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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23화 (23/119)

23화

“근데 그건 왜?”

“그때 형 알게 되신 거요.”

“뭐. 빚?”

“……네. 그거요. 그거…… 어떻게 알게 되셨던 거예요?”

이지후는 한우람이 매니저에게 털어놓는 게 어떻냐는 자신의 제안에 질색을 했다고 했다. 그렇기에 한우람이 매니저에게 직접 털어놓았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지만 장담할 수는 없었다. 비록 이지후에게 말했을 당시에는 아니었을지라도, 고민 끝에 매니저에게 손을 벌리자고 생각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구걸이라는 말은…… 한우람이 매니저에게 손을 먼저 벌렸을 경우에는 나오기 힘든 단어였다. 거기다 한우람은 ‘대신 구걸’이라는 말을 했다고 했다. 자발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면 그런 용어를 쓰지는 않았을 거다.

그랬기에 대현은 어떻게 알게 된 거냐고 뭉뚱그려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지후가 말한 게 아니라면, 한우람의 그 소식을 알고 전한 다른 누군가가 반드시 있을 것이었다. 막막했지만 그래도 매니저가 알고 있다는 건 큰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매니저가 알게 된 경위, 그리고 정황을 조합하다 보면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될지도 몰랐다.

“그거? 글쎄다…… 어떻게 알게 됐더라.”

“…….”

“어쩌다 알게 됐던 것 같은데? 걔 그때 한참 텐션 안 좋았잖아. 우리 사이에서도 계속 말 나왔었고. 근데 넌 왜 이런 걸 물어 갑자기? 왜? 중요한 거야?”

“……네. 뭐 그냥…….”

뒷머리를 긁적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진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실망스러웠다. 실망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대현이 고개를 돌려 벽을 응시했다. 이렇게 된 이상 또 다시 원점이다. 우람과 대면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는 건가. 하지만 그건…….

“아.”

그때였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대현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진수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온 건.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떠오른 대현의 얼굴을 마주한 그가 눈썹 위를 긁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너네가 얘기하지 않았냐?”

“저희가요?”

“아닌가…… 아냐. 맞아. 뭔 일이냐고 물었을 때도 한우람 그 자식은 죽상만 하고 이야기를 통 안 했거든. 너네 중 누가 귀띔해 줘서야 알았지. 그게 누구였더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대화에 대현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대현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매니저가 다음 순간 손을 튕겼다.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대현을 돌아보는 얼굴이 환했다. 물론 그 환한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기억났다! 유은호! 그래. 은호가 말해줬…… 지후야?”

앞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거기 옆에 박카스 사뒀는데.”

“아. 나중에 먹을게요.”

“어어. 그래라.”

기분이 별론가. 백미러로 흘깃 뒤의 은호를 확인한 성호가 이내 도로로 시선을 돌렸다. 안 그래도 재계약 보류니 뭐니 머리가 아파 죽겠는데 멤버 중 가장 착실하게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는 은호의 일까지 굳이 사서 걱정할 기력이 없었다. 때마침 전화도 왔겠다, 은호에게서 관심을 돌려 진수의 이름이 뜬 핸드폰을 들던 성호가 멈칫했다.

야간 단속을 하는 듯 줄지어 선 경찰차들을 골치 아프다는 눈으로 보던 그가 핸드폰을 다시 내려놓았다. 핸드폰 하단 구멍에 연결 잭을 끼우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진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디냐고 묻는 소리에 가는 중이라고 말하며 성호가 뒤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안대를 끼고 귀에 이어폰을 낀 은호가 눈에 들어왔다. 제가 뭘 하든 조금의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모습이긴 했지만 혹시 모르니 핸들의 버튼을 눌러 소리를 줄였다.

“네. 네. 뒤에 있는데요. 아. 우람이요? 그럼 거기로 가서…… 네네. xx 병원요. 네. 네. 그럼 들렀다 갈게요.”

신호가 걸린 틈을 타, 손을 뻗어 내비게이션 경로를 수정하던 성호가 시선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아까 확인했던 자세 그대로 누운 은호가 고개만 들어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 위에 있었던 안대가 어느새 그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성호가 무슨 말을 건네려 했지만, 은호의 입에서 짜증 섞인 말이 나오는 게 더 빨랐다.

“어디 들렀다 가요?”

“어? 어. 우람이 좀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여기서 금방이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피곤해도 좀만 참아.”

“……왜요?”

“어?”

피곤해도 참으란 말에 왜라고 물은 건지, 우람이 왜 병원에 있냐고 물은 건지. 당연히 후자겠지만 싸늘한 눈빛은 그걸 고민하게 만들었다. 뮤지컬과 음반 작업을 병행하며 살인적인 스케줄에 힘들었을 은호이기에 어느 정도의 짜증은 예상할 수 있었다지만 이렇게까지 날 선 반응은 처음이었다. 석연찮음을 느낀 성호가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다행히도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은호에게서 한 마디가 더 건너왔다.

“어디 아프대요?”

“어?”

“우람이 형이요. 병원에 있다면서요.”

그치? 그거 물어본 거지? 그제야 표정을 푼 성호가 바뀐 신호에 차를 출발시켰다. 잠깐 느꼈던 기시감은 그새 자취를 감췄다.

“아, 우람이가 아픈 건 아니고…… 어머님이 쓰러지셨다네. 어제부터 병원에 있었다는데 몰랐어?”

핸들을 틀며 묻던 그가 멈칫하고는 룸미러로 은호의 눈치를 살폈다. 또 바보 같은 짓을 했다. 벌써 이 팀의 매니저로 넘어온 지가 일 년이 됐건만 아직도 이런 말실수를 한다. 예를 들어 방금 전처럼 다른 멤버의 가정사를 알 거라고 섣불리 예측하거나 하는 거 말이다. 다른 그룹이면 별 의미 없을 행동은 이 그룹의 전멸에 가까운 친분 관계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매니저의 입에서는 나오면 안 되는 말이기도 했다.

“흠, 흠. 어쨌든 벌써 거의 다 왔으니까, 넌 좀 더 눈 붙이고 있던지.”

다행히 성호의 실수에도 은호는 별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 밖을 보는 옆얼굴을 확인한 성호가 눈이 마주치기 전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다시 안대를 쓰는 은호를 끝으로 어색한 대화가 끝난 것에 감사하며.

현관을 지나치자마자 담배를 꺼내 드는 성호를 본 우람이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1층에 붙은 흡연실로 들어가던 성호를 확인한 은호도 별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우람은 고개를 숙인 채 벽에 기대 있었다. 그는 한눈에 보기에도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피곤해 보였다. 구겨진 옷이며 충혈된 눈, 튼 입술 등을 살피던 은호가 시선을 거두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먼저 탔으면서도 층수 버튼조차 눌러놓지 않았다. 작게 혀를 찬 은호가 대신 손을 뻗어 누르고는 우람을 돌아봤다. 몇 년 전의 일 때문인지 여간해서는 제 앞에서 약한 면을 드러내지 않는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아, 자꾸 이러면 참을 수가 없잖아. 올라가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바라보던 은호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약한 면을 드러내는 한우람이라, 한 마디도 하지 않고는 보낼 수 없는 흥미로운 먹잇감이었다.

“어머님 아프시다면서요.”

“…….”

“이젠 좀 괜찮으세요? 제가 뭐 도와드릴 거라도?”

그제야 우람이 고개를 든다. 선 자세 그대로 말없이 은호를 노려보는 시선이 날카로웠다. 방금 전까지 잔뜩 지친 얼굴을 하고 있어놓고는. 가족 이야기만 하면 저렇게 눈이 뒤집혀 달려든다니까 꼭. 비웃음을 삼킨 은호가 그의 시선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심기를 건든 건 확실한 것 같으니 소정의 목표는 달성한 셈이었다. 물론 그와 달리 뒤의 우람은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다. 사납게 건너온 부름에 은호가 그를 돌아봤다.

“유은호.”

“네.”

“내가 몇 번을 말했던 거 같은데 너한테. 못 알아 처먹는 것 같아서 한 번만 더 말할게.”

“…….”

“신경 꺼라, 제발.”

띵. 말이 끝나자마자 타이밍 좋게 울린 도착음에 우람이 등을 보이며 나갔다. 잠시 가만히 서서 우람의 말을 곱씹던 은호가 픽 웃으며 그 뒤를 따랐다. 이건 정말 질리지가 않는다는 짧은 감상을 덧붙이면서.

“……하여간 성질은 더러워 가지고.”

자신이 방금 한 일은 생각도 안 하고 바로 앞에서 쾅 닫힌 문을 노려보던 은호가 암호를 입력했다. 띠릭- 열리는 도어락 소리를 들으며 들어서던 그는 바로 마주하게 된 사람에 멈칫했다. 그가 곧 성의 없이 대충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들자마자 보인 지후는 인사까지 해준 보람이 없게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후가 시선을 둔 곳을 확인한 은호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내렸다. 너네도 참 징하다. 티 안 나게 고개를 저은 그가 늘 그랬던 것처럼 지후를 지나쳐 방으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탁.

“…….”

“…….”

이건 또 무슨 전개야?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던 은호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선 지후를 응시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안 하던 짓을 하는 그에 호기심이 인 것은 잠깐이었고, 곧 짜증이 호기심을 가볍게 눌렀다.

그러고 보니 저번부터 시키지도 않은 짓은 혼자 다 하던 사람이었다. 몰아치는 스케줄 때문에 잊고 있었던, 아니 잊으려고 노력했던 사실이 그의 신경을 다시 긁어대기 시작했다. 팔목에 힘을 줘 빼낸 은호가 걸음을 옮겼다. 평소라면 장단이라도 맞춰줬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특히나 저 병신 같은 새끼 때문에 제가 차곡차곡 계획해 온 모든 것이 미뤄진 것만 생각하면. 이젠 짜증을 숨기지도 않은 채로 걸어가던 은호가 자리에 섰다.

“왜 그랬어?”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를 만큼 작은 목소리, 그러나 담고 있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은 말이었다. 묘한 표정으로 천천히 뒤돈 은호의 시야에 곧 지후가 담겼다. 눈을 질끈 감고 선 얼굴이 은호의 시선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주한 눈에서 느낀 이상한 느낌에 은호가 멈칫했다.

“들어라도 보자.”

자신을 바라보는 눈매에 짙게 묻어나는 실망감과 배신감이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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