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래. 이 모든 건 콩나물국을 비우자마자 자리에서 일어선 저를 올려다보던 그 눈 때문이었다. 양심적으로 설거지는 네가 해라. 동시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우람은 반박도 못한 채로 덩그러니 부엌에 남았다. 윤성아, 너 X램덩크 본 적 있어? 습관처럼 저의 눈치를 보는 윤성의 어깨를 잡아 거실로 가는 뒷모습에는 망설이는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양심적으로라는 말에 담긴 건 제가 어제 거나하게 취해 지후의 도움을 받은 것을 말하는 것 때문인가, 아니면 지금 저를 위해 해장국을 만들어줬다는 걸 말하는 건가. 어느 쪽이든 우람에게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고무장갑을 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그렇게 생각을 하는 사이 설거지가 얼추 끝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컵을 개수대 위의 건조대에 올려놓던 그가 작게 욕을 하며 축축한 고무장갑을 벗었다. 표정을 굳히고 거실로 나오자마자 소파에 앉아 있는 지후와 윤성을 마주했다. 무언가를 보며 웃고 있던 둘이 우람을 보자마자 멈칫하는 건 생각보다 더 기분이 더러운 일이었다.
삐딱하게 서서 그들을 응시하던 우람이 입을 열려다 멈칫했다.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마주해 오는 연한 갈색빛의 눈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화가 울컥 치밀었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예전이었다면 둘의 시선 교환은 이리 오랜 시간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랬고, 아까도 그랬고, 해체를 미뤘다고 직접 전하던 그날에도 그랬다.
확실히 이지후는 평소와 다르게 굴고 있었다. 취한 저를 수습하는 것부터 이렇게 해장국을 해주는 것까지 말이다. 그 사실은 자꾸 우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했다. 그래서 평소라면 수십 번을 뱉었을 날 선 말들을 이상하게도 입 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다. 병신. 누구에게 하는 욕인지 모를 것을 중얼거리며 우람이 몸을 돌렸다.
“한우람.”
무시하고 들어가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몸은 그 즉시 행동을 멈췄다. 그 사이 우람 앞으로 다가온 지후는 차분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얘기 좀 하자, 우리.”
연한 갈색 눈이 단호함을 안고 깜빡였다. 일주일 전 그때처럼. 우람의 눈이 흔들렸다. 이지후가 이상하게 굴고 있다. 그리고 그건 우람의 기분을 상당히 이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답 대신 우람은 현관문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당황한 낯을 하기도 잠깐 표정을 가다듬은 대현이 그 뒤를 따랐다. 형. 불안한 목소리로 붙잡는 윤성을 쳐다보지 않고도 금방 오겠다고 달래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그러는 사이에 우람이 거칠게 연 문은 조금의 틈만을 남긴 채 닫히고 있는 중이었다. 신발장 앞 너절하게 널린 운동화 중 하나를 골라 신은 대현이 얼른 그 틈 사이로 발을 끼워 넣었다. 그가 소리쳤다.
“한우람, 잠깐만!”
급하게 따라 나간 보람이 있었는지,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서 버튼을 거칠게 눌러대는 우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현이 걸음을 빨리 해 그의 옆에 다가섰다.
“얘기 좀 하자고 했잖아.”
이번에도 우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욕을 하며 몸을 돌려 비상계단 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작게 한숨을 쉰 대현이 그 뒤를 따랐다. 십 단위를 훌쩍 넘어가는 층수를 정말 걸어 내려가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와 대화를 하려면 일단은 그 뒤를 따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보였다.
“잠깐 서봐.”
“…….”
“야!”
이제는 완전히 무시하겠다고 마음이라도 먹은 건지 대현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는 야속한 등은 갈수록 속력을 붙여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얼마나 속도를 내고 있는지 따라가기가 벅찰 정도였다. 거기다 짝짝이로 신고 나온 신발 한쪽이 사이즈가 맞지 않는지 자꾸 벗겨졌다. 또 벗겨진 신발에 잠시 멈칫한 사이, 우람은 어느새 한참 멀어져 있었다.
아래를 절망적으로 내려다보던 대현이 결국 더 따라가기를 포기하고 멈춰 섰다. 맨발로 딛고 선 한쪽 발이 시렸다. 거기다 그가 서 있는 계단 옆에 붙은 층수 알림판은 그들이 10층도 넘게 경주 아닌 경주를 이어가며 내려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이를 악문 대현이 결국 계단 아래층을 향해 소리쳤다.
“언제까지 피할 건데!”
그 말에 거짓말같이 우람이 멈춰 섰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시당할 줄 알았던지라 대현도 잠시 당황했다. 그도 잠시 상황을 파악한 그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든 우람을 잡아야 했다. 지후와 우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지만, 지후를 향한 우람의 분노부터 해결해야 했다. 지후가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이라면 대현이 그를 대신해 숙이기라도 해야 한다.
“언젠가 한 번은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 알잖아.”
우람을 향해 몸을 굽히고 있던 대현이 다음 순간 눈을 크게 떴다. 우람이 돌아오고 있었다. 빠르게 내려갔던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올라오는 얼굴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두 칸을 두고 아래에 선 우람을 보던 대현이 눈을 깜빡거렸다.
“말해.”
“…….”
“어디 한 번 지껄여 보라고.”
거친 눈빛을 마주하던 대현이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순탄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굳게 닫힌 입술, 단단하게 팔짱을 낀 채 저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대현이 무슨 말을 하든 들을 것 같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안 되면 감성적으로라도 설득할 생각이었던 대현의 계획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남은 건 원론적인 질문뿐이었다. 결국 입술 사이를 가르고 나온 말은 자신이 계획해 두지 않았던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돌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너한테 용서받을 수 있는 건지 알려줘.”
“…….”
“해체…… 막고 싶어 나. 그걸 막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거야.”
“…….”
“네 도움 없으면 불가능해. 알잖아.”
말이 이어질수록 가라앉는 우람의 눈이 느껴졌지만 피하지 않은 채 대현이 말을 끝맺었다. 진심을 알아주길 바랐다. 물론 우람에게는 갑자기 이러는 자신이 이해가 안 갈 것이었다. 자신이 우람이라도 그랬을 것 같다. 해체 과정에 동의하다 못해 앞장서는 걸로 보였던 리더가 갑자기 태도가 바뀌어 해체를 막고 싶은데 네 도움이 필요하다며 말해오는 건 확실히 이상하게 여겨질 만했다.
하지만 지극히 단편적인 정보를 가진 지금으로선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대현은 솔직하기를 택했다. 어긋난 관계는 의외로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빠진 경우들이 많다.
“도와줘. 부탁이야.”
예를 들면 작은 제스처 같은 것들. 먼저 손을 내밀거나, 사과를 하는 등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 말이다. 이들 관계의 틈이 그런 기본적인 것들의 결핍으로 인해 생겼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지후가 제게 말해주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추측도 할 수 없는 것들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현이 일주일간 지켜본 이들은 각자 가진 감정의 골 외에도 서로를 향한 감정 자체가 배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대현은 그런 기본적인 행위들부터 다듬어 나가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밥을 먹고, 시간을 함께 보내는 행위가 어색하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윤성과는 놀라울 정도로 일이 쉽게 풀려가고 있다지만, 눈앞의 우람은 그렇게 다가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색한 상태에서도 컵라면을 건네는 등 작게나마 저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윤성과 달리, 제가 조금만 다가가도 질색을 하며 떨쳐 내는 우람의 행동이 그를 증명했다.
그렇기에 대현은 제가 가진 패를 다 까기로 했다. 방금처럼 직설적으로 뱉어낼 생각은 없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결국 어떻게든 한 번은 지나쳐 갔어야 할 단계였다. 우람이 어떤 식으로 반응하든 이제는 그에게 달린 문제였다.
대현을 마주하는 우람의 눈이 작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때였다. 우람의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려 나온 건 말이다. 꽤 길게 이어지는 벨소리에 받지 않으려나 생각했지만, 예상과 달리 우람은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어.”
무뚝뚝한 음성이 흘러나오기도 잠깐, 우람의 표정이 다른 빛으로 굳어가기 시작했다. 몸을 돌려 핸드폰을 꽉 붙잡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다급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대현의 심장이 덩달아 쿵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