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최애와 거리두기-3화 (3/119)
  • 3화

    “내 지갑 가져왔지.”

    “어? 어, 이거…….”

    아침에 혼비백산해서 뛰쳐나오면서도 지갑 비스무리한 걸 챙겼던 걸 떠올린 대현이 후드 주머니에 든 지갑을 꺼내 지후에게 건넸다. 잠시 지갑을 내려다본 지후가 손을 뻗어 받는 대신 생뚱맞은 소리를 했다.

    “그래. 그럼 일단 택시 타고 숙소 가. 택시비는 지갑에 있는 돈으로 계산하고.”

    “뭐? 숙소? 내가 왜?”

    “……그럼 내가 가냐?

    상황 설명도 없이 등을 떠미는 지후에 왜냐는 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고개를 슬쩍 돌려 확인한 얼굴은 제가 멍청한 질문을 했던가 하는 의문이 들게끔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말에 따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말하는 숙소란 건 플러그의 숙소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숙소를 간단 말인가. 외부인이나 다름없는 제가 숙소에 간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다. 가면 멤버들은 물론이고 모르는 외부인만 득실득실할 텐데.

    “아니 그래도 이렇게 무작정 가면! 대화만 해봐도 이상한 거 알아볼 텐데…….”

    “누가?”

    “어……?”

    “어차피 오늘 스케줄도 없으니까 매니저 형은 숙소에 들어온 것만 확인하면 별 말 없을 거고.”

    “멤버들도 있잖아.”

    “……너 우리 팬 맞냐?”

    “어?”

    대현이 무슨 말을 하든 등을 꿋꿋이 밀던 지후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갑자기 멈춘 움직임에 돌아본 대현이 움찔했다. 지후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 있었다. 코웃음까지 친 얼굴이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가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관심도 없어 걔네. 내가 들어오든 말든.”

    그 말을 끝으로 야, 얼른 신발이나 신어, 라며 신발장에 기대어 선 얼굴은 제가 방금 한 말이 그의 팬에게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깨닫지도 못한 듯 무심했다. 대현이 얼떨결에 신발을 꿰어 신는 동안 감시하듯 신발장에 기대어 지켜보던 지후는 대현이 신발을 다 신은 걸 확인하자마자 문을 열어 대현의 등을 한 번 더 밀었다.

    “일단 가 있고, 연락할 테니까 폰 확인 잘 해. 너 숙소 주소는 아냐? 아니다, 됐다. 문자로 보내줄게.”

    “아니 그래도!”

    “뭐. 그럼 어쩌자고. 여기 있는다고 답 나올 것 같아?”

    “…….”

    “가 얼른. 매니저 형 지랄하기 전에.”

    쾅.

    대현이 상황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억울한 표정으로 번호키로 뻗으려던 손이 멈칫했다.

    다른 손에 들린 폰에서 또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발신자는 여전히 같았다. 슬슬 무섭게까지 느껴지는 세 글자를 보며 대현이 중얼거렸다.

    “돌겠네, 진짜…….”

    이 주소 맞겠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혼비백산해 뛰쳐나왔던 곳 앞에 다시 선 대현의 입에서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만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까 지후가 했던 말처럼 계속 이렇게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차마 받지는 못했다지만, 매니저일 게 분명한 ‘진수 형’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벌써 네 통이었다. 택시에서 지후가 보내줬던 문자에 적힌 주소를 한 번 더 확인한 대현이 발을 뗐다.

    “진짜 높다…….”

    고개를 꺾어야 할 만큼 높은 아파트를 질린 눈으로 살피던 대현이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걸음을 떼려 할 때였다.

    “야, 쟤 이지후 아니야?”

    “맞는 것 같은데?”

    “웬일로 이 시간에 나와 있지 쟤가.”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던 대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멀지 않은 곳에서 몰려서 대현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몇 명은 입구 계단에 앉아서, 또 몇 명은 서서 주위를 살피는 폼이 한두 번 해본 느낌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사생이었다. 말로만 들었던 이유는 데뷔 때부터 팬 활동을 해왔던 대현이 그들을 자신과 다른 부류라고 여기며 배척했기 때문이었다. 당장이라도 다가올 것처럼 몸을 일으키는 그들을 확인한 대현이 후드에 달린 모자티를 더 깊게 눌러쓰며 걸음을 빨리했다.

    물론, 그들이 지키고 선 게 대현이 들어가야 할 플러그의 숙소인 이상 별 소용은 없는 일이었다.

    “오빠, 어디 다녀와요?”

    “아까 나가는 거 못 봤는데 대박!”

    “오빠, 윤성이는 오늘 밖에 안 나와요?”

    “식이 오빠는 촬영 나갔어요?”

    “저 아침부터 기다렸는데 마스크 좀 내려주시면 안 돼요?”

    “오빠!”

    겨우 후드를 둘러썼다 해서 그들이 지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지후임을 확신했는지 빠르게 다가와 저를 둘러싸기 시작한 무리에 대현이 뒤로 걸음을 물렸다. 팔, 어깨를 잡는 손길들이 거침없었다. 조심스럽게 팔을 떼려고 해도 그럴수록 더 팔을 강하게 붙드는 손길에 눈앞이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앞머리가 땀으로 젖어가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되지. 머리가 작동을 멈춰 버린 것 같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아챘다. 순간 휘청한 대현이 뒤돌아보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뒤에서 그를 어깨를 낚아챈 누군가가 이미 대현을 질질 끌고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현의 팔에 붙어 있던 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고 그들의 아쉬움 담긴 외침이 곧 탄성 비스무리한 걸로 바뀌기 시작했을 때, 대현은 어느덧 아파트 현관을 지나 복도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어…….”

    번갯불에 콩 볶듯 지나간 일을 돌이켜볼 즈음에는, 대현의 어깨를 단단히 결박하고 있던 손이 떨어져 나간 후였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눈으로 좇던 대현이 황급히 뒤돌았다. 유리문 너머로 제 덩치의 두 배는 될 법한 남자가 방금 전까지도 저를 둘러싸고 있던 여고생 무리들 앞에 서 있었다. 양손을 허리에 얹고 호통을 치는 얼굴이 험악했다.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현관에서 물러나는 사생들이 보였다. 상황을 이해한 대현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나왔다. 방금 전 누군가 제 어깨에 손을 둘러 현관 안으로 넣어준 동안, 저 덩치 큰 사람이 사생들을 상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조금씩 맞추어지는 듯한 정황에 이해를 마친 대현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자신을 그 무리로부터 떼어놓았던 남자의 뒷모습이 한참이나 멀어진 후였다. 깜짝 놀란 대현이 속도를 내어 얼른 그 뒤를 따랐다.

    띵.

    뒤에 따라오는 대현은 안중에도 없는 듯 꽤 긴 복도를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앞서 걸어가는 뒤통수가 어딘가 익숙했다.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는 남자의 행동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아까 대현을 사생 사이에서 빼오던 그때처럼 말이다.

    “뭐 해요.”

    “어? 어. 타, 타려고 했어.”

    하품을 하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선 얼굴이 무료함에 젖어 있었다. 흑발 사이로 보이는 까만 눈동자가 대현을 짧게 훑었다. 식이었다. 김 식. 플러그의 멤버이자 동시에 배우이기도 한 그가 자신의 옆에 있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 말고는 플러그의 멤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었다.

    빤히 쳐다보고 싶은 욕구를 애써 억누르며 대현이 삐그덕 소리가 날 정도로 어색하게 몸을 움직여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히자마자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숫자를 바라보던 대현이 침을 꿀꺽 삼켰다. 티 안 나게 고개를 살짝 돌리자마자 머리를 쓸어 넘기는 식과 눈이 마주쳤다. 검은 눈이 두어 번 깜빡인다 싶더니 이내 대현의 시선을 비껴갔다.

    그니까,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이다. 눈을 피한 것도 아니고 그냥 무시했다. 구해준 이가 식임을 확인하고 대현의 얼굴에 떠오르기 시작했던 흥분이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

    “…….”

    불편한 침묵이었다.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는 대현의 머리 위로 띵 소리가 울렸다. 도착했다는 알림음이었다. 19층. 아까 지후가 알려준 층수에 맞춰 멈춰 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식이 내렸다. 아까는 기다려 주기라도 했지, 이번에는 그런 것조차 없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대현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관심도 없어 걔네. 내가 들어오든 말든.’

    지후의 코웃음 서린 말이 귓가를 울렸다.

    “아…….”

    입맛이 썼다. 아직 보지 못한 멤버가 세 명이나 더 있었으나, 이보다 나을 것 같지 않다는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현의 그러한 직감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 편이었다.

    산 넘어 산이다. 애써 정신을 수습한 대현이 빠르게 식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었으나 닫힌 문만이 그를 반길 뿐이었다. 오늘만 해도 벌써 몇 번째로 보는 것 같은 디지털 도어락에 대현이 한숨을 쉬며 이마를 긁었다. 그의 손끝이 손에 쥔 핸드폰의 가장자리를 초조하게 두드렸다. 도어락을 마주하자마자 지후에게 문자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직 답장은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엄밀히 따지자면 집주인인 사람을 집에서 쫓아내며 연락 잘 받으라고 요청한 거치고는 상당히 느린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문 옆의 벽에 기대선 대현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띵.

    마찬가지로 오늘 숱하게 듣는 듯한 엘리베이터 도착음과 함께 내린 거구의 사내가 대현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문 앞에 선 대현을 본 그가 이마를 찌푸렸다. 각진 얼굴이 만들어내는 그늘에서 위압감을 느낀 대현이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