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상입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여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끔찍하리만치 긴 시간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손목시계는 겨우 삼십분이 흘렀음을 알려주었다. 삼십분. 플러그가 삼 년간 쌓아온 그룹으로서의 실적을 완전히 들어내고 조각내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단 삼십분이면 되는 거였다. 탁자 밑으로 쥐고 있던 대현의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깊게 팼다.
그의 머리 위로 마구잡이로 쏟아지는 시선은 마치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난도질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듯했다.
“…….”
회의실을 가득 채운 사람들은 플러그가 그래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그룹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들의 입에서 굴려지는 플러그는 상품성을 잃은 상품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실을 마주하는 게 이렇게 폐부를 찔러올 만큼 고통스러울지 몰랐어서, 대현은 멍했다.
문득 지후가 생각났다. 몸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가 이 자리에서 이 이야기들을 듣고 있었을 터였다. 리더를 맡고 있었기에 해체 소식도 멤버들보다는 더 빨리 접했을 지후는 이 자리에서도 그렇게 의연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어제 헤어지기 전 마주했던 지후의 눈빛을 떠올리던 대현이 고개를 저으며 욕을 삼켰다.
다행이었다. 몸이 바뀐 후 처음으로 대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어서 다행이다. 플러그의 리더 대신 팬인 자신이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대신 보낼 수 있어서. 지극히 팬다운 생각이었지만 그런 자신을 비웃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했고 이 자리의 유일한 해체의 당사자인 지후를 가장자리로 몰고 있었다. 그 대상이 아닌 자신마저도 이렇게 숨이 막힐 것 같은데, 당사자인 그가 이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괴로웠을까.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문 대현이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래서.”
표정을 정리하지 못했음에도 대현은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다. 여자의 프레젠테이션이 끝난 후 회의실에 가득하던 정적을 깬 이가 상석에 앉은 그이므로. 그리고 그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그 질문이 향하는 곳이 대현이라는 뜻이었다.
“동의해?”
무슨 말이냐고 물을 필요 없게끔 질문의 내용을 덧붙이는 그는 친절했다. 마치 사형수에게 마지막을 앞두고 베푸는 왕의 자비라도 흉내 내는 것처럼
어제의 대화가 생각났다.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냐는 자신의 물음에 한 박자 늦게 돌아온 대답. 긍정의 말을 뱉어내는 그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렇지만 엉거주춤 결론을 내고 헤어진 후 돌아온 대현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후의 지친 표정과 그의 대답에서 읽어낸 미련이라는 감정을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어서. 하지만 괜찮을 거라고 자위했다. 리더가 하지 못하는 일을 일반인인 자신이 어떻게 하겠냐고. 애초에 자신이 그럴 자격이 되기나 하겠냐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오늘 그를 몰아세우는 이 모든 것들은 자꾸만 물음표를 달게 한다.
“대답이 없는 건 동의한다는 뜻인가.”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알았어.”
“…….”
“그럼 문제없네. 진행해.”
플러그의 끝이 이렇게까지는 비참하지는 않을 수 있게. 삼 년간 일한 곳에서 갈기갈기 해부되어 버려지는 꼴이 아닐 수 있게 할 수 있을까.
“한 실장이랑 진 팀장은 잠깐 내 사무실로 좀 올라오고.”
이지후가 해체를 막기 위해 했던 행동들 중.
“해산해, 다들.”
그가 아닌 나여서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아는 게 너무 많고, 엮인 사람들도 너무 많기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는 리더가 아닌, 그들 말고는 눈에 보이는 게 없는 팬인 나라서. 이지후가 아닌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하나둘 자리를 떠나는 직원들이 고개를 숙인 채 앉아 있는 대현을 힐끔거렸다. 탁자 맨 끝에 앉은 어려 보이는 직원 한 명만 회의실에 남아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가 되서야, 대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보폭을 넓혀 세 걸음 만에 회의실을 빠져 나왔다. 그의 걸음에는 점차 속도가 빨라져서 비상구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어야 할 정도였다. 비상구로 향하는 문을 닫고 주저앉은 그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열한 자리 숫자를 누르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두 번의 신호음 만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 번만 물어볼게.”
[뭐라는 거야 갑자기. 회의는 끝났어?]
“네가 아니라 하면 다시는 안 물어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야.”
[……너 지금 어딘데.]
“이렇게 끝내고 싶어?”
[…….]
“이게 네가 생각한 플러그의 끝이냐고 물었어.”
밭은 숨을 몰아쉬던 대현은 지후를 기다릴 인내심도 잃은 사람처럼 또 말을 이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아니니까 너도 해체하기 싫다고 소원 빈 거 아냐.”
[…….]
“내 말 맞잖아.”
[……정대현.]
“아니다. 맞다고 하지 마. 그러면 나 진짜 미쳐 버릴 거 같으니까.”
[…….]
“방금 회의 끝났어. 회의 내내 걔들이 뭐라 했는지 알아? 너네 보고…… 뭐라는 줄 알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그는 이제 거의 핸드폰에 대고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한 마디도 내놓지 못했던 회의실 안에서의 순간을 만회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끝났대…… 앨범 판매량도 후배들한테 밀리고, 화제성도 없고, 그룹으로서의 메리트는 하나도 안 남았대!”
[…….]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말해…….”
[…….]
“그래도 리더라는 놈이 형식상 앉아라도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끝을 모르고 커지던 음량은 결국 잦아들었고, 대현은 온몸의 힘을 쭉 뺀 채 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 동안에도 지후는 말이 없었다. 가끔 들려오는 한숨과 숨소리만이 그가 듣고 있다는 걸 증명할 뿐이었다.
[정대현.]
대현의 가슴팍의 오르내리는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그가 안정적인 숨소리를 내놓을 때가 되어서야 지후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예상하지 못한 사과에 대현이 숨을 죽였다.
[너한테 못할 짓 했네, 나.]
“…….”
[마지막까지 그럴 줄은 몰랐어. 그 정도로…… 할 줄은.]
“…….”
[알았으면 가지 말라고 했을 거야. 아프다고 핑계를 대든, 뭘 하든.]
한숨이 묻은 말은 씁쓸했고, 또 그만큼 진심이어서 대현의 심장을 더 아프게 했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아까 회의실에서 느꼈던 게 정말 심장을 찢어놓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건 마치 심장을 다시 살리기 위한 전기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생소한 느낌에 미간을 찡그리던 대현이 황급히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그제야 자신이 왜 전화를 걸었는지가 떠올랐다.
“너 아직 대답 안 했어.”
[…….]
“이런 게 네가 바라던 끝이냐고, 내가 물었잖아.”
[……그게 중요해?]
가라앉은 목소리에 묻은 절망감을 눈치챘으면서도 대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짧았지만,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담기에는 충분했다. 지후에게도 느껴졌는지 그는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재촉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던 대현은 점점 차분해지는 얼굴과는 달리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회의실에서 고통스러울 때마다 손을 꽉 쥐었던 탓에 손바닥 가득 남은 손톱자국을 가만히 쓸어보던 대현이 지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니야. 내가 바라던 끝. 좋은 결말일 거라고까지는 생각 안 해봤지만,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끝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아니라고…….”
[그래. 그치만 지금 와서 이 이야길 해봤자 바꿀 수 있는 건 없어. 더 이상 중요하지도 않은 문제고.]
“……아냐. 중요해.”
[뭐?]
“중요하다고. 방금 네 대답.”
대현이 허공을 응시했다. 그의 눈에 초점이 잡혔다.
“네가 아니라고 말한 순간부터”
[너 지금 무슨 말을…….]
“난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야.]
“해체를 막기 위해서라면.”
그게 뭐든지.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읊조리던 대현이 대답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시켰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던 대현이 멈칫했다. 그의 손 안에서 진동을 이어나가는 핸드폰 화면 위에 뜬 번호가 익숙했다. 지후가 건 전화가 분명함에도 대현은 홀드 버튼을 눌러 핸드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눈을 감고 차분하게 숨을 내쉰 그가 복도로 나서자마자 발견한 사람에 걸음 속도를 늦췄다.
“이지후! 너 어디 있었어! 얼마나 찾았는 줄 알아?”
아침에 그를 데려다 준 성호라는 매니저, 그리고 식이었다.
벽에 기대 폰을 툭툭 건드리고 있는 무표정한 식을 잠깐 응시하던 대현이 고개를 돌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매니저는 진이 빠진 얼굴이었다. 회의실을 갑자기 나가 없어진 자신을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물론 거기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평소보다 두 배는 부은 얼굴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서 느낀 불안감도 함께 작용했을 거고.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돌발행동을 했을까 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한 매니저를 보던 대현이 잔소리처럼 이어지는 말을 끊으며 고개를 돌렸다.
“형. 대표님 사무실이 어디죠.”
“……뭐? 너 갑자기 그건 왜”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말을 끝내자마자 더 파리하게 질린 매니저가 팔에 달라붙든 말든, 대현의 시선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자신을 응시하는 식을 향하고 있었다. 무표정하던 얼굴이 흐려지고, 미간을 살짝 모은 식을 마주하던 대현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주어 말을 끝냈다.
“지금 당장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