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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와 거리두기-16화 (16/119)

16화

김치, 계란, 양파, 아,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텅텅 빈 냉장고를 생각하니 그냥 웬만한 재료는 다 사 오는 게 낫겠다 싶기도 하고. 그 김에 다른 밑반찬 만들 거리도 같이 사 오는 것도 괜찮겠다. 재료를 하나하나 짚어보며 신발을 구겨 신던 대현이 조용한 뒤를 느끼고는 뒤돌았다. 갈까?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윤성이 대현의 뒤를 따랐다.

최대한 개인 외출을 삼가라 했던 매니저의 말을 언급하며 조금 겁을 냈던 윤성과 달리 대현은 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내 발로 나가겠다는데 뭐 어쩔 거냐는 지극히 일반인적인 사고가 그를 지배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집 앞에 있는 마트에 가서 장 좀 보겠다는 건데 무슨 핑계를 대고 말릴 쏘냐 싶기도 했다. 사실 몸이 찌뿌듯해서 어디든 나가고 싶기도 했다.

22년 살며 제 스케줄을 남에게 맡겨본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집 앞 마트에 가는 것마저 매니저에게 보고해야 되는 아이돌이 된 건 확실히 어색하고 불편한 일이었다. 그렇게 패기가 넘치는 그에게도 무서운 건 있었는데, 그건 숙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생의 존재였다. 자칫하면 나가자마자 뛰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대현이 눈에 들어온 의외의 풍경에 멈칫했다.

“어……?”

아파트 앞이 텅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지극히 정상적으로 느껴질 광경이 이렇게 낯설 수가. 혹시 숨어 있는 거 아냐……? 의심을 못 버리고 수풀을 기웃대는 대현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성이 그가 그러고 있던 시간이 오 분을 넘어가기 시작하자 대현을 조심스레 불렀다.

“저, 형.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아, 어. 미안.”

그제야 고개를 들어 주위의 시선을 눈치챈 대현이 어색하게 몸을 폈다. 유독 그의 옆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걸음 속도가 빨라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윤성의 옆에 와 걷기 시작한 대현이 변명처럼 말을 뱉었다.

“오늘은 아무도 안 보이는 것 같아서. 그, 사생들 있잖아.”

“아…….”

아? 뭔가를 아는 듯한 말투였다. 궁금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자리에 멈춘 대현을 따라 제자리에 선 윤성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어덜트 데뷔 쇼케이스 날이잖아요.”

“아. 오늘이야?”

“네. 그래서 매니저 형들도 오늘 못 오신 걸걸요.”

“아…… 근데 그거랑 사생이랑 뭔 상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생각을 이어가던 대현이 제 옆얼굴로 와 닿는 윤성의 시선에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이상했다. 마치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요새는 한 그룹만 좋아하는 게 드무니까요. 특히나 뭐 저희 같은 경우는…….”

말을 흐렸지만 그래도 뒤의 말은 충분히 예상이 가능했다. 나올 때만 해도 그래도 조금 들떠 있던 얼굴이 어느새 가라앉은 걸 보며 대현은 제가 대화 주제를 잘못 골랐다는 걸 직감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숙소에서 마트가 정말 가까웠고, 키가 큰 편인 대현과 윤성의 걸음 속도는 빠르기까지 해 금방 그 곳에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카트 쪽으로 뛰어간 대현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윤성을 돌아봤다. 환하게 웃으며 제게 카트 손잡이를 내미는 대현을 보던 윤성이 멈칫했다.

“얼른 장 보고 집 가서 밥 먹자. 형이 맛있는 거 해줄게.”

달래듯 허리 언저리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이 다정했다. 말을 한 후 앞장서 가는 뒷모습을 보던 윤성이 작은 한숨을 쉬고는 대현의 뒤를 따랐다. 대현이 씌워준 검은색 캡 밑의 귀가 약간 달아올라 있었다.

카트를 둘러보던 대현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건 대충 다 산 것 같다. 반강제적으로 집요하게 요구해 알아낸 윤성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볶음밥이었고, 김치와 계란을 비롯해 필요한 재료를 담고 거기에 내일 메뉴와 모레 메뉴까지 대충 생각해 더하고 나니 카트가 얼추 찼다. 재료를 담는 내내 조용하던 윤성을 슬쩍 본 대현이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 가볼까?”

“네?”

“고기 좋아하지?”

대현이 걸음을 옮긴 곳은 육류 코너였다. 훤칠한 청년이 다가가 먼저 고기에 관심을 보이자 아주머니가 반색을 하며 고기를 마구 집어 건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거리를 두고 멈춰 선 윤성을 돌아본 대현이 윤성의 입에 고기를 밀어 넣어줬다. 얼떨결에 받아먹은 윤성이 고기를 씹는 동안에도, 대현과 아주머니의 살가운 대화는 이어지고 있었다.

“총각 둘이 이 시간에 장을 다 보네.”

“아. 집에 먹을 게 없더라구요.”

“어이고. 둘이만 사는겨?”

“아니요. 둘만 사는 건 아닌데 결과적으로 먹는 건 둘뿐이라…….”

그건 또 언제 챙겨온 건지 아까 석류 음료를 파는 곳에서 시음용으로 건네던 음료잔을 홀짝이던 대현이 아주머니와 대화를 하다말고 윤성을 돌아봤다. 고기를 다 먹고 꿀꺽 넘기던 윤성과 눈을 마주친 그가 윤성 쪽으로 몸을 돌렸다.

“먹을 만해? 좀 사다가 구워 먹을까?”

“네? 아…… 형 좋으시면 사도…….”

“아니, 나 말고 너.”

“……저요? 아…… 전…….”

“클 때는 고기를 잘 먹어야 돼.”

많이 먹어야 살도 좀 붙고 그러지. 걱정스러운 어투로 중얼거리며 대현이 윤성의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 잠깐 대현의 눈빛이 닿은 팔뚝과 손목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어색한 기분에 팔소매를 끌어당기며 안절부절못하던 윤성을 지켜보던 대현이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희 고기 주세요.”

“그래요. 얼마나 줄까?”

“두 명, 아니 세 명이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양이면 어느 정도일까요? 한 근이면 되겠죠?”

“충분하지. 그렇게 줄까?”

“네! 많이 주세요~”

눈웃음을 지으며 애교 아닌 애교를 부리는 대현을 보던 아주머니가 활짝 웃었다. 그 덕분인지 제법 두툼한 고기를 받아 든 대현이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옆에 선 윤성도 어색하게 같이 고개를 숙이는 걸 본 대현이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계산대로 향하는 자신을 놓치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카트 끄는 소리가 잠시 시끄러워졌다. 잘 따라오고 있는 윤성을 돌아보며 대현이 물었다.

“이제 갈까?”

“네?”

“집.”

잘 못 들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어오는 얼굴이 귀여웠다. ‘집’이란 글자에 힘을 주어 내뱉으며 대현이 씩 웃었다.

“밥 먹어야지, 우리.”

“다 된 거 같…… 왜?”

“네?”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아서. 뭐 묻었어?”

하얀 접시에 김치볶음밥을 옮겨 담던 대현이 고개를 뒤로 틀어 저의 등 뒤에 뭔가 묻었는지를 살폈다. 그 모습까지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윤성이 곧 정신을 차리고 대현을 만류했다. 그냥 본 거예요, 형. 얼굴까지 빨개져 부정하는 윤성이 무색하게 그래? 하고 금세 수긍한 대현이 하던 행위에 다시 집중했다. 반숙과 완숙의 경계에 걸친 계란프라이까지 올린 하얀 접시 두 개가 곧 윤성이 홀로 앉아 있던 식탁 위에 올라왔다.

이 집에 온 후 아무도 이용하는 걸 본 적 없는 식탁은 쓸데없이 크기만 하다. 자신과 윤성 앞 김치볶음밥이 담긴 접시 외에는 텅 빈 6인용 식탁을 둘러보던 대현이 눈앞의 윤성을 살폈다. 대현이 요리하는 동안 보고 있던 만화책을 덮어 옆으로 밀어놓고 있는 윤성은 허둥지둥하고 있었다. 배가 많이 고팠나 보다. 편할 대로 해석을 마친 대현이 손에 쥐고 있던 수저를 건넸다.

“먹어.”

“…….”

“오랜만에 해본 거라 맛은 장담 못 하겠다.”

그래도 어디 가서 요리 못한다는 말은 안 들어봤는데. 괜찮겠지 뭐. 어깨를 으쓱하며 숟가락을 든 대현이 또 다시 멈칫했다. 김치볶음밥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얼굴이 사뭇 가라앉아있음을 눈치채서였다. 순간 뭐 잘못한 게 있나 싶어 윤성의 앞에 놓인 김치볶음밥과 제 앞에 놓인 김치볶음밥을 비교해 봐도 딱히 뭐 특이하거나 잘못되어 보이는 건 없었다.

‘맛없어 보여서 저러나……?’

머리를 긁으며 눈치를 보는 대현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한참이나 그렇게 김치볶음밥을 지켜보던 윤성이 입을 연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잘 먹을게요 형.”

“어? 어…… 많이 먹어. 넉넉히 해놨으니까.”

한참을 뜸 들인 것치고는 평범한 식사 전 인사였다. 그렇지만 당사자 입에서 뭐라도 들으니 안심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수저를 드는 얼굴을 슬쩍 훔쳐보던 대현이 이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숟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맛은 괜찮았던 모양이었다. 꽤 넉넉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두 번이나 접시를 깨끗이 비운 윤성 덕에 프라이팬도 깨끗해졌다. 절로 나는 뿌듯한 미소를 숨기지 않으며 대현이 소파에 기댔다. 슬쩍 보이는 부엌에서는 윤성이 설거지를 하는 중이었다. 괜찮다는 말에도 부득불 자신을 말리며 소파로 밀던 단호한 얼굴을 떠올린 대현이 픽 웃었다. 덕질할 때도 느끼긴 했지만 확실히 막내는 막내인 모양이었다. 제 딴에는 심각하게 하는 것 같은 행위도 보고 있자니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자, 그럼 배를 채웠으니 이제는 오랜만에 만나 뵙는 것 같은 백호 형님을 맞을 차례다. 거실 바닥에 배를 대고 누운 대현이 푹신한 쿠션 위에 상체를 얹었다. 열 번도 넘게 본 것 같은 만화책은 어떻게 볼 때마다 이렇게 재밌을 수 있을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대현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든 건 손에 든 1권이 마지막 장을 남겼을 때였다.

“어. 벌써 다 했어?”

“아 설거지는 아까 다했는데…….”

“뭐야. 부르라니까 왜 안 불렀어.”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그래도 같이 장도 보러 가고, 오는 길에 비록 제가 주장한 거긴 하지만 만화책도 같이 빌려오고, 집 와서 같이 밥도 먹으며 좀 친해졌다 생각했는데. 마치 상사에게 보고를 하듯 반쯤 누운 제 앞에서 반듯하게 서 있는 윤성의 모습에 대현이 슬쩍 미간을 모았다. 무언가를 찾듯 고개를 휘휘 돌리던 그가 제 상체를 받치고 있는 쿠션과 똑같은 쿠션을 발견하고는 제 옆으로 툭 던졌다.

뭐 해.

네?

누워, 너도.

“자, 얼른.”

당황한 게 뻔히 보이는 윤성의 손을 잡아 내린 대현이 쿠션을 끌어 윤성의 품에 안겼다. 얼떨결에 품에 들어온 쿠션을 꽉 안는 윤성을 보며 미소 지은 그가 오른손에 들린 만화책을 윤성 쪽으로 슬쩍 흔들어 보였다.

“자고로 만화책은 누워서 봐야 제 맛이거든.”

그 말이면 설명이 끝난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2권을 집어 드는 대현을 보던 윤성이 드디어 몸을 꼼지락거렸다. 일단은 엉거주춤 엎드린 그가 대현을 보며 얼추 자세를 따라 할 수 있게 된 건 그의 손에 들린 만화책의 표지가 세 번 정도 바뀌고 나서였다. 4권을 찾다 말고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한 대현은 아까의 그 자세 그대로 누운 채로 만화책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실이 주는 안정감에 표정이 풀렸다. 고개를 돌린 윤성이 제법 능숙한 포즈로 4권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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