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17화 (17/119)

17화

“결국 다 봤네.”

원래 하나에 꽂히면 끝을 보는 성격이긴 하다만, 스무 권을 한 자리에 읽은 건 아무래도 좀 과했다 싶다. 긴 시간 동안 작은 글자를 쳐다보고 있었던 탓인지 시야가 좁아진 듯한 느낌까지 드는 눈을 꾹 감았다 뜬 대현이 주위를 살폈다. 유리창 너머로 어느덧 어두워진 바깥이 눈에 들어왔고, 다음으로 거실을 둘러본 대현의 눈에 들어온 건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윤성이었다.

“…….”

애처럼 입을 살짝 벌리고 자는 얼굴이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편해 보인다. 만화책을 읽던 중에 잠든 건지 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책에 얼굴을 뭉개고 있는 그를 본 대현이 몸을 일으켜 윤성에게 다가섰다. 몸을 낮춰 윤성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는 손길이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얼굴에 붙은 만화책을 떼준 대현이 이내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쿠션을 방금 전까지 만화책이 있던 곳에 끼워주었다. 자던 중에도 무언가가 저를 귀찮게 건드는 걸 알았는지 잠투정을 하던 윤성의 표정이 다시 평온해졌다. 그를 잠시 바라보던 대현이 발소리를 죽여 제 방으로 걸어갔다.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는 손길이 다정했다.

막냇동생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유명한 동요의 가사가 떠올랐다. 곱슬곱슬한 머리까지 딱이다. 소리 죽여 웃은 대현이 불편하게 쭈그리고 앉은 자세로 윤성을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몸이 말랐다고는 해도 다소 굵은 얼굴 선이나 큰 키를 보면 저런 곱슬곱슬한 머리가 안 어울릴 것도 같은데도, 저렇게 딱 맞춘 듯 잘 어울릴 수가 없단 말이지. 역시 머리의 완성은 얼굴이다. 다소 엉뚱한 결론을 내며 자리에 일어서던 대현이 깜짝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언제 거기 들어가 있었는지도 모르던 핸드폰이 주머니에서 웅웅대고 있었다. 꽤 강한 진동에 윤성이 깼을까 봐 서둘러 뒤를 살폈지만 다행히 깨지는 않은 듯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대현이 지후의 방으로 들어갔다. 뭔지는 몰라도 일단 들어가서 받아야겠다는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문을 조심스레 닫은 대현이 주머니에서 폰을 꺼냈다. 그때까지도 폰은 지칠 줄 모르고 몸을 흔들어대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인데 이 시간에…… 방에 걸린 시계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 대현이 짜증을 내며 화면을 확인했다. 짜증이 묻은 얼굴이 의아함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현이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며 무슨 상황인지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는 중에도 폰은 진동을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마치 전화 건 사람이 받으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망설이던 대현이 결국 홀드를 풀고 전화를 받았다. 받자마자 몰려드는 소음에 인상을 찡그린 대현이 무슨 말을 뱉기도 전에 타인의 목소리가 건너왔다.

[아이고 드디어 받네.]

“여보세요?”

[네, 여기 택시 운전하는 사람인데요.]

“네?”

[xx동 oo아파트 맞죠? 여기 좀 내려오셔야겠는데요. 손님이 너무 취하셔서요.]

“취했다구요?”

[네, 아주 난리도 아니에요. 거기다 자꾸 손님한테 전화해야 한다고 우겨서 오는 내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아무튼, 내려오실 수 있으시죠?]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취했다는 말에 사고를 멈춰 버린 듯한 머리를 돌리려고 애쓰며 대현이 입술을 깨물었다. 화면에 뜬 이름과 상황을 종합해 어떻게든 이해를 하고 싶었지만, 당장 들리는 건 잔뜩 지친 듯한 택시운전사의 목소리와 그의 목소리를 뚫고 전해지는 소란스러움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정확히 어디 계신다고 하셨죠?”

핸드폰을 어깨와 귀 사이에 끼운 채로 외투를 껴입던 대현이 멈칫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나와! 나오라고 이지후! 이 개새꺄……!]

이를 악문 대현이 빠르게 중얼거리듯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지금 내려갈게요.”

다행히 우람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것 같은 머리를 짚던 대현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우람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게 빨랐다.

“전화 받으신 분 맞으시죠?”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그가 입고 있는 조끼를 확인한 대현은 그가 방금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택시기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이 되는 기사를 보던 대현이 일단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정신도 못 차리고 인도에 구겨져 있는 우람을 대신한 사과였다.

“힘드셨겠어요. 죄송합니다.”

“어우…… 말도 못 해요. 젊은 사람이 얼마나 주정을 부려대는지. 힘은 또 오죽 세.”

“네, 죄송합니다, 정말…… 혹시 택시비는 지불했나요?”

“어이구. 택시비는 무슨. 난 솔직히 이렇게 친구분이 나와준 것만으로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대현의 옆에 서 우람 쪽을 함께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얼굴은 그가 오늘 겪었을 고초를 예측 가능케 했다. 그래도 대현이 나온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한결 편한 얼굴이 된 기사를 보던 대현이 혹시나 해서 갖고 나왔던 지갑을 꺼냈다. 택시비가 얼마 나왔는지도 묻지 않고 빳빳한 오만원권 지폐를 두 장 건네는 대현을 본 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현이 설명하듯 덧붙이며 지폐를 한 번 더 내밀었다. 너무 고생하셔서…… 이제는 표정이 풀린 것을 넘어 웬 횡재냐 싶은 표정으로 돈을 받는 기사를 보던 대현이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어이구, 뭘 이 정도로. 살갑게 웃는 기사에게 함께 웃어준 대현이 망설이다 걸음을 옮겼다.

“…….”

가까워질수록 코를 찌르는 듯 파고드는 알코올 향에 저절로 인상이 써졌다. 전화를 받은 순간부터 어지간히 취해 있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이건 뭐 술독에 빠진 수준이었다. 막막한 심정으로 우람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는 대현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깨울 수 있으면 조금 깨워서 부축이라도 하는 게 가장 나은 선택지 같았지만, 제가 온 것도 모르고 숙면에 빠진 듯한 얼굴은 그런 방법이 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차라리 아까 전화를 할 때 들렸던 것처럼 욕이라도 하고 있는 상태면 나았을 텐데.

“저기.”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못한 대현이 우람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효과는 없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세게 팔뚝을 툭 치기까지 했지만 여전히 미동도 없는 우람을 보자 이제는 자동반사 격으로 한숨이 나왔다. 결국 뒤 돈 대현이 자신과 우람을 구경하듯 옆에 선 기사에게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기사님, 혹시 저 조금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헉. ……허억…….”

땀이 다 난다. 이마에서 배어나는 땀을 손등으로 대충 눌러 닦은 대현이 층수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벽 쪽으로 기대어놓은 우람은 여전히 인사불성 상태였다. 그래도 이제 벽과 무게를 좀 나눠서인지 살 것 같았다. 수월하게 부축을 하기 위해 어깨에 둘렀던 우람의 팔을 조금 풀어내며 대현이 앓는 소리를 냈다.

……심하게 무겁네 진짜. 상황도 그렇고, 제가 좋아하는 아이돌이기도 하니 웬만하면 참으려 했지만 이 무게는 해도 해도 너무했다. 거기다 정상적인 사고가 작동하지 않는 취한 사람은 부축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래도 현관까지 우람을 함께 부축해 준 기사님이 있을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현관 이후로 혼자 부축하게 된 우람은 이름값을 했다. 온전히 제 무게를 다 실어 기대오는 우람 덕에 현관에서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그 길이 그렇게 멀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 덕분인지 달콤하게까지 느껴졌던 휴식은 길지 않았다. 열린 엘리베이터 문을 절망스럽게 바라보던 대현이 한숨을 쉬며 우람의 팔뚝을 잡아 제 목 근처에 걸어놓았다. 힘을 실어 균형을 잡은 대현이 우람을 부축해 걸음을 떼려고 할 때였다.

“……뭐야.”

죽은 듯 그에게 딸려오던 우람에게서 흘러나온 소리였다. 대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반쯤 뜨인 진한 갈색 눈이 대현을 향해 느리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멍한 표정을 봤을 때 잠에서 깬 건 아닌 것 같았지만, 그 와중에도 제 얼굴을 향해 초점을 잡아 빤히 바라보는 얼굴은 어딘가 뒷목을 서늘하게 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대현이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

둘을 비추던 복도의 불이 팟- 소리를 내며 꺼졌다. 가만히 서서 시선을 나누고만 있는 둘 때문에 발생한 일인 걸 알면서도, 대현은 이상하게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깜깜한 복도에서는 색색 내뱉는 우람의 느린 숨소리와 대현의 묘하게 숨죽인 숨소리가 섞여 들려올 뿐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침묵이 끊겼다. 우람 때문이었다. 갑자기 몸에 힘을 주어 미는 우람 덕에 갑자기 벽 쪽으로 밀린 대현이 당황한 표정을 했다. 놀란 것도 잠시 대현은 조금 억울해졌다. 아니, 이럴 힘이 있었으면서 올라올 때는 가만히 있었다고? 인상을 찡그리며 우람을 밀치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제야 어딘가 묘해진 둘의 자세를 느껴서였다. 대현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우람의 허벅지가 은근하게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빤히 바라보는 갈색 눈까지도.

이거 좀 이상한데. 어색한 표정이 된 대현이 우람의 시선을 받아칠 때였다.

“난 네가 진짜…….”

“…….”

“진짜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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