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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22화 (22/119)

22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지후에게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기대도 안 했다만 입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숨을 쉬며 뒤돌던 대현이 움찔하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지후가 대현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당시에.”

“…….”

“매니저 형한테 못 물어봤었어. 매니저 형이 아는 거 아닌데 괜히 내가 입방정 떨어서 매니저 형까지 알게 되면, 한우람이 날 진짜…… 용서 안 할 것 같았거든.”

“…….”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다.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

“그러니까…… 이번에는 물어봐, 네가. 그걸로 뭘 알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하는 것보단 낫잖아.”

아득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마지막 말에 시선을 들어 지후와 눈을 마주한 대현이 침을 삼켰다. 잡혔던 팔은 진작 풀렸음에도 홀린 것처럼 지후를 바라보는 대현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말하다 보니까 나 병신 맞는 것 같다.”

자조하듯 입술 끝을 끌어 올린 것과 다르게 볼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는 지후의 눈물 때문이었다.

* * *

달칵 하는 소리에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킨 대현이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얼굴을 확인했다. 윤성이었다. 순하게 저를 쳐다보는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어제 오늘 자신을 꽁꽁 묶는 것만 같았던 긴장이 풀렸다. 대현이 잠이 묻은 얼굴을 한 손으로 쓸어내렸다.

“저, 형.”

“……어, 윤성아. 잘 잤어?”

빨리 들어올 거라고 했던 거와 달리 자정을 넘어서야 들어왔던 어제의 자신이 생각나 괜히 미안해진 대현이 살갑게 대답하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슬쩍 확인한 시계는 10시를 알리고 있었다. 어제 우람을 기다리며 늦게까지 깨 있긴 했다만, 그래도 늦잠은 늦잠이었다. 동생 앞에서 잘하는 짓이다. 멋쩍은 마음에 머리를 긁은 대현이 윤성에게 다가섰다.

“미안. 늦잠 잤다. 밥 안 먹었지? 빨리 해서 먹자.”

“음, 형. 그게요.”

“어?”

“밥은 했는데…….”

무슨 소리지.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윤성은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윤성을 이해하지 못한 대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망설이던 대현이 윤성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를 따라가던 대현이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맡은 냄새에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그, 밥은 인터넷 보고 어떻게 해봤는데…….”

“…….”

“찌개는…… 실패한 것 같아요.”

냄비 뚜껑을 들고 대현을 바라보는 얼굴이 난감해 보였다. 고개를 돌려 그의 옆으로 다가서 냄비 안을 살핀 대현의 표정이 묘해지더니 결국 그의 잇새를 가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장 땅으로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처럼 숨이 안 죽은 김치부터, 스크램블에그인지 프라이인지 도통 구분이 안 가는 계란 부침들을 확인한 탓이었다. 그래도 밥은 얼추 잘된 것 같았다.

웃음이 길어질수록 더 초조해지는 앞의 얼굴을 본 대현이 결국 손을 뻗어 부슬부슬한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이 닿자마자 작게 움칫했던 건 언제고, 대현의 표정이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달은 건지 표정이 풀리는 게 이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넌 진짜 밥 해먹일 맛이 난다.”

“네?”

“잘했다고.”

어제 하루 종일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시달리며 쌓였던 피로가 조금이나마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웃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윤성을 슬쩍 민 대현이 스토브 앞에 섰다. 김치찌개라고 불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이는 덩어리를 한참을 응시하다 뒤로 돈 그의 뒤에서 조수라도 된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기웃거리던 윤성이 동그란 눈을 했다. 동그란 눈을 마주한 대현이 씩 웃어 보였다.

“김치찌개는 나중에 먹고. 오늘은 비빔밥 어때?”

귀가 조금 빨개진 윤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익숙하게 나간 손이 윤성의 곱슬곱슬한 머리를 헤집었다. 어제 해둔 밑반찬이면 충분할지를 생각하며 냉장고 쪽으로 걸어가던 대현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애를 키우는 걸까.

“얘들아, 밥 왔…… 너네 뭐하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듣지 못한 채 떠들고 있던 대현과 윤성이 갑자기 나타난 매니저를 멀뚱히 응시했다. 그 둘의 시선을 받고 섰던 매니저가 식탁을 훑고는 못 볼 것을 본 얼굴을 했다. 입안 가득 밥을 우물거리는 윤성과 대현의 앞에 놓인 밥까지 확인한 그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어정쩡한 포즈로 식탁 위에 내려놓는 봉지에는 숙소 주변 배달 음식점의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흘끗 봉지를 본 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와 유리컵에 따르고 윤성에게 밀어주는 행위가 자연스러웠다.

“뭘 하긴요. 밥 먹죠.”

태연하게 대꾸하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매니저가 입까지 떡 벌린 채 자신을 응시하든 말든 윤성이 잘 먹나 살피는 얼굴은 진수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너네가 언제부터…… 이거 너네가 한 거야?”

“오늘은 윤성이가 거의 다 했어요.”

“아니요, 지후 형이 하셨어요. 전 한 거 없어요. 밥이랑 계란만…….”

“비빔밥에 밥이랑 계란이면 다 한 거지.”

이제는 서로 누가 식사 준비를 했는지 공까지 미루고 있는 둘을 번갈아 보는 얼굴은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제가 숙소에 못 온 건 겨우 이틀이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데뷔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보아온 애들이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 낯선 풍경을 믿지 못해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그의 정신을 깨운 건 대현이었다.

“형. 밥은 드셨어요?”

“어? 어어…… 난 먹고 왔지.”

“그럼 저랑 잠깐 이야기 좀 가능하실까요.”

의아한 낯을 하던 진수의 얼굴에 불안함이 서렸다. 얘가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당장 며칠 전 사고 친 전적이 있는지라 그 눈빛을 묵묵하게 받아넘긴 대현이 윤성의 어깨를 두드리며 설거지를 부탁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대현이 진수에게 눈짓을 했다.

따라가던 진수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한데, 얘네.

“뭔 얘기를 하려고 그래.”

“여쭤볼 게 좀 있어서요.”

“어. 말해.”

“우람이요.”

매니저를 먼저 방 안으로 들여보낸 대현이 문을 닫았다. 한 번 더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는 대현을 바라보는 진수는 이제 그를 관찰하듯 훑고 있었다. 그의 의심쩍은 눈빛을 모른 척한 대현이 바로 본론을 꺼냈다.

“왜? 걔 또 뭔 사고 쳤냐?”

바로 얼굴을 굳히고 물어오는 얼굴이 정말 우람이 무슨 사고라도 쳤을까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한두 번 시달린 얼굴이 아니었다. 안 봐도 지난 삼 년간 우람의 거침없었을 행동이 눈에 보이는 기분에 작게 한숨을 쉰 대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그럼 뭐. 아 혹시 어제 일 때문에? 어머님 더 안 좋아지셨대?”

“……네?”

“뭐야. 너 알고 물어본 거 아니었어?”

“아뇨…… 아니 잠깐만. 어머님이 아프세요?”

“어. 어제 쓰러지셔서 당분간 거기 있겠다고 연락 왔어.”

그래서 어제…… 다급해 보이던 우람의 행동이 떠오른 대현의 얼굴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입술을 깨문 그가 갑작스러운 소식에 흔들릴 뻔했던 마음부터 다잡았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할 문제였다. 일단 우람과의 오해부터 풀어야, 그 문제에 대해서 걱정을 하든 뭘 하든 할 수 있다. 고개를 돌려 다시 진수를 응시한 대현이 질문했다.

“형 혹시 삼 년 전쯤에…… 우람이 안 좋은 일 있었을 때요.”

“어. 근데 너 왜 자꾸 이런 이야기를 하냐. 진짜 뭔 일 있는 거야, 너네?”

“그런 건 아닌데,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어서요.”

“내가 아는 문제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서 여쭤보려고 한 거예요.”

대현이 말을 하는 투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손끝으로 턱을 매만지는 진수의 얼굴도 어느덧 심각해져 있었다.

“형, 그때 알고 계셨어요?”

“뭘. 말을 해야 알지, 인마. 그때라고 하면 언젠지 어떻게 아냐.”

“우람이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에, 우람이네 집에 있었던 일이요.”

“아…….”

의외의 이야기였는지 눈을 살짝 찌푸리는 얼굴은 그러나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알겠다는 뉘앙스의 신음을 내놓는 매니저를 보던 대현의 굳은 입매가 살짝 풀렸다. 마음이 놓였다. 지후가 걱정해서 말을 못 했던 이유이기도 했던, 매니저가 삼 년 전 있었던 우람의 가정사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은 이로써 없어진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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