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의외로 우람은 별말 없이 지후를 따라왔다. 연습생들이 자주 가는 옥상이었다. 탁 트인 하늘 아래에 있으면 자신을 괴롭히던 크고 작은 고민들이 다 사소해지는 것만 같아서 지후가 좋아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우람을 본 지후가 며칠간 뱉지 못하고 물고만 있던 말을 꺼냈다.
“얼마 정도 필요한 거야?”
그제야 옥상에 올라온 이후로부터 하늘에 고정되어 있던 우람의 시선이 돌아왔다. 몇 번 보지 못한 놀란 표정을 짓는 그를 본 지후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모른 척 해달라고 했던 거 기억하고 있어.”
“…….”
“그렇지만 그 이야기 알고 진짜 모른 척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수 있을 거 같아?”
“…….”
“확실한 건 난 아냐. 자꾸 신경 쓰인다고.”
진심이었다. 스스로도 의아할 정도로 지후는 자꾸 우람에 대해 생각하는 자신을 막을 수 없었다. 잊고 지내던 통장의 잔액까지 확인하고야 만 걸 보니 모른 척하기란 선택지는 이미 한참을 물 건너간 것 같았다. 그런 지후의 진심이 전해졌는지 우람은 길길이 날뛸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과 달리 지후를 가만히 응시하고만 있었다.
“……고맙다.”
뜬금없는 말이었다. 의아한 눈빛의 지후와 눈을 맞춘 우람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요 몇 주 쭉 빠진 볼살이 밀려 올라가고 작은 미소가 얼굴에 떴다. 억지로 웃는 듯했지만 그래도 그런 행위 자체를 하는 우람 자체가 오랜만이라 지후는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치만 됐어.”
“……야.”
“알아서 할 거야.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그러니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화낼 거야, 그땐.”
그 말이 끝이었다. 뒤돌아 내려가는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두던 지후가 고개를 돌려 하늘을 응시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이렇게 야속해 보이긴 처음이었다.
쾅. 지후가 놀란 눈으로 문을 응시했다. 문가에 선 이를 확인하기도 전에 멱살이 잡혔다. 타의로 몸을 일으켜야 했던 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얼굴이 돌아갔다. 방심한 상태라 그런지 반항조차 하지 못했다. 쿨럭 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지후가 멈칫했다.
“너…….”
핏발 선 눈의 우람이 그의 앞에 있었다. 멱살을 꽉 잡고 있는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지후의 얼굴이 굳었다.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우람이 자신에게 화가 났다는 건 붙어있는 몸으로, 그리고 마주하는 눈빛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치만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살갑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를 이해하듯 옥상에서 이야기를 나눴던 게 어제였다. 그 이후 지후는 우람에게 이렇다 할 행동을 한 적 없었다. 그랬기에 지금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안 됐다. 상황파악을 하기 위해 일단 우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제 손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지후를 향한 우람의 분노는 멈출 수 있는 정도를 한참 넘은 듯했다.
“씨발, 내가…….”
“야, 한, 우람.”
“내가 그렇게…… 부탁했잖아……!”
“……이거, ……이거 좀 놔봐.”
목을 압박하는 손아귀의 힘 때문에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손을 올려 멱살을 잡은 손을 떼어내려 했지만 평소 근력에서도 지후를 넘어서는데다가 분노하기까지 한 우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후의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우람과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우람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틈을 놓치지 않고 우람을 밀어낸 지후가 마음 편히 못 내쉬었던 기침을 내뱉었다. 쿨럭, 쿨럭. 한참을 이어지던 기침을 끝낸 지후의 눈에 고개를 숙인 우람이 들어왔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물기가 어린 눈을 마주하던 지후는 그 눈에서 읽어낸 것을 이해하지 못해 인상을 찡그렸다. 배신감이었다.
“그거 하나 부탁했는데…….”
“너 대체 무슨 소릴…….”
“누가 너더러 대신 구걸해 달라고 했어?”
구걸?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에 멈춰 버린 머릿속과는 달리 무의식적으로 나간 손은 우람의 팔을 잡았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의 말 때문이었다. 구걸이라니. 혹시 어제 물어본 것 때문에 이러는 건가? 하지만 그건 구걸이 아니라……!
“구걸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지 마.”
“야.”
“그게 더 역겨우니까.”
“……한우람. 너 지금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후의 손을 떨쳐 낸 우람이 뒤돌았다. 방을 나서기 전 잠깐 멈춘 그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너 같은 걸 리더라고…….”
금방 떨어진 음원 순위에도, 데뷔 이후 늘 지후를 몰아세우던 미디어들도, 이렇게 지후의 가슴에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그를 쫓아가려던 것조차 잊고 자리에 선 지후는 예감했다. 그는 방금 들은 이 말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것이 지후를 좀먹든, 낭떠러지로 밀든. 그렇게 평생.
* * *
“설마.”
“…….”
“그게 끝인 건 아니지.”
대현은 표정을 관리하려 노력했다. 자신은 어찌됐든 제삼자였다. 그 당시에 없었고,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미 지난 일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훈수를 둘 처지가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하며 물 없이 고구마를 백 개나 먹는 것 같은 이야기를 견뎌냈다. 하지만 재촉에도 입을 꾹 다문 얼굴은, 그 사실이 가리키는 현실은 좀 너무하다.
“너네 데뷔하고 얼마 안 되어서 일어난 일이면 거의 삼 년 전이야.”
“…….”
“그동안 아무것도 안 했다고?”
“…….”
“너…… 아니. 네가 한 일 아니라고 말해본 적은 있기나 해? 아니다. 한우람이랑 이야기하려고 해본 적은? 그것도 없어?”
대현이 곧 말을 잃고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그제야 이해가 가는 것들이 많았다. 우람의 뜻 모를 말부터, 도와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혼란스러운 빛을 띠던 얼굴까지. 동시에 막막해졌다. 지후를 찾아올 때만 해도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전보다는 많은 것이 정리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배로 복잡해진 것 같다.
무엇보다 풀어야 할 문제가 많았다. 일단 우람이 오해하게 된 계기를 파헤쳐 내는 것부터 시작해서 삼 년 동안 그 위에 쌓여갔을 여러 감정들을 풀어내는 것까지. 돌겠다…… 작게 중얼거리며 두 팔 사이에 머리를 가두던 대현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끊임없는 추궁에도 눈을 피하던 지후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현의 질문공세에도 묵묵부답이던 입은 한참이 지나서야 열렸다.
“나름대로…… 노력했어.”
“……나름대로면.”
“이야기하려고 해봤다고. 한우람이 계속 피해서 소용은 없었지만.”
“…….”
“그러다 한우람 아버님이 돌아가셨고. 그 이후로는…….”
말을 흐렸지만 뒤는 안 들어도 뻔했다. 한숨을 내쉰 대현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한우람이 오해하게 된 이유는 알아내려고 해봤어?”
“…….”
“누군가 한우람한테 그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걔가 네가 말한 거라 생각했을 거 아냐.”
“몰라. 한우람한테 물어봐도 대답 해준 적이 없으니까.”
“……네가 말한 건 확실히 아니야? 술 먹거나 그러다가 너도 모르게 말했을 가능성은…….”
“지금 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쳐질지는 알지만.”
“…….”
“그 정도로 병신은 아냐, 나.”
자조하듯 말하는 지후의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를 본 대현이 더 캐묻기를 포기하고 입을 다물었다. 식탁 위의 침묵이 한참을 지속됐다. 견디다 못한 대현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거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 아닌 것 같아. 아니, 아니야. 확실해. 너 내가 저번에 한 얘기 기억하지. 대표한테 불화설 없애겠다는 조건 걸고 삼 개월 얻은 거야.”
“……어.”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한우람이랑 오해 풀어야 돼. 그래야 사이가 좋아지든, 그런 척을 하든 할 수 있을 거 아냐. 그리고 무엇보다.”
“…….”
“넌 걔가 너가 안 한 일을 했다고 평생 오해하게 두고 싶어?”
어쩌면 가장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해체고 사이 회복이고 다 제쳐 두고, 대현은 저게 가장 궁금했다. 아까 본 우람도, 그리고 우람과 있었던 일을 털어놓는 지후도 둘 다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둘 다 그 사건에 쌓인 앙금을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는 게 참 우습고도 씁쓸하지만.
대답 대신 고개를 떨구는 지후를 본 대현이 대답 듣기를 반쯤 포기한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어느덧 밖이 깜깜했다. 윤성에게 금방 돌아오겠다고 말한 것과 달리, 우람과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하고 바로 이곳으로 와 이야기를 들은 시간까지 합하면 시간이 꽤 지난 셈이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노력하며 대현이 중얼거렸다. 형식은 지후에게 하는 선언이었지만,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과도 같은 말이었다.
“너 저번에 그랬지. 네가 나한테 부탁한 이상, 뭐 하라고 또는 하지 말라고 할 권리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
“그 말 후회하지 마.”
“…….”
“너네가 그렇게 지키려 한 자존심이고 뭐고. 난 하나도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오해 풀어야겠다 싶으면 무식하게라도 물어볼 거고, 아닌 거면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아니라고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