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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24화 (24/119)

24화

“무슨 얘기를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나요?”

대현의 마지막 말 이후 이어지던 침묵을 깬 건 은호였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은데, 금방 표정을 관리하고 자신을 보는 얼굴이 천연덕스러웠다.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지금의 저희를 본다면 모르긴 몰라도 제가 생사람을 잡는 것처럼 보일 것이었다.

“…….”

그래서일까. 그 표정 변화를 뻔히 봐놓고도 대현은 아무 말도 꺼내놓지를 못했다. 대현이 잡지 않았다면 진작 들어섰을 자신의 방문에 기대어 선 얼굴을 마주하는 건 도움은커녕 방해가 됐다. 진수에게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그랬지만, 직접 눈앞에서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더 그랬다. 은호가 우람의 가정사를 건드리고 그걸 지후에게 뒤집어씌운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자신을 살게 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회사의 송년회를 참석하겠다며 나간 부모님은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교통사고라 했다. 그렇게 대현은 순식간에 혼자가 되었다. 당시 초등학교 6학년에 불과했던 대현을 거둔 건 은퇴 후 시골에 내려가 계셨던 할머니였다. 모든 걸 정리하고 올라와서 대현을 거둔 그녀 덕에 대현은 부모님이 그리울 때가 있다 해도 결코 외롭지는 않았다. 거기다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초등 교사였던 어머니가 남긴 재산에 그치지 않고 사망보험금 등 다른 재산도 살뜰하게 관리해 준 할머니 덕에 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 부족함 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튼튼하던 대현의 세계는 마지막 남은 핏줄이었던 할머니마저 병마로 세상을 등졌을 때 금이 갔다. 이제는 정말 혼자라는 사실이 그의 삶의 모든 곳으로 파고들었다. 숨을 먹는 외로움과 싸우고 있을 때, 그때 은호를 봤다. 세상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 같았을 때, 죽을 것 같이 외로웠을 때,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온 그가 부른 노래가 대현의 눈을 잡아끌었고, 다음으로는 심장을 어루만졌다. 넌 혼자가 아니라는 가사는 그 어떤 위로보다도 큰 힘이 됐다.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노래를 듣던 대현은 결국 울고 말았다. 눈물은 은호의 노래가 끝나고 무대가 바뀌었을 때에도 그의 볼을 타고 계속 흘러내렸다. 그렇게 그를 좋아하게 됐다. 그가 부르는 음악을 사랑했고, 그가 몸담은 그룹을 품었다. 제게 은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이간질하고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믿고 싶지 않은 건 아니고?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며 대현은 주먹만 꽉 쥐었다. 차마 반박할 수 없는 게 비참했다. 제가 알아온 은호와 눈앞의 은호 사이의 괴리감이 도무지 좁혀지질 않았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들어갈게요. 피곤해서요.”

그러는 동안에도 은호는 아까처럼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듣다 못한 대현이 고개를 떨궜다. 떨리는 손을 감추려 주먹을 쥐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때였다. 우람이 지나간 건. 인기척에 고개를 든 대현이 자신을 지나쳐 멀어지는 우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응시했다. 맨몸으로 들어왔던 아까와 달리 옆으로 가방을 맨 그는 거실과 방 사이의 통로에 걸쳐 서 있는 은호와 대현을 못 본 것처럼 거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신발을 대충 주워 신고 나가는 뒷모습을 따라가던 대현이 착잡한 눈빛을 했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우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서야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대현처럼 문가를 응시하고 있는 은호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손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멎었다.

“…….”

은호의 입가에 걸린 비스듬한 미소 때문이었다. 그 비웃음이 향하는 방향은 명백했다. 우람의 뒷모습이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머리뿐만이 아니었다. 부들부들 떨리던 손끝도, 갈 곳을 모르고 헤매던 발끝까지도 그랬다. 머릿속에서 방금 본 광경이 계속 재생되고 있었다. 비웃고 있었다. 유은호가, 한우람을.

우람의 뒷모습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고, 익숙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려 비웃는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서 끝을 모르고 반복됐다. 그 사이에 이성을 찾은 머리는 몇 가지 질문을 남겨놓고 있었다. 더 이상은 미룰 수 없는 질문이기도 했다. 정신 차려, 정대현. 떨리는 손을 꾹 말아쥔 대현이 입을 뗐다.

“너네…… 같이 온 거지.”

“네?”

“방금. 한우람이랑 너랑. 같이 밴 타고 온 거 아니냐고 물었어.”

“타고 왔죠. 왜요?”

귀찮다는 듯 하품을 하며 건성으로 대답하는 얼굴은 제가 알고 있다고 믿었지만 그럼에도 하나도 몰랐던 얼굴이다.

“그럼 우람이네 어머님 쓰러지신 거 들었겠네?”

“네. 들었죠.”

“병원에 계속 있어야 해서 잠깐 짐 가지러 온 것도 알 거고.”

“네. 근데 왜 자꾸 물어보세요?”

“이해가 안 돼서.”

“…….”

“그걸 알면서도 비웃고 있는 네가.”

제가 알았다고 생각한 은호는 은호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서야 그의 얼굴 위에 떠오른 표정을 아무런 필터 없이 바라볼 수 있었다. 비스듬히 문에 기대어 있던 몸을 일으키는 은호를 보는 대현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그게 무슨…….”

“말 나온 김에 물어볼 게 있는데.”

평소답지 않게 몰아붙이는 대현을 보던 은호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이상하게 구는 그가 성가셨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겠고.

“삼 년 전에. 넌 어떻게 알았던 거야? 우람이네 가족 일 말야. 한우람은 나한테밖에 말 안 했었거든. 나도 아무한테도 말 안 했고.”

“…….”

“근데 진수 형한테 귀띔한 건 너라며?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어서.”

차분한 어조와 다르게 제 얼굴을 바라보는 얼굴에서 느껴진 기묘함에 은호가 한 걸음 물러섰다. 곧 그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떴다. 머리를 긁적이며 대현을 응시하는 얼굴은 한 번도 제 그룹의 멤버를 비웃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순진해 보였다.

“삼 년 전이요? 기억이 안 나는데…….”

“…….”

“제가 말한 거 확실하대요? 진수 형이 착각하신 건 아니구요?”

“……착각이라고.”

마지막 말을 반복하는 대현을 보던 은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도 잠깐, 대현의 얼굴을 확인한 그가 멈칫했다. 대현이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은 채였다. 평소에 은호가 대현을 바라볼 때의 얼굴이기도 했다.

“계속 이랬어?”

그 얼굴로 대현이 주어 없는 말을 뱉었다. 별말 아닌 것 같았지만 의외로 은호는 동요했다. 뜬금없는 말을 줄곧 내뱉는 대현을 바라보면서도 열심히 꾸며내던 표정이 흐트러지고,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태도를 바꿔 도전적으로 부딪쳐 오는 눈을 피하지 않은 채 대현이 말을 이었다.

“편했겠다.”

“…….”

“네가 뭔 일을 하든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도, 사실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심지어 비웃었다고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까.”

은호는 더 이상 웃고 있지 않았다. 대신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을 뗐다 닫았다 하는 게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듯했으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없는 걸 보니 당장은 떠오르는 말이 없는 듯했다. 방금 대현이 일부러 자세히 말하지 않고 뭉뚱그린, ‘계속’이란 말 안에 담긴 일들을 짐작할 수 없어 그런 것도 있을 거였다. 그랬기에 대현은 이쯤에서 물러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까 은호의 비웃음을 본 순간부터 직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어쩌지? 앞으로는 안 그럴 텐데.”

이게 한 번으로는 끝날 일이 아니라는 걸. 오래지 않아 찾아올 그날을 앞두고 대현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 시작은 눈앞의 유은호를 분리하는 거였다.

“조심하라는 얘기야.”

“…….”

“유은호.”

제가 알고, 좋아하고, 아꼈던 플러그의 유은호에게서 말이다.

“폰 그 안에 넣어뒀고. 아, 그리고 이거.”

“…뭔데요?”

“지후가 준 거야. 오늘 너한테 들른다 했거든.”

제법 부피가 있어 보이는 물건을 의아한 눈으로 받아 들던 우람이 멈칫했다. 진수가 작게 혀를 차며 우람 쪽으로 물건을 힘을 주어 밀었다.

“신경 써서 챙겨준 건데, 받아라, 인마.”

성화에 건네받은 종이백을 열어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는 우람을 보던 그가 콧등을 긁으며 말을 보탰다.

“죽인 것 같던데. 옆엔 과일이고.”

“…….”

“근데 너네 싸웠냐?”

그제야 우람이 고개를 들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눈썹을 살짝 찡그린 채였다. 망설이던 진수가 말을 이었다.

“아니, 지후가 뜬금없이 물어본 것도 그렇고. 지금 이것도 솔직히. 전해주긴 한다만 얘가 너한테 이렇게까지 해주는 애는 아니었잖아. 걔가 너한테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싶어서.”

“……뭐 물어봤어요?”

“어?”

“물어봤다면서요. 이지후가.”

리더지만 원체 말이 많지 않고 예민하기까지 한 지후는 대화를 해서 많은 걸 알아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소 파악하기 쉬운 우람을 슬쩍 떠보며 알아낼 생각이었는데. 얘는 왜 이상한 데에 또 포커스를 맞춘담. 곤란한 얼굴을 하던 진수가 시선을 어물쩍 돌렸다.

“별건 아니고. 너 그때 삼 년 전에 집안 일 있었던 거 어떻게 알았던 거냐고 묻던데.”

“…….”

“그래서 내가.”

“형.”

“어?”

“저 올라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위에 엄마 혼자 계시거든요.”

“아, 어. 미안.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내가. 올라가.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고.”

“네, 형. 들어가세요.”

말을 끊은 우람이 진수에게 꾸벅 머리를 숙였다. 가라고 손짓을 하자마자 종이백을 들고 망설임 없이 뒤도는 우람을 보던 진수가 머리를 긁적였다. 결국 궁금한 건 또 못 알아냈다는 생각에 허탈한 표정을 하던 그가 곧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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