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15화 (15/119)

15화

호기롭게 해체를 막고 싶다는 말을 뱉은 거치고는 별일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매일같이 들르던 매니저 형들도 후배 그룹의 데뷔일이 가까워지며 사무실에 일손이 모자라다는 말과 함께 점점 발길이 뜸해졌다. 덕분에 대현은 어떤 방해도 없이 며칠째 방에 처박혀 있을 수 있었다.

“으아아.”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대현의 밑으로 그의 옷에 붙어 있던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아래를 내려다본 대현이 귀찮다는 듯이 머리를 긁은 건 다음 일이었다. 어지르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그 흔적을 치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은 두고두고 찝찝함을 느낄 게 분명했다. 오늘도 자신에게 지고 만 대현이 청소 기구를 찾아 방을 나섰다.

조용한 밖에 예상은 했다만 숙소에 남은 사람은 대현뿐인 듯했다. 안도의 한숨인지 모를 것을 흘린 대현이 부엌으로 들어섰다. 베란다 문을 열자마자 보인 빗자루를 집어 든 대현이 돌아서려 할 때였다. 베란다 입구에 놓인 포대에 시선이 멎었다.

“……윽 ……뭐야.”

잠시 들여다본 건데도 대현은 호기심이 앞섰던 방금 전 자신을 탓하며 코를 막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눈을 뗄 수 없는 포대 안에는 곰팡이가 잔뜩 낀 덩어리들이 보일 뿐이었다. 그게 생쌀이라는 건 한참을 지켜본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광경에 놀라기도 잠깐,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부엌으로 다시 돌아온 대현은 홀린 듯 냉장고를 열어보는 자신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숙소에 온 후 냉장고 열어본 적이 없다. 매니저들이 포장된 음식을 계속 가져다 날랐기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도 있고, 별 일이 없다면 방 밖으로 나서는 행동을 피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와, 진짜 심하다.”

어떻게 된 게 이 집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당장 모델 하우스에 내놓아도 될 만한 것들밖에 없다. 탄산수 몇 병이 굴러다니는 것 빼고는 텅 빈 냉장고를 본 대현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냉동고를 열었으나 닭가슴살, 그것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만 발견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 했다.

밥을 못 먹어서 다들 그렇게 늘 화가 나 있나. 물론 그들의 하는 거의 모든 성난 행동의 기저에는 지후의 잘못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괜히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농 비슷한 생각을 했던 대현이 냉장고를 여느라 팽개쳐 놓았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다시 들며 뒤돌았을 때였다.

“악, 시발!”

언제 여기에……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도…….

의자에 발을 찧은 아픔에 깽깽발을 하면서도 속사포처럼 내뱉는 말을 듣는 윤성은 대현보다 더 당황한 표정이었다. 얼굴의 반은 차지할 것 같은 큰 눈이 대현의 발과 얼굴을 번갈아 가며 훑고 있었다.

대현은 고통이 좀 가라앉고서야 뻘쭘히 발을 내렸다. 어색한 분위기에 헛기침을 하던 대현이 그제야 발견한 것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성의 손에 들린 컵라면을 본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

“…….”

여전히 그와 윤성 사이에 오간 말은 없었지만 눈치로 대현이 괜찮아졌다는 걸 알아챘는지 부엌 입구에서 망설이던 윤성이 그를 지나쳐 부엌으로 들어섰다. 자리를 내어주던 대현이 멈칫했다. 슬쩍 지나치며 본 손목이 생각보다 더 얇았다. 마른 건 알고 있었지만 한눈에 보기에도 헐렁한 트레이닝바지까지 눈에 들어오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선을 느꼈는지 정수기 앞에서 어색하게 돌아보는 얼굴과 눈이 마주치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제가 왜 애초에 부엌에 있었는지를 떠올리던 대현이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다시 쥐었다. 방을 나오기 전 계획대로라면 이대로 방에 들어가 청소를 마치면 된다. 물론 윤성이 숙소에 남아 있을 줄은 몰랐고, 그와 이렇게 부엌에서 마주칠지도 몰랐지만. 더는 말을 이을 의사가 없어 보이는 뒷모습은 계획에 별 다른 영향을 끼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이대로 방에 들어가면 평소처럼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대현이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윤성은 컵라면을 먹기 위한 준비를 마친 모양이었다. 용기 뚜껑과 용기 사이로 나무젓가락을 끼워놓은 컵라면을 들고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지나가는 윤성을 지켜보던 대현이 결국 윤성을 불러 세웠다.

“저기. 있잖아.”

말을 뱉은 자신마저도 이래도 될까 고민될 정도였는데, 하물며 불린 사람은 얼마나 더 놀랐을까.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키운 채 돌아보는 윤성을 본 대현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김치는 있어?”

“…….”

“…….”

삼분은 족히 지난 것 같았지만 앞에 앉은 윤성은 식탁 어딘가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을 뿐 젓가락을 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뒤늦게 합류한 대현보다 먼저 물을 부었으니 그의 컵라면은 지금쯤 팅팅 불어터지고 있을 게 뻔했다. 먼저 먹으라는 말이라도 할까 하다가 그렇게 하면 아까 전의 어색한 대화를 또 되풀이하게 될 것 같아서 이도 저도 하지 못한 대현이 결국 입술만 꾹 말아 물었다.

‘아무리 급하게 말 건 거여도 김치 있냐고 물어보는 게 아니었는데. 왜 그랬지.’

티 나게 당황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던 그가 다가와 냉장고 앞 식탁에 컵라면을 내려놓을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올지는 몰랐다. 곧바로 제 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에 ‘내가 괜히 말 걸어서 라면까지 포기하게 한 건가’라며 자책하고 있던 대현이 무색하게 방 밖으로 다시 나온 윤성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마른 손에 들린 건 윤성이 아까 식탁에 내려놓았던 컵라면과 같은 종류의 컵라면이었다. 얼떨결에 받기까지는 했는데, 멍하니 선 대현과 윤성 모두 그 다음 상황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보통 사람들이 견디는 침묵의 시간이 훌쩍 지나고 나서야 윤성에게 같이 먹자고 더듬거리며 말할 수 있었던 아까의 자신을 떠올리며 대현이 속으로 욕을 내뱉었다. 이러면서 삼 개월 안에 어떻게 멤버들과의 불화설을 잠재운다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라면 같이 먹자는 말 하나 못 하는데.

“……드세요.”

“어? 어…… 너도. 맛있게 먹어.”

다행히도 윤성이 어색한 대화의 물꼬를 터주었다. 젓가락 한 짝을 건네주고는 컵라면 뚜껑을 여는 얼굴을 훔쳐보던 대현이 곧 그의 행동을 따라했다. 뚜껑을 열자마자 김이 올라오는 컵라면의 빨간 국물이 상황에 맞지 않게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진짜 김치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상황까지 오게 된 이유이기도 한 김치를 떠올리며 젓가락질을 시작했던 대현이 얼마 가지 못해 손을 멈췄다.

“……맛없어?”

“……네?”

“잘 못 먹는 것 같아서.”

“아…….”

컵라면을 먹으려는 게 배고파서인 줄 알았는데. 윤성의 굼뜬 젓가락질을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서였다. 의욕 없는 젓가락질을 보다 못해 나간 질문에 윤성이 다소 놀란 눈빛을 하는 게 보였다. 제 컵라면을 내려다보며 눈을 느리게 깜빡이는 얼굴을 보던 대현은 참을성 있게 대답을 기다렸다.

“…….”

“…….”

먹는 것까지 멈추고 젓가락까지 내려놓은 채 빤히 바라보는 대현에 윤성은 당황한 눈치였다. 눈을 피해보기도 하고, 젓가락질을 하는 척도 해봤지만 제 얼굴로 쏟아지는 시선은 대답을 듣기 전까지 떨어져 나갈 기세가 아니라 그도 결국 어색하게 이어나가던 젓가락질을 멈추고 대현을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별로…… 안 좋아해요. 원래.”

이제는 그럼 왜 라면을 먹으려 했냐는 듯한 눈빛이 돌아왔다.

“아…… 이것도 안 먹으면 오늘 한 끼도 안 먹는 거니까…….”

그를 읽어내고는 어색하게 답하던 윤성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매니저 형들도 오늘 안 오신다고 하셨으니까.”

“아…….”

“배고픈 건 싫어서요.”

뱉는 본인은 별 생각 없어 보였으나 듣는 대현은 씁쓸했다. 며칠간 방에만 있어 확신은 못 하지만, 숙소를 지키는 건 거의 윤성과 자신이었다. 매니저들이 밥을 사 와서 건넬 때마다 옆에서 같이 음식을 받아가던 윤성을 떠올린 대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라면을 들고 나와 대충 끼니를 때울 생각을 한 그가 왜 이렇게 안쓰럽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다. 아까 본 마른 뒷모습이 같이 떠올라서 더 그랬다. 윤성은 개인 스케줄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멤버들이 나가고 챙겨줄 매니저도 없이 숙소에 혼자 남아 있을 때마다, 이렇게 라면으로 대충 때우곤 했을 그의 모습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윤성은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제가 알기로 연습생 생활을 중학생 때부터 시작한 그에게 세상은 아직 겪어본 것보다 겪어보지 않은 것이 더 많은 곳일 것이다. 생활 반경이 연습실과 숙소로 제한되어 있던 소년이 아무도 저를 챙겨주지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기라도 했을까. 그러고 보니 컵라면도 딱 제 나이다운 끼니 해결법이었다.

결심한 대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덧 그는 윤성의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고 있었다. 요 며칠 그를 몰아치던 이성 대신 감성이 뭉근하게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뭐 좋아하는데……?”

“네?”

“음식 말야.”

제가 적어도 윤성을 삼 년 이상 보아온 리더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건 까마득히 잊기라도 한 것처럼 대현이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에 눈에 띄게 당황한 낯을 하는 윤성이 보였지만 이미 마음을 굳게 먹은 대현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어느덧 그의 머릿속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요리 중 윤성이 좋아할 만할 게 있을까란 생각밖에 없었다.

“해줄게, 내가.”

대답하지 못하는 윤성이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한 듯, 덧붙이는 얼굴이 자못 결연하기까지 했다.

“진수 형 알면 화낼 거 같은데…….”

그러면서 신발을 야무지게도 신고 있다. 걱정이 묻어나는 말투와 달리 문턱에 앉아 운동화를 꿰어 신는 윤성은 어딘가 신나 보이기까지 했다. 이제야 좀 제 나이 같이 보이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대현이 방에서 챙겨온 모자를 윤성 쪽으로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윤성이 모자를 한 번, 대현을 한 번 번갈아 본다.

“왜. 색이 맘에 안 들어? 이거 쓸래?”

“아뇨, 아뇨. 그게 아니라…….”

“응.”

“형 물건 같이 쓰는 거 싫어하시잖아요. 써도 되나 싶어서…….”

건넨 모자가 마음에 안 드는 줄 알고 제 모자를 벗어 건네려던 대현에게 윤성이 눈치를 보며 한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자동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린 대현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다시 모자를 제 쪽으로 건네려는 윤성을 본 대현이 결국 손을 뻗어 모자를 건네받았다. 그리고는 윤성의 머리 위에 씌웠다.

“어…… 형.”

“남도 아니고 뭐 어때.”

“아…….”

“예쁘다.”

옆머리를 정리해 주고는 모자 위를 가볍게 두드린 대현이 한 말에 윤성이 시선을 떨어뜨리며 모자챙을 만지작거렸다. 윤성이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머니에 지갑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대현은 이미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