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김 식이 내 사무실로 먼저 찾아오는 것도 보고.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안 그래?”
대현과 식을 흥미롭다는 눈으로 번갈아 보던 대표의 말에 식이 멈칫했다. 결국 몸을 다 일으킨 대현을 확인한 그가 몸을 돌렸다. 대표를 마주보는 눈빛이 자못 사나웠다. 옆에 있던 대현이 자신도 모르게 만류하려 손을 뻗을 정도로.
“리더 찾으러 온 거에요.”
“…….”
“대표님 뵈러 온 게 아니라.”
‘리더’라는 글자에 힘주어 뱉은 말을 끝으로 식이 대현의 팔을 끌었다.
“삼 개월.”
사무실을 가른 한 마디에 식과 대현 모두 멈춰 섰다. 둘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뒤를 향했다. 바로 마주쳐 오는 눈에서는 여전히 읽을 수 있는 게 없었다.
“보류해 줄게. 대신 지원은 없을 거야.”
방금 저 입에서 나온 말이 해체를 미뤄준다는 말이 맞을까. 해체까지 삼 개월을 벌었다는 말이 맞을까. 비록 지원은 없다고 했지만, 그래도. 그래도……! 대현의 심장이 아까와는 다른 흥분을 안고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뒤돌던 대표가 자리에 다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이윽고 그가 눈을 휘었다.
“아, 그리고 김 식. 넌 나머지 애들한테 잘 전해.”
“…….”
“리더가 무릎 꿇어서 받은 삼 개월이니까.”
“…….”
“어렵게 얻어낸 기회 다시 땅바닥에 처박지 말라고.”
말을 끝맺는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고개를 돌려 식의 표정을 확인한 대현이 멈칫했다. 만나고 난 이후 내리 무표정하던 얼굴이 여태와는 다른 빛으로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무서울 정도로 말이다.
“이게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뒤늦게 달려온 매니저는 대현에게서 대충 자초지종을 들은 후 저 말만을 중얼거렸다. 지하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도, 숙소까지 대현과 식을 데려다주는 길에서도 그랬다.
처음에야 눈치를 보던 대현도 이제는 그에 반응하기를 포기했다. 처음에야 반쯤 넋이 나가 보이는 그에게서 핸들을 뺏어야 하는 거 아닐까 걱정했지만, 뺏은 다음 상황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서 막혔기에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뭐, 설마 사고야 나겠어. 나름의 합리화를 마친 대현이 한숨을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걱정 하나를 어렵사리 묻어두자마자 찾아온 얼굴은 제가 미뤄둔 걱정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했지만.
“…….”
“…….”
딱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무시하고는 있었다지만, 밴에 탄 직후부터 떨어질 기세가 없는 식의 시선은 확실히 마주하기 어려운 데가 있었다. 대현은 아무것도 눈치 못 챈 것처럼 밖을 응시했다.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더욱 필사적으로 밖을 쳐다보는 척을 하고 있던 대현이 차가 느려지는 걸 느끼고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 보니 밖의 풍경이 익숙한 것도 같았다. 겨우 이틀 됐으면서 익숙해지다니. 씁쓸한 미소를 지은 대현이 성호의 등을 흘긋거렸다.
“……뭐야.”
황당함이 가득 묻어나는 성호의 말에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리던 대현이 경악했다. 대현보다 이런 상황이 익숙할 식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피곤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대현은 눈앞의 풍경을 그처럼 받아넘길 수가 없었다. 아파트 앞이 어제의 여고생들 무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바글바글했다. 밴을 봤는지 밴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그들에 대현이 어깨를 떨었다. 어제 저를 둘러싸고 혼을 쏙 빼놓던 그들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안 되겠다. 너네 일단 내리지 말고, 차 안에 있어. 좀 정리되면 부를 테니까.”
다행히도 오는 내내 정신이 팔려 있던 매니저는 눈앞의 풍경에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질린 표정을 하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 그가 시동을 급하게 껐다. 통화 소리를 들으니 다른 매니저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근데 그건 그렇고.
“…….”
“…….”
이 어색함은 어쩐다. 눈을 또르르 굴리던 대현이 마지막 보루로 남겨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건드렸을 때였다.
“왜 그랬어요.”
식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덕분에 불이 들어온 화면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대현이 칠흑같이 검은 눈에 멈칫했다. 아까의 일렁거림은 어디 가고 가라앉은 눈이 대현의 눈을 빈틈없이 마주해 온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모르겠다구요.”
“……어.”
짐작 가는 건 있었지만 그 행위랑 이렇게 저에게 화를 내는 식의 행위를 연관 지을 수는 없었다. 사실 왜 그랬냐고 묻고 싶은 건 대현이기도 했다. 어제부터 저에게 보인 태도라고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던 사람이 갑자기 사무실에 찾아와 리더를 찾으러 왔니 뭐니 이야기하질 않나, 저를 일으키질 않나. 물론 제가 식의 입장이라고 생각해 봐도, 사이가 좋든 안 좋든 팀 리더가 대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으면 좋은 기분일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어제부터 보인 태도를 봤을 때 그런 적극적인 만류를 할 사람이라고도 생각이 되지 않았다.
“무책임한 건 알았대도.”
“…….”
“이렇게 무모하기까지 한 줄은 몰랐네요.”
그래, 이제 좀 익숙하다. 그제야 어제 오늘 보아온 식 같았다. 어느덧 익숙해진 가시 가득한 말에 대현이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떨궜다. 이제는 대답도 바라지 않는지 아까의 저처럼 밖을 바라보는 옆모습을 외면한 대현이 통통 두드리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니저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얼굴이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문을 열려고 움직이던 대현이 멈칫했다. 어느덧 옆으로 다가와 먼저 문을 열고 나가 버리는 뒤통수에 시선이 꽂혔다. 느끼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린 머스크 향을 애써 털어내며 대현이 밴 밖으로 나섰다. 이제야 정오를 좀 넘긴 시각이건만, 벌써부터 피곤했다. 긴 하루가 될 것 같다.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던 대현이 짧은 한숨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치만 긴 하루가 이런 식으로 격렬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다. 얼얼한 뺨을 감싼 대현은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우람……!”
들어오자마자 날아온 주먹에 나뒹군 대현 앞에 선 자만 넷이었다. 빠르게 제 앞의 얼굴들을 훑은 대현이 쓰러진 몸을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혀는 안 깨물었지만, 볼 안의 살은 살짝 깨물었는지 약간의 피 맛이 느껴졌다. 덩달아 입가도 터진 듯했다. 슬쩍 만져 본 입술에서 피가 묻어났다.
“일어나.”
“…….”
“일어나라고, 새끼야.”
팔을 뒤에서 결박한 매니저의 불호령은 들리지도 않는지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한우람은 누가 봐도 흥분해 있었다.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윤성이나, 소파에 앉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은호, 그리고 우람을 말리면서도 제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는 진수라는 매니저의 얼굴에서 대충 분위기가 읽혔다. 회사를 떠나지 몇 분 되지도 않았건만, 소문은 생각보다 더 빨랐고 그건 숙소 안에 있던 자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대략의 사정을 들은 게 틀림없었다.
……뭐, 어쩌면 다행인 건가. 제 입으로 전하는 것보다 나은 거일 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에 선 사람들과 다르게 그의 뒤에 섰던 식이 그제야 손을 뻗어 현관문을 닫는 게 보였다.
쾅. 띠리릭. 문이 잠기는 소리까지 나자, 거실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여전히 씩씩대고 있는 우람을 비롯해 모두의 시선이 대현을 향하고 있었다.
“다 때린 거야?”
신발을 벗기도 전에 주먹부터 맞았다. 그렇기에 숙소에 들어선 대현이 처음 꺼낼 수 있었던 말이었다.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거실의 공기가 무섭도록 얼어붙었다. 우람이 이를 악물며 매니저에게 잡혔던 팔을 풀어내는 게 보였다. 바로 주먹을 휘두를 거라고 생각해 나름의 준비를 하고 있던 대현이 무색하게, 대현에게 다가온 그는 오히려 대현의 얼굴 가까이에서 거친 숨을 뱉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너…….”
“더 때릴 거면 말해. 준비라도 하게.”
차분하게 한 번 더 묻는 대현을 바라보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넌 이게…….”
“…….”
“장난 같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