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105화 (105/106)

105

7. 광기가 때론 신앙을 만든다

“블람의 사도가 적을 앞두고 도망가면 쓰나.”

데미안은 품행이 올바르지 않고 못된 짓을 일삼는데 심지어 힘과 권력까지 지녔으니 그냥 양아치가 아니라 폭군이었다. 그는 장군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내버려 두는 대신 반대로 그쪽으로 끌어들였다.

“오라, 강렬한 전의여.”

데미안이 온 피부를 찬란한 빛으로 물들인 채 나지막이 말하자, 잽싸게 도망가던 장군들이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가 된 것처럼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말의 힘!

미카엘은 서늘하게 식은 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릇된 자비가 죄를 이끌어내니 결코 용서란 없다!”

데미안이 도발하듯 기세등등하게 외치자, 이성을 잃은 장군들이 갑자기 그에게 미친 듯이 덤벼들었다. 마구잡이로 덤벼드는 통에 서로 부딪혀서 나자빠지고 같은 장군끼리 밀쳐내고 들이박고 아주 아비규환이었다.

수백 명의 장군이 인간 공이 된 것처럼 데미안을 위아래로, 좌우로 빽빽이 에워싸자, 미카엘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나무 뒤로.”

알 수 없는 괴성 속에서도 데미안의 낮은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고집을 피워 따라온 거니 적어도 그의 발목을 잡진 말아야 했다. 미카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이를 괜히 걱정하면서 자리를 지키는 대신 그 한 몸이나 챙겼다.

팍! 파악!

안절부절못하던 미카엘이 뽀르르 나무 뒤로 숨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려왔다.

후두둑.

형체를 알 수 없는 붉은 살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아, 이래서 피하라는 거였구나.’

그사이 몸을 정화했는지 먼지 한 올 붙지 않은 사제복을 괜히 손으로 툭툭 털던 데미안이 뽀르르 달려오려는 미카엘을 한 손으로 막으며 피로 범벅이 된 아래를 가리켜 보이고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전과 마찬가지로 데미안은 피 웅덩이를 밟아도 신발조차 더러워지지 않았다.

나무 뒤에서 얼굴만 내밀고 있던 미카엘은 데미안이 깨끗한 곳까지 와 주자, 그제야 뽀르르 와서 그의 옆구리에 착 달라붙었다.

데미안은 난장판이 된 앞마당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건 따라 하지 않는 게 좋아. 성력을 너무 소모하거든.”

아니, 할 줄 알아야 따라 하죠.

미카엘은 속마음을 그대로 말하는 대신 웃으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데미안이 왜 가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없이 미소만 짓는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단 생각을 떠올렸다.

“방금 말의 힘으로 장군들이 강제로 공격하게 만드신 거죠?”

“응. 나히덴을 찾기도 전에 사형들에게 알려지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만 선생님이 사형들도 다 이길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미카엘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눈빛이 꼭 “아빠가 옆집 아빠보다 더 세다고 하셨잖아요?” 하고 묻는 어린 아들의 것처럼 보였다.

순결하게 살다 순결하게 죽어서는 아버지 노릇까지 하게 생겼지만, 모두 데미안의 업보니 어쩔 수 없었다. 왕과 왕비의 가장 귀한 보물을 훔쳐다가 그들이 찾지 못하게 지옥에 처박아 놓고는 시간이 지나자 백치가 되어 돌아온 그를 얼렁뚱땅 영혼의 짝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았던가.

데미안은 왕과 왕비 대신 자상한 아버지처럼,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미카엘의 머리를 부드러이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하지만 그자들이 나히덴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면 또 찾아다녀야 하잖아. 안 그래도 일곱 군데를 하나하나 다 뒤져 봐야 하는데…….”

데미안이 드넓은 선계를 둘러보며 한숨 쉬자, 미카엘이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나히덴이 있는 곳은 저쪽이에요.”

미카엘이 아홉 개의 섬 중 하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데미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지?”

“일전에 강한 영혼이 절 지켜보는 것 같다고 말씀드린 적 있잖아요.”

“그런데 나였지.”

“네. 선생님이었죠. 그런데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어서 그 뒤에 특정한 영혼을 식별할 순 없을까, 하고 혼자 여러모로 궁리해 봤거든요.”

“그게 가능하다고?”

데미안은 진한 눈썹을 위로 올렸다.

영혼의 크기가 변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그건 꼭 심장이 박동하는 것처럼 일정한 박자를 두고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한다. 단순히 크기 하나만으로 누굴 알아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 같은 크기를 지닌 영혼도 수두룩하니 말이다.

미카엘은 애써 들뜬 기색을 감춘 채 차분한 얼굴로 설명했다.

“네. 가능해요. 계속 불규칙하게 박동하는 게 아니라 5분 정도 간격을 두고 같은 박자가 반복되는 거더라구요. 그래서 선생님께서 주무시는 동안 영혼의 울림에 곡조를 붙여 봤어요.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요.”

아, 미카엘은 그림을 잘 그리진 못할지언정 노래는 정말 잘 불렀지. 왕과 왕비의 탄신일엔 그가 직접 작곡한 축가를 불러 준 적도 있었다. 그는 악기란 악기도 모두 잘 다루었다.

“혹시 다른 사람도 비슷한 박자일까 봐 나히덴이 왔을 때 그의 영혼도 재 봤는데 아주 달랐어요. 그의 것엔 곡조를 붙이진 않았지만, 이야기하면서 내내 손가락으로 박자를 재 본 데다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라 또렷하게 기억해요.”

말을 마친 미카엘이 턱을 치든 채 데미안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무척이나 뿌듯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의 눈엔 그 모습이 꼭 생쥐 따위를 잡아 와선 주인 앞에 내려놓고 자랑하는 의기양양한 집고양이로 보일 뿐이었다.

“개도 아닌데 사냥감을 추적할 줄 알다니. 똑똑하기도 하지.”

미카엘은 절 번쩍 안고 빙글빙글 도는 데미안을 내려다보면서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 하고 의심했다. 그래도 그가 기뻐 보였으므로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런데 왜 일곱 곳이죠? 블람의 제자는 아홉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데미안의 이정표를 자처한 미카엘이 오른손을 앞으로 쭉 내민 채 검지로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히덴의 거처와 첫째 사형인 아단의 거처를 제외한 거니까.”

머지않아 한 섬에 발을 디딘 데미안이 품에 안고 있던 미카엘을 도로 바닥에 내리며 말했다.

“전에 말했지 않나. 내가 멀리할 정도로 훌륭한 인격자라고. 아단은 삿된 일에 낄 만한 사람이 아니야.”

하지만 데미안은 자신에게 과한 시련을 내린 유리시아도, 자기 팔다리를 잘라 놓은 블람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기에 그 말이 왠지 신빙성 있게 들리진 않았다.

“그럼 나머지 사형들은요?”

“성질머리가 지랄 맞은 데다 욱하는 성미까지 지녀서 툭하면 다른 사람에게 욕하고 덤벼드는 미친놈들이지. 하지만 싸움 실력은 처참해서 늘 내 손에 벌레 같이 뒈지는 하찮은 것들이야. 얼굴로 날아드는 좆같은 바퀴벌레 비슷한 거라고 생각하면 돼. 아, 그리고 가진 거라곤 처먹은 나이밖에 없어서 자기보다 어린 사람만 보면 눈이 뒤집히는 정신병자들이니 그들이 뭐라고 짖어 대도 신경 쓰지 마라. 연공서열에 환장한 것들이라 너에게 무슨 시비를 걸지도 모르거든.”

“아단은 정말 훌륭한 사람인가 보네요.”

미카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히덴이 왜 자꾸 사형들 곁을 떠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아요.”

“그래도 사저 하나는 좀 정상이야. 그나마.”

“그나마, 군요.”

미카엘 덕분에 나히덴을 찾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우거진 산림 속에 덩그러니 지어진 단칸 건물을 발견하고는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회반죽을 발라 지은 듯한 밋밋한 회색 건물은 아름다운 정경을 해치는 유일한 요인이었다.

“천 살 형님!”

손바닥 두 짝만 갖다 대면 다 가려질 것 같은 좁다란 창문 밖으로 나히덴이 두 눈만 내놓은 채 반갑게 소리쳤다. 그 작은 창문에도 창살을 박아 놓은 꼴을 보니 나히덴의 사형들이 정말 막내에 집착하는 미친놈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 잠깐. 맞았어요?”

창문 앞에 선 미카엘이 붉은 자국이 남은 나히덴의 뺨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나히덴은 머쓱하게 웃으며 답할 따름이었다.

“괜찮아. 내가 사형들한테 대들어서 그냥 혼난 거야.”

“아니, 입술에 피가 맺혀 있는데 그게 어떻게 그냥 혼난 거예요! 세상에, 형이 어떻게 동생을 때릴 수가 있죠? 형이라면 당연히 동생에게 착한 말만 하고, 자기 몸처럼 아껴 주고, 자기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나눠 주고, 옳은 길로 인도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쟤 외동아들이야?

나히덴이 눈짓으로 말을 건네자, 데미안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창밖으로 손가락만 내민 나히덴은 그의 손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 내다가 갑자기 폭발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뭐야, 절세 미남! 이 웃기는…….”

“우리 미카엘이 수 놓은 거야.”

혹여나 나히덴이 엉성한 그림을 보고 놀릴까 봐 데미안이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어…… 웃긴다, 정말! 너무 귀엽고 깜찍해서 웃음이 다 나와!”

나히덴은 철이 없을지언정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허겁지겁 말의 방향을 돌렸다.

“솜씨가 정말 좋은데, 한 살? 이 생생한 민들레를 보고 있자니 이 한겨울에도 봄이 다 느껴질 정도야!”

“고양이예요.”

미카엘이 매섭게 노려보며 “고양이라고요.” 하고 강조하자, 나히덴은 데미안의 조개 친구가 되었다. 그는 조개껍데기 속으로 쏙 들어가듯 창문 밑으로 숨은 채 두 눈만 밖으로 내놓았다.

“선생님, 저게 그렇게 이상해요?”

눈썹이 아래로 내려온 미카엘이 처연한 얼굴로 묻자, 데미안이 얼른 그를 달래 주었다.

“아니야. 아주 귀엽고 예뻐. 나히덴이 예술적인 감각이 없어서 그래.”

“맞아, 한 살! 내가 촌스러운 사람이라 잘 몰라서 그래!”

나히덴이 덩달아 친구의 아기를, 아니, 어린 연인을 둥개둥개 달래 주었다. 미카엘은 두 사람을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지만, 어쨌든 삐쭉 나온 입술은 제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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