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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20화 (20/119)

20화

조용한 비상계단이라 그런지 수화기 너머의 소리가 대현에게도 들려왔다. 정신없는 소리를 뚫고 주워들은 몇 개의 단어에 대현의 얼굴이 굳었다. 방금 병원이라고 한 건가. 대현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우람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우람이 전화기에 대고 고함치는 게 더 빨랐다. 그는 눈앞에 대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조차 잊은 눈치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러대는 얼굴은 당장 누군가가 잡아주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위태위태해 보였다.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한지혜! 어디 병원이라고?”

제가 들은 게 맞았다. 병원이라는 단어가 우람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대현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렇기에 몸을 돌려 계단을 아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내려가기 시작한 우람의 어깨를 낚아챈 것일지도 모른다. 핸드폰 너머를 향해 소리를 질러대던 우람이 그제야 대현의 존재를 느낀 것처럼 뒤돌았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이 그 즉시 까맣게 침잠했다. 초점이 잡힌 눈에는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대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지금은 우람이 제게 비추는 감정에 상처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표정을 관리한 대현이 그에게 질문했다.

“무슨 일이야. 병원은 왜. 누가 아픈 거야? 어?”

“……”

“급한 거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게…….”

“놔.”

엿들은 거긴 했지만 보통 일이 아닌 것처럼 들렸기에 나온 말이었다. 제가 우람이라도 된 것처럼 불안해하며 횡설수설한 뱉어낸 말은 결국 당사자에게는 그 진심이 전해지지 못했다. 우람이 치워낸 손이 허공에 떴다. 곧이어 들린 차가운 음성에 대현이 움찔했다.

“무슨 일인지 알면 왜. 또 대신 구걸이라도 해주게?”

지후의 몸에 들어온 이래로 우람은 한결같이 대현에게 차가웠지만, 방금 그의 시선과 목소리에서 느낀 경멸은 차원이 달랐다.

“그게 무슨…….”

흔들리는 눈과 달리 대현을 향해 내뱉는 음성은 신랄했다. 하, 짧게 헛웃음까지 친 그가 곧 속도를 내 계단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멍하니 남은 대현의 귀엔 방금 우람이 했던 말들만이 남았다.

또 대신 구걸이라도 해주게

또……

구걸이라도 해주게……

또 너냐. 습관이 무섭다고 이제는 불쑥 찾아오는 것마저 익숙해진 것 같다. 뭐, 대현의 입장에서는 제 집을 찾아오는 것이니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뒤돌던 지후가 이상함을 느끼고 대현을 돌아봤다. 진작 몇 마디를 더 붙여 쫑알대고도 남았을 뒤가 묘하게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대현의 얼굴에 시선을 던지던 지후가 멈칫했다. 거실 한가운데 선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굳어 있었다. 이상함을 느낀 지후가 입을 떼기도 전에, 지후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한 대현이 입을 여는 게 빨랐다.

“이건 아닌 것 같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애초부터 얼마나 이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지쳐 보이는 너 닦달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아서 미뤄둬야겠다고 생각했어.”

“…….”

“오늘 겪어보니 알겠다. 얼마나 멍청한 생각이었는지.”

“…….”

“이지후.”

“…….”

“내가 너 대신 뭘 하기라도 바란다면. 네가 말해줘야 돼.”

대현과 마주한 지후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갔다.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대현의 얼굴이 차분했다.

“한우람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너.”

우람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지후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를 눈치챘음에도 대현은 평소처럼 한 걸음 뒤로 물러나는 것 대신 오히려 지후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둘은 이제 손바닥 한 뼘 사이의 거리만을 남겨두고 서 있었다.

더 이상은 물러날 수가 없었다. 대현도, 지후도 그랬다.

* * *

우람이 이런 일을 겪고 있는지 몰랐다. 그랬다면, 이렇게 화장실로 그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돌아보는 우람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지후는 자신을 질책했다. 지후를 발견하자마자 손에 든 핸드폰을 내린 우람의 얼굴이 붉어지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묻은 수치심을 확인하자마자 지후는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도 볼륨을 최대치로 올려놓은 듯한 우람의 폰에서는 그를 찾는 누군가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애써 모른 척하며 세면대로 다가서는 지후의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흘러나왔다가 또 쓸려가기를 반복했다.

“……엄마. 잠깐만.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정신을 차린 듯 전화를 끊은 우람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당장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손을 씻는 척하고 있던 지후였지만 언제까지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페이퍼타올로 젖은 손을 닦아내고는 몸을 돌린 지후를 마주하는 우람의 눈동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들었…… 냐.”

아무렇지 않은 척 내뱉으려고 한 거였겠지만, 흔들리는 목소리 덕에 소용은 없었다. 지후는 짧게 고민했다. 우람은 자존심이 강했다. 데면데면한 사이인 지후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기에 같은 팀으로 묶인 이후 더 조심하기도 했다. 그 덕분인지 둘은 친하다고 말할 수는 없더라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이라고는 말할 수준은 됐다. 둘 다 그 정도에 만족했기에 발전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방금 피치 않게 듣게 된 대화는 그 사실을 바꿔놓을지도 몰랐다. 자꾸 연습 중에 자리를 비우는 우람을 찾는 트레이닝 선생님의 심상치 않은 표정에 찾아오겠다고 자진해 나섰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지후가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게 우람에게는 대답이나 다름없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숙이는 우람을 보던 지후가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

“……심각한 거야?”

대화를 들은 건 몇 분 되지 않았지만, 상황을 파악하기에 필요한 단어는 다 들은 상태였다. 회생불가라느니 빚이라느니 열아홉 살에 불과한 지후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자신과 동갑인 우람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를 달래는 우람은 차분하려고 노력하는 듯 보였지만, 갈수록 끝이 뭉개지는 대화는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어.”

자포자기한 표정의 우람이 내놓은 대답에 지후가 멍하니 화장실 바닥을 내려다봤다. 데뷔한지 삼 개월.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기획사의 이름값과 뜻밖에 받게 된 관심으로 인해 차트에 이름을 한 번 올렸다지만, 빠르게 떨어지는 관심은 그들에게 어떠한 장밋빛 미래도 그리기 힘들게 했다. 정산은 아직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어쩌면 리더라는 위치는 그걸 제일 잘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그래서인지 지후는 눈앞의 우람이 절실하게 찾아 헤매고 있을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 흔한 위로조차도 건네지 못하고 망설이던 그가 다시 입을 열 수 있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

“매니저 형한테 말이라도 해보는 건…….”

“미쳤냐?”

“…….”

“데뷔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럼 어떻게 하려고. 가족들은 네 도움 바라는 거 아냐?”

정확한 말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우람과 통화를 한 상대편이 우는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 정도는 됐다. 정곡을 날카롭게 짚어낸 지후의 말에 우람이 입술을 짓씹는 게 보였다. 그라고 마땅한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닐 터였다. 매니저에게 말을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건 아니겠지. 머리를 거칠게 헤집던 우람이 고개를 들어 지후와 눈을 맞췄다.

“몰라. 그치만 어떻게든, 어떻게든 해결할 거야. 그러니까.”

“…….”

“넌 그냥 모르는 척해.”

그가 힘을 주어 내뱉었다. 막막함이 느껴지는 말투와 달리 그럼에도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짙게 묻어났다. 그를 느낀 지후가 멈칫했다.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이야.

작게 읊조리듯 뱉은 말을 끝으로 우람이 그를 지나쳐 갔다. 부탁…… 마지막 말을 따라 중얼거리던 지후가 한숨을 쉬었다. 우람과 안 어울리는 단어였다.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하던 그가 사적인 이야기를 해본 적도 없던 제게 이렇게 부탁이라는 말까지 써서 약한 모습을 보일 정도면 정말 들키고 싶지 않았던 일임에 분명했다. 지후가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피곤했다.

지후는 우람을 자꾸 의식하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부탁이라는 말까지 쓰던 그를 생각하며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초췌해지는 그를 모른 척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열아홉 살이 애초에 숨길 수 있는 중량의 일이 아니기도 했다. 연습에 빠지는 횟수가 늘어나고, 새벽 외출이 잦아진 그를 눈치챈 건 지후만이 아니었다. 결국 매니저들 중 총괄급인 진수에게 호출되었다 돌아온 우람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후속곡 활동을 준비하느라 바쁜 멤버들은 우람이 어딘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제 한 몸 챙기기 바빠 보였다. 팬, 방송 등 살면서 처음 접해보는 것들에 정신이 팔린 그들에게 애초에 별 연대의식도 없던 멤버에게 관심을 가지는 일은 사치이기도 했다. 그 대화를 듣지 않았다면 지후도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지후는 우람이 좋든 싫든 간에 화장실에서의 통화를 들으며 그의 일에 함께 발을 담근 거나 마찬가지였다.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문 지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습 중 쉬는 시간이었다. 거울에 기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우람에게 걸어간 지후가 우람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한우람, 잠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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