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25화 (25/119)

25화

“뭐야?”

“너야말로 뭐야. 수업 없냐?”

“엉. 오늘 휴강.”

뛰어와 손에 든 걸 가로채는 지혜를 흘기던 우람이 곧 고개를 저으며 침대로 다가섰다. 텔레비전을 보던 시선을 돌려 우람을 확인한 여인이 미소 지었다. 침대 옆 의자를 당겨 앉은 우람이 그녀와 시선을 나눴다. 옆에 앉은 아들을 보자마자 손을 뻗는 야윈 얼굴에 순간 울컥할 뻔했다. 목 뒤로 차오르는 것을 참아낸 우람이 고개를 비틀어 벽에 달린 시계를 보는 척했다. 그런 우람의 마음도 모르고 그녀는 왜 이렇게 빨리 왔냐는 잔소리를 시작 중이었다.

“왜 이렇게 빨리 왔냐니까. 더 있다 와도 되는데.”

“뭘 더 있다 와.”

“오랜만에 콧바람도 좀 쐬고 그러라고 일부러 내보낸 건데. 하여간 말은 더럽게 안 듣지.”

다른 손으로 우람의 손등을 약하게 때리는 얼굴에 묻은 속상함을 애써 모른 체하며 우람이 이상하게 조용한 지혜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오빠, 여자친구 생겼어?”

때맞춰 둘 쪽으로 다가오는 지혜는 아까 뺏어가듯 가져간 종이백을 흔들고 있었다. 짜증난 눈빛으로 내놓으라고 손을 내미는 우람은 아랑곳 않고 반대편으로 돌아 엄마에게 다가간 지혜는 어느새 종이백 안에 물건을 하나둘씩 꺼내놓고 있었다.

침대에 딸린 작은 탁자 위에 보온용 도시락과 락앤락 통 여러 개가 올라왔다. 개중 동그란 도시락 통을 연 지혜가 우와 소리를 냈다. 잘 손질된 과일들을 확인한 그녀가 우람을 의심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당연히 지혜의 장난이겠거니, 하는 눈빛이었던 우람의 엄마마저도 이제는 우람을 힐끔대고 있었다. 얼떨떨하게 지켜보던 우람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눈치채고 버럭 성질을 낸 것도 그쯤이었다.

“여자친구는 무슨 여자친구야!”

“얼레. 그럼 누가 해줬대, 이걸?”

“…….”

“봐봐. 여자친구 맞다니까. 엄마. 한우람이 안 어울리게 또 부끄럼 타잖아.”

“아니라고! 그거…… 그…… 멤버가 해준 거야! 우리 팀에.”

“에……?”

더 놀란 얼굴이 된 지혜를 본 우람이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오빠 멤버들 중에 이런 거 해줄 만한 사람이 있어?”

“…….”

“친하지도 않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는 그녀를 본 우람이 한숨을 쉬었다. 반박할 수가 없었다. 술에 취해 동생에게 제 속 이야기를 줄줄이 털어놓았던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으니까. 떠오르는 부끄러운 기억에 입술을 깨물던 그가 운동화 끝으로 병실 바닥을 툭툭 차다가 고개를 들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고맙네.”

“…….”

“내가 잣 죽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대는 그녀를 눈치챈 지혜가 종이백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수저통이었다. 새 것이 분명해 보이는 수저가 나왔다. 건네받은 수저를 바로 죽으로 가져가는 야윈 얼굴을 지켜보던 우람이 입술을 물었다.

“맛있다. 먹어봐.”

그냥 하는 말이 아닌 듯 그 이후로도 여러 번 숟가락이 오갔다.

“와. 진짜 맛있어 오빠. 대박.”

그 와중에 한 입 얻어먹고는 쌍 엄지를 들어 보이는 아직 어린 동생에는 결국 우람도 별수가 없었다. 우람의 표정이 풀린 걸 본 여인이 틈을 놓치지 않고 슬쩍 말을 흘렸다.

“고맙다고 전해줘.”

“……알았어.”

“말만 하지 말고. 이런 거 아무나 해주는 일 아냐. 더운 불 앞에 오래 서 있고, 과일까지 닦아서 보내는 게 쉬운 일인 거 같니.”

“…….”

“한우람.”

“알았어요. 말…… 할게요.”

확답을 듣고서야 엄한 표정을 푼 그녀가 제 앞의 포도를 집어 건넸다. 머뭇거리다 받아먹던 우람이 지혜의 시선을 느끼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뭘 봐. 민망함에 나온 까칠한 반응이었다지만 익숙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지혜는 뜬금없는 이야기만 할 뿐이었다.

“내가 볼 때 오빠는 자존심을 좀 죽일 필요가 있어.”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좀 가지?”

“오빠야말로 매번 쓸데없이 자존심 세우지 마. 그게 오빠 밥 먹여줘?”

지지 않고 반박해 오는 얼굴을 본 우람은 대답 대신 입술을 깨물었다. 평소라면 받아치고도 남았을 질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게 안 됐다. 어쩌면 정곡을 찔려서일 것이다. 방금 지혜가 지적한 건 요 며칠 그의 머릿속에서도 계속 맴돌았던 것이니까.

“지혜 너도 그만하고 포도나 먹어.”

“아니, 답답해서 그러지 나도.”

“답답할 것도 많다. 네 오빠가 알아서 하겠지. 엄마가 고집쟁이는 키웠을지 몰라도 비겁하게는 안 키웠다. 그치?”

지혜와 우람의 다툼 아닌 다툼을 정리하려고 뱉은 말이었겠지만 역효과였다. 자신을 향한 눈에 담긴 신뢰에 목이 콱 막힌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우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고갯짓이었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 요 며칠 우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은 제 자존심을 방패 삼아 도망칠 수 없음을.

“응.”

이유는 간단했다. 이지후였다.

* * *

“이지후 데뷔 또 엎어졌다며?”

“레알?”

“어. 소문 쫙 났잖아.”

“걔도 불쌍하다. 벌써 세 번째 아님?”

“그러니까. 나 솔직히 걔 좀 재수 없었는데, 이쯤 되니 좀 불쌍할 지경.”

입을 헹구던 우람이 고개를 들었다. 거울을 확인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남자애 두 명이 낯익었다. 그중 한 명이 우람을 발견했는지 슬쩍 손을 들어 보였다. 양치컵을 들지 않은 손으로 마주 인사해 준 우람이 다시 입을 헹구기 시작했다. 우람 뒤의 소변기로 다가서는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지후의 이름도 계속 튀어나오고 있었고 말이다.

“근데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거지가 왕자 걱정하는 꼴이냐.”

“걔가 왕자고 우리가 거지지?”

“병신아. 그럼 우리가 왕자겠냐?”

걱정의 형식을 띄고 있으나 결국은 지후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만 같은 그들의 대화는 우람이 양치를 하는 내내 지칠 줄을 모르고 지속됐다. 조용한 화장실 덕에 의도치 않게 그 대화를 모두 들을 수밖에 없었던 우람이 슬슬 지겨운 낯을 할 때였다.

“하긴, 걔네 집 장난 아니게 부자라며.”

“말해 뭐 하냐. 시계 봄? 저번에 트레이너쌤이 걔한테 넌 왜 자기보다 비싼 시계 차고 있냐고 농담치더라.”

“미친. 근육쌤? 그 쌤 시계 뭔데.”

“오메가.”

“지렸다 씨발…… 그럼 이지후 차고 있는 거 적어도 삼백임?”

우람이 멈칫했다. 시계가 삼백이라는 얘긴가. 이지후가 잘산다는 건 계속해서 들어왔다. 친하지 않은 저의 귀에도 들어올 정도니 이쯤 되면 연습생들의 꾸준한 관심 대상이라고 봐도 될 듯했다. 물론 거기에는 방금 들은 이야기처럼 보통의 수준은 훌쩍 뛰어넘는 그의 부내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부럽다. 걘 뭐 하러 아이돌 하려 하냐. 부모가 알아서 밥상 차려줄 텐데.”

“원래 가진 놈들이 더 가지려고 하는 거지. 아이돌도 뜨면 돈 쓸어 모으잖아. 우리가 왜 이거 하고 있는지 잊었냐.”

“아니, 그래도 이상하잖아. 배우면 몰라. 아이돌은 뜨기 전까지는 어차피 맨땅에 헤딩인데.”

“그건 그렇지.”

“아, 갑자기 현타 오진다. 누구는 이 길 아니면 어떻게 먹고 살지도 막막한데, 누구는 막말로 나가서 시계만 팔아도 먹고 살겠네.”

“님 열폭 자제 좀.”

“먼저 현타 오는 이야기 꺼낸 게 누군데.”

둘의 대화 주제는 드디어 지후에게서 벗어난 모양이었지만, 양치컵을 들고 가만히 섰던 우람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귀에 꽂혔던 한 문장을 읊조리던 우람이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시큰거리는 발목을 괜히 한 번 턴 그가 멍하니 생각했다.

좋겠다고. 다음 순간 그 생각을 한 자신에게 실망해 얼굴을 굳히고 말았지만. 쉽게 얻은 건 쉽게 나간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우람의 집 가훈이었다. 가난한 집치고는 꿈이 큰 가훈 아닌가. 특히 한 번도 무언가를 쉽게 얻어본 적이 없는 집이 갖기에는.

한 번 딴 생각을 하니 우울함이 그 사이로 자리 잡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이래서 딴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짧게 자신을 책망한 우람이 몸을 돌려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오늘 파스를 가져왔었나를 생각하던 그의 머릿속에 그조차도 모를 아주 짧은 생각이 지나갔다.

이렇게 흘려들은 이야기로도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그 아이와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답은 간단했다. 우람은 그의 곁에서 매분 매초 그와 자신을 비교하며 시들어갈 자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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