부엌에 있는 게 의아했다. 대현의 시선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우람은 이제 말을 더듬기까지 하고 있었다.

“네가 저번에…… 아…… 그러니까!”

“…….”

“양심적으로 하라며…… 아씨.”

뭔 소린지 이해하지 못해 인상을 찡그리던 대현의 뇌리에 문득 스치는 것이 있었다. 우람에게 콩나물국을 해줬던 날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불퉁한 얼굴로 선 그에게 설거지를 하라고 시키며 비슷한 말을 했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거기다 그때는 잘못한 게 있었다지만,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의외의 상황에 픽 웃음이 나왔다. 대현의 시선이 방금 건조대 위에 우람이 올려놓은 듯한 락앤락 통과 도시락 통을 훑었다. 부러 다른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는 우람의 옆얼굴을 확인한 대현이 그에게 다가섰다.

“이지후.”

“잠은 좀 잤어?”

“어?”

되묻는 우람을 지나쳐 우람이 잘못 엎어놓은 도시락 통을 훌훌 털어서 다시 올려놓던 대현이 여상하게 덧붙였다.

“병원에 있으면 자도 잔 것 같지도 않잖아.”

“……어? 어. 그렇긴 한데.”

“얼른 들어가서 자. 내일 해도 되는 걸 이 밤에 하고 있냐 굳이. 피곤하게.”

툭툭 던지는 듯하지만 걱정이 느껴지는 말이기도 했다. 멍하니 서 있던 우람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궜다. 숙인 시야로 맨발이 눈에 들어왔다. 한 발짝 물러난 저 대신, 남은 통 하나를 금방 씻어내고는 건조대 위에 올려놓고 있는 사람의 발이 이리 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발들을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목이 콱 막혀왔다.

“……한우람?”

반응 없는 뒤가 이상했던 대현이 뒤돌았다.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부엌 조명 아래 선 우람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저러지. 뭔 일이라도 있나. 다가서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고맙다.”

조용하지만, 대현에게는 충분히 들릴 정도의 크기의 말이었다. 대현의 눈이 커졌다. 우람에게 뻗으려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엄마가 검사 후에 계속 식사를 못 하셨거든. 근데…… 네가 쒀준 죽은 맛있다고 잘 드셨어.”

“…….”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셨어.”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목소리로 느껴졌다. 그가 지금 얼마나 용기 내어서 하는 말인지. 그리고 얼마나 진심인지가. 대현이 우람과의 사이를 좁혔다. 고개를 들어 대현과 시선을 마주한 우람의 눈이 흔들렸다. 몇 년 만에 아무런 적대심 없이 마주본 눈이 그를 향해 말하고 있는 것만 같아서였다.

“한우람.”

“…….”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고, 위로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주어도 없는 한 마디였을 뿐인데 이상하게도 위로가 됐다. 우람이 긴장을 풀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어느덧 우람의 어깨로 올라온 손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쳤다. 우람을 바라보는 눈빛이 따뜻했다.

“어머님도.”

우리도. 조그맣게 덧붙인 말이었지만 우람은 들을 수 있었다. 며칠 동안 불안하게 날뛰던 신경이 놀랍도록 빠르게 가라앉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에 멍하니 눈을 꿈뻑이던 우람이 제 옆을 지나치려는 등을 황급히 붙잡았다. 고맙다는 인사를 했으니 이제는 사과를 해야 했다. 엿들으며 알게 된 그동안 저의 지독했던 오해나, 그걸 들었으면서도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자신의 비겁함을.

“이지후. 삼 년 전에…… 내가 너한테.”

“…….”

“내가 너한테 그랬던 거.”

“…….”

“미안해.”

멈칫한 등은 그럼에도 뒤돌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편이 우람에게 편했다. 굳은 등을 향해 선 우람은 고해성사라도 하듯 읊조렸다.

그땐 내가 병신이었어. 미안해.

죽어도 못 할 것 같았던 말들은 의외로 술술 나왔다. 새벽, 작은 조명 하나만 외로이 켜진 주방에서 우람은 한참이나 그렇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이지후.

미안해…….

이지후.

당사자가 듣지도 못하는 사과는 그렇게 한참을 더 이어졌다. 누구도 잡을 용기를 내지 못해 흘려보내야만 했던 여러 밤들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넝 긍데 응싱응 엉젱 뱅워쌴.”

어이없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대현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빠르게 입안으로 구겨 넣고 있는 얼굴은 이미 밥 외의 다른 사항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질문을 해놓고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식탁에 있는 음식을 다 먹어치울 기세로 덤벼드는 우람을 본 대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건 진짜…… 차라리 소를 키우는 게 낫겠는데.’

어릴 적 할아버지 집에서 키우던 소가 생각날 정도로 우람은 덩치와 맞먹는 식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저와 별거 아닌 걸로 티격태격하다가도 음식 앞에서는 순한 양인 것처럼 변해 늑대처럼 먹어치우는 그를 볼 때마다 대현은 깜짝 깜짝 놀라곤 했다.

“삼키고 말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응싱응 엉제 뱅워쌴교.”

“씹고 말하라니까…… 됐다. 그냥 계속 먹기나 해. 아, 그건 말고! 그건 윤성이 거야.”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대현이 깜짝 놀라 앞의 접시를 들어올렸다. 그가 방금 우람의 젓가락으로부터 구해낸 것은 윤성이 좋아하는 계란말이였다. 볼에 음식을 가득 넣고는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우람에게서 접시를 뺏어 든 대현이 뒤의 김치냉장고 위에 접시를 올려뒀다.

“먹는 거 가지고 드럽게 치사하게 구네. 같이 먹는데 네 거 내 거가 어딨냐.”

그제야 입에 든 걸 삼킨 우람이 억울하다는 듯이 항변했다.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던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화장실에서 나온 윤성이 식탁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얹고 털던 얼굴이 대현을 보자마자 헤실 풀어졌다. 옆의 의자를 빼주며 손짓하는 대현의 옆으로 가 냉큼 앉은 윤성이 수저를 들었다.

“아!”

“안 된다 했다.”

계란말이를 윤성의 앞으로 밀어주자마자 우람이 다시 젓가락을 뻗었다. 뻔뻔한 손 위로 대현의 매서운 손길이 떨어졌다.

“에이씨, 더러워서 안 먹는다, 안 먹어!”

“잘 생각했어. 충분히 먹었다, 너.”

“와, 잘 생각했어어어? 와…….”

기껏 든 수저를 밥에 얹지도 못하고 자신과 우람이 싸우는 걸 보는 멍한 얼굴을 보고서야 대현이 입을 다물었다. 큰 눈이 둘을 번갈아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님의 퇴원과 함께 우람이 이전보다 숙소에 붙어 있는 날이 잦아지며 생긴 변화이기도 했다. 그것도 일주일째 이어지고 있는.

셋이 식탁에 앉아 말 한 마디 없이 밥을 먹었던 때에 비하면 비록 티격태격이긴 해도 말소리가 들려오는 지금이 낫긴 했지만, 습관처럼 눈치를 보는 윤성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팠다. 누구 하나 저를 챙기지도 않고, 아껴주지도 않는 팀에서 막내로 있으며 생긴 어쩔 수 없는 버릇이겠지만 볼 때마다 씁쓸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웬만하면 윤성의 앞에서는 우람과 다투는 것도 자제하려고 했는데 이상하게도 잘 안 됐다. 유치하게 구는 우람에 대항하다 보면 자신도 어느새 애처럼 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람에게서 몸을 돌린 대현이 윤성의 등을 툭툭 다정하게 두드렸다.

“많이 먹어, 윤성아. 오늘 많이 뛸 텐데.”

“뛰어? 어딜?”

대현과 윤성이 살갑게 대화를 나눌 때마다 꼴값한다는 눈으로 쳐다보면서도 윤성에게 말은 걸지 않았던 우람의 첫 질문이었다. 그걸 느낀 건 대현만이 아닌 듯 계란말이를 입에 넣던 윤성이 쿨럭 사레가 들렸다. 윤성에게 물을 건네며 우람을 흘기던 대현이 대신 대답했다.

“그, 아이돌 축구단 있잖아. 오늘 연습한대.”

“아. 너 거기 가입되어 있었냐?”

“……네.”

눈썹 뼈 부근을 긁으며 묻는 우람의 말에 윤성이 한 박자 늦은 대답을 내놓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우람을 흘긋 보고는 대수롭잖게 고개를 숙여 밥에 집중하려던 대현은 다음 순간 다시 고개를 쳐 들 수밖에 없었다.

“야. 나도 가면 안 되냐?”

우람의 폭탄선언 때문이었다. 대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놀란 얼굴로 우람을 보고 있는 윤성을 보니 제가 잘못 들은 건 아닌 듯했다. 대현이 우람의 폭탄선언에 담긴 속뜻을 읽어내기 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계란말이 못 먹게 했다고 저런 식으로 반항을 하나. 갑자기 애 공 차는 데는 왜 간다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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