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정신을 못 차리던 사람이 갑자기 정신을 차리고 코너로 몰기까지 하기에 뭔 말을 하려나 했는데 막상 들린 말은 예상을 뒤엎지 못했다. 처음에야 들었을 때 놀랐지, 지후와 우람 사이에 뭔 일이 있었어도 크게 있었으리란 걸 짐작하고 난 지금으로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긴장이 풀린 대현이 우람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별 저항 없이 밀려나면서도 대현을 향하는 눈이 다시 느리게 감겼다 뜨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를 보지 못한 듯 슬쩍 고개를 돌린 대현이 볼멘소리처럼 뱉으며 뒤돌았다.
“싫으면 네가 알아서 좀 걷든가.”
벽으로 밀어붙이던 힘이나 말투로 봤을 때 술이 깬 것 같아서 건넨 말이었다. 벌써부터 뻐근하게 느껴지는 어깨를 돌리며 앞서 걷던 대현이 멈칫했다.
쿵.
몇 걸음 떼지 못해 들린 소리 때문이었다. 뒤돌자마자 복도 바닥에 반쯤 구겨진 거대한 형체가 보였다. 거동을 몇 배는 조심해야 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면서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인사불성이 된 그보다 어쩌면 더 답이 없는 건 이 와중에 그가 머리를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하는 자신일지도 모른다.
다가가 확인을 해보니 다행히 머리를 다친 건 아닌 듯했다. 아까처럼 제 머리조차 가누지 못하는 얼굴에는 방금 대현을 몰아붙이던 사나움이 사라져 있었다. 술이 덜 깬 상태에서도 그렇게 밀쳐 내고야 마는 상대라 이거지. 씁쓸함을 애써 떨쳐낸 대현이 다시 그를 부축했다.
오랜만에 꾸는 기분 좋은 꿈이었다.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에 미소를 짓던 우람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갑자기 들려오기 시작한 정체 모를 소리 때문이었다. 쾅. 쾅. 쾅. 깨지는 듯한 소리가 환상 같은 꿈을 해치고 있었다. 소리는 우람을 압박이라도 하듯 더 커지고 있었는데, 결국 그 소리의 근원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우람은 어느새 타고 있던 구름에서 빠르게 추락하고 있기까지 했다.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눈을 뜬 우람이 갑자기 몰려온 빛에 눈을 찡그렸다. 몇 초가 지나고서야 겨우 빛에 적응한 그가 빠르게 눈을 깜빡거렸다. 빛이 들어오는 곳은 침대와 마주본 문이었다. 빛을 등진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그 손에 들린 게 방금 제 잠을 깨울 만큼 큰 소리를 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까치집이 된 머리를 하고는 퉁퉁 부은 눈을 꿈뻑거리는 우람을 확인한 자가 냄비와 국자를 든 손을 내리는 게 보였다. 아니, 잠깐. 냄비와 국자?
잠이 덜 깬 상태로도 이상하게 느껴지는 조합에 결국 상체를 일으킨 우람이 한 걸음 다가와 내려다보는 얼굴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구겼다.
“……이지후?”
대답 대신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왔다. 그는 어느새 방을 나서고 있었다.
“나와. 밥 먹게.”
멍청한 표정으로 그가 나가는 방향을 좇아 눈을 굴리던 우람이 거실에 서서 방 안을 흘끔거리는 이를 보고 한 번 더 눈을 크게 떴다. 윤성아, 콩나물 그쯤 하면 된 거 같으니까 가져와. 아…… 네, 형! 우람과 눈이 마주치고는 더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던 윤성이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보고는 있지만 믿기지 않고, 듣고는 있지만 이해가 안 됐다. 무의식적으로 올라온 손으로 배를 긁던 우람은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나 아직 꿈꾸나.
“뭐해. 앉아.”
술이 덜 깬 채 거실로 나올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다. 거실에 나가자마자 풍겨오는 콩나물국 냄새도,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윤성을 보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 모든 광경은 사실이 아니리라고 막연하게 부정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자신의 시선을 무시한 채 식탁 위에 접시를 내려놓는 저 얼굴은 이지후가 분명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에, 상상해 본 적 없는 조합이었다. 얼빠진 표정을 하고 부엌을 둘러보는 우람에게 한 마디가 더 건너왔다.
“아, 그리고 폰은 거기 올려뒀어. 찾을까 봐.”
턱짓을 한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인 건 정말 제 핸드폰이 맞았다. 저게 왜 저기에 있…… 급격히 차오르는 기억들에 우람이 입을 다물었다. 시끄러운 음악과 반짝거리는 조명이 가득하던 클럽, 끝을 모르고 들이부어 댔던 술, 더는 안 될 것 같아 비틀비틀 걸어 나왔던 번화가 거리까지도 야속하리만치 기억이 잘 났다. 어느 순간부터 중얼거리기 시작했던 이름까지 말이다.
‘나오라고 이지후! 이 개새꺄……!’
눈앞에 없던 대상을 찾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던 것까지 떠오르자 우람은 민망해졌다. 중간 중간 끊기는 기억 속에는 자신을 부축하던 지후의 얼굴도 있었다. 자신도 잊고 있던 핸드폰을 챙겨 올려놓은 걸 보니 잘못된 기억은 아닌 모양이다. 택시에서 내린 후 제 발로 걸어 올라온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지후가 저를 숙소까지 데려온 게 확실했다. 짧은 회상을 끝에는 멋쩍음만이 남았다. 헛기침을 하며 앞을 흘끔 봤지만 앞치마를 대충 걸어놓으며 의자에 앉는 지후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윤성아. 먹어 얼른. 배고프겠다.”
“아…… 네.”
근데 이지후는 그렇다 치고, 지윤성 쟤는 왜 아무렇지 않게 이 모든 걸 받아들이고 있는 거지. 엄마 캥거루 주머니 속에 있는 아기 캥거루라도 되는 것처럼 지후의 옆에 딱 달라붙어서 앉아 있는 얼굴은 우람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며칠간 제가 숙소도 안 들어오고 밖으로 나돌긴 했다지만, 일주일 사이에 제가 아는 풍경에서 한참이나 동떨어지게 변한 부엌에는 죄다 이해가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우람이 윤성과 지후를 관찰이라도 하듯 번갈아 훑었다.
“안 먹을 거야?”
물음이 한 번 더 건너올 때까지도 말이다. 태연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지후를 보던 우람의 얼굴이 굳었다. 어이없는 상황에 잠시 미뤄뒀던 분노가 불쑥 치밀었다. 저 새끼는 근데 아까부터 자꾸…… 하라 마라 지랄이야. 안 하던 짓을 하는 건 저면서. 막말로 누가 어제 저 때문에 술을 그렇게 먹었는데.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을 이으려던 우람이 멈칫했다. 지후의 얼굴에 난 상처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일주일이나 지났으나 멍이 아직 남은 볼과 입가는 제가 만든 것임이 분명했다.
“너 해장하라고 만든 건 맞는데. 안 먹고 싶으면 안 먹어도 돼.”
“…….”
“대신 그만 좀 노려봐. 애 밥도 못 먹는 거 안 보이냐.”
우람의 시선이 방황하는 곳이 어딘지를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어가는 얼굴은 그가 아닌 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시선을 옮기자 정말 대현의 말처럼 젓가락을 든 상태로 굳어 눈치를 보고 있는 윤성이 보였다.
시선을 느끼자마자 티 나게 시선을 돌리는 얼굴을 보자 뻘쭘해졌다. 어색하게 고개를 돌린 우람이 그제야 부엌에 들어오고 한 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곳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식탁 위의 콩나물국과 김치, 멸치조림과 같은 밑반찬들에 닿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쌀밥까지 확인하자 군침이 돌았다. 허기를 느끼자마자 같이 찾아온 속 쓰림에 우람이 인상을 찡그렸다. 잠시 망설이던 우람이 결국 식탁으로 다가섰다.
“…….”
성의 없는 손짓으로 의자를 세게 뒤로 빼는 우람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윤성과 달리 지후는 별로 동요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 사실도 왠지 모르게 그를 불편하게 했지만 애써 무시한 우람이 수저를 들었다. 지후의 볼에 난 상처를 확인한 순간 든 죄책감을 애써 잊으려고 노력하며 말이다. 거칠게 수저를 들고 국을 뜨던 우람이 고개를 들었다. 우람을 흘끔거리던 두 쌍의 눈알이 빠르게 흩어졌다.
“……뭐. 먹으라며.”
툴툴거리며 국을 뜬 우람이 다음 순간 번쩍 뜨인 눈으로 지후를 응시했다. 기다렸다는 듯 마주해 오는 눈을 피한 그가 부러 미간을 모으며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표정과 딴판으로 노는 손은 빠르게 국을 퍼 올리고 있었다. 한 모금씩 들어올 때마다 당장 화장실로 달려가고 싶게 만들던 속 쓰림 현상이 완화되어 가고 있었다. 절로 풀리는 표정을 굳히려 애쓰며 이번에는 우람이 지후를 힐끔거렸다. 그가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물론 마음속으로.
‘이 새끼, 여기에 무슨 약이라도 탄 거 아냐?’
“씨발.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우람이 휙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했다. 몸을 냉장고에 딱 붙여야지만 볼 수 있는 거실에서는 아까부터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웃음소리? 한 번 더 인상을 찡그린 그가 차가움이 느껴진 아래에 짜증을 내며 제 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거실을 훔쳐보는 동안 고무장갑에서 떨어진 물 때문이었다. 한숨을 쉰 우람이 싱크대 안의 접시를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다. 웃음소리를 들으며 빨간 고무장갑을 끼게 된 계기를 유추해 보려 미간을 좁히자 어렵지 않게 아까 전 상황이 떠올랐다. 바로 떠오른 눈에 우람이 입매를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