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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103화 (103/106)

103

7. 광기가 때론 신앙을 만든다

“네 눈엔 내가 그런 식으로 보였나? 그래서 날 두려워한 거였어?”

옆에서 들려온 저음에 미카엘이 퍼뜩 상체를 일으켰다. 그처럼 바닥에 누운 데미안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미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말하지 않았지? 처음엔…… 그래. 너나 나나 서로 경계하고 날을 세우느라 바빴으니 말을 못 했다고 치지. 그런데 왜 연인이 된 뒤에도 말하지 않았지?”

“전…….”

“우리에겐 2년이란 시간이 있었어. 무려 2년. 그런데 왜 나에게까지 숨긴 거야.”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든 데미안은 무척이나 착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미카엘이 자신에게 비밀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충격받은 듯했다.

미카엘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데미안의 눈치만 보았다.

‘그래! 왜 말을 안 했어, 쓸모없는 왕자 새끼야! 우리 데미안더러 성병 덩어리라는 둥 막말이나 하고. 나쁜 놈!’

덩달아 왕자에게 화를 내다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분노가 치밀어 오르니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할 말이 잔뜩 생겨났다.

“저는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몰랐는데 뭘 어떻게 말해요!”

“내 말은, 왜 생전에 말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걸 사후의 저한테 따지시면 어떻게 해요! 생전의 저한테 따지셔야죠!”

데미안은 할 말을 잃은 듯한 얼굴로 그저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 눈앞에 있는 이 미카엘 탓이 아니지. 하지만 너무 화가 나고 답답했다. 그런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그저 막연하게 그가 원망스러웠다.

“제가, 제가 그런 거 아니잖아요. 걔가 숨긴 거잖아요. 저 말고 생전의 걔가요.”

혹여 데미안이 자신을 미워하게 될까 봐 겁을 먹은 미카엘이 두 손으로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방어적인 태도로 말했다.

“난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억울하단 얼굴로 입술을 움찔거리던 미카엘은 그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자, 막무가내로 커다란 품속에 파고들었다.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말해. 내가 그런 거 아니잖아.”

데미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부드러운 금발을 쓰다듬었다.

“그래. 네가 잘못한 건 아니지.”

데미안은 두 눈을 내리감았다.

왕자를 초상화가 아닌 실물로 본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그리움과 후회로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어떻게 그리 자그맣고 어린 왕자에게 저열한 욕설을 퍼부었던 걸까.”

미카엘이 생전의 자신에게 화가 났던 것처럼 데미안 또한 생전의 자신에게 화가 난 듯했다.

“그렇게나 예쁘고 귀여운 애한테…….”

그 후회 어린 말을 들으면서 미카엘은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귀엽다는 말은 미카엘 전용인데 왜 왕자에게 갖다 붙이는 거지? 왜 굳이 왕자더러 작다는 말을 하지? 왕자는 열두 살이고 난 한살인데 왜 왕자더러 어리다고 그러지?

“나한테만 자그맣고 어리고 예쁘고 귀엽다고 해!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말 하지 마!”

미카엘은 속을 시끄럽게 하는 말을 참지 않았다. 그는 여차하면 물어뜯을 기세로 데미안을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억울함으로 가득한 푸른 눈동자 탓에 전혀 무섭진 않았다.

“그래. 너한테 한 말이잖아.”

데미안이 하얀 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달래듯이 말했다.

넌 누가 봐도 엄청나게 커다란데 양심이 있으면 작다는 말은 욕심내지 말아야지, 하고 말하지 않았던 건 미카엘이 자기가 크단 걸 은근히 신경 쓰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는 데미안의 품에 안길 때면 일부러 무릎을 굽히면서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곤 했다.

아, 그가 스무 살 때 딱 그 정도만 했지.

어쩌면 미카엘은 무의식중에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울면서 데미안에게 고백했던 그때로.

“나 말고 왕자한테 했잖아!”

새끼 고양이처럼 다루었다고 자기가 진짜로 새끼 고양인 줄 아는지 커다란 게 품 안에서 마구 앙탈을 부렸다.

“나는 그런 멍청하고 오만하고 자존심만 강한 애랑은 달라. 난 이상한 게 보이자마자 바로 선생님한테 말했을 거야.”

그래. 엄연히 말하면 이 미카엘은 그 미카엘과 다르다.

예민하고 불안증이 있고 결벽한 건 여전하지만, 데미안이 하도 응석을 받아준 탓에 지금의 미카엘은 약간 이기적이고 뻔뻔하고 엄살이 심했으니까.

만약 지금의 미카엘이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었다면 나 저런 게 보여서 너무 무섭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삑삑 울었을 거다. 내가 불안하지 않을 때까지 선생님이 계속 날 껴안고 머리 쓰다듬어 줘야 한다고 칼 든 강도처럼 굴었을 거다.

“그래.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죄인으로서 소멸할 영혼을 억지로 연명하게 했으니 죽어 가는 짐승을 주워서 데려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미카엘이 마음대로 돌아다니다가 문짝에 이마를 꿍 박든, 자기 혼자 놀다가 발톱이 부러지든 모두 데미안 책임이고, 모두 데미안 잘못이었다.

“그럼 머리 만져 주고, 안아 주고, 입맞춤해. 당신이 날 불안하게 했으니까.”

강도가 칼로 쿡쿡 찌르면서 애정을 요구하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해달라는 대로 해 주었다. 꼭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고 뺨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그래. 우리 미카엘만 자그맣고 어리고 예쁘고 귀엽지.”

갈취한 애정을 두 손 가득 쥐고 나서야 만족했는지 미카엘이 새침한 얼굴로 용서했다.

“다음에 또 그러시면 안 돼요.”

데미안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뭘 본 건데?”

두 사람이 애정 행각을 벌일 동안 가만히 기다리던 블람이 결국 참다못해 물었다.

뒤늦게 이곳이 블람의 침소라는 걸 떠올린 미카엘이 부끄러운 듯 발개진 뺨을 두 손으로 착 감쌌다. 열두 살의 미카엘이 했다면 참으로 귀여울 만한 짓이지만, 스물두 살의 미카엘이 하니…… 여전히 귀여웠다!

“예쁘기도 하지.”

수줍어하는 미카엘이 귀여워 죽겠는지 데미안이 품에 안고 연신 입술을 여기저기 눌러댔다. 입안에 넣고 데굴데굴 굴리면서 쪽쪽 빨고 싶은 걸 꾸욱 참는 듯한 모양새가 아주 볼만했다.

원래의 데미안을 알던 자들이라면 저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고 소리칠 만했다.

“아니, 그래서 뭘 봤느냐고.”

블람이 궁금하단 얼굴로 재차 물었다.

4천 살쯤 먹으면 눈앞에서 누가 껴안든 떡을 치든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평소 예뻐하던 신자가 뭘 하고 있나 내려다보았다가 그가 자위하거나 성관계를 맺거나 코 파는 모습 같은 걸 하도 보게 되어서 진작 수치심 같은 건 사라졌다.

미카엘의 중심부를 바라보며 ‘어? 저거 발기했네.’ 하고 생각하면서도 몸이 참 민감하구먼 하는 감상만이 떠오른단 게 그 증거였다. 그에 더 나아가 블람은 ‘999살 더 살았다고 저놈은 발기를 안 하네. 정력제라도 먹여야 하는 거 아니야?’ 하고 데미안의 아랫도리 사정까지 걱정했다.

자고로 남자는 어린 부인을 데리고 살려면 몸을 잘 가꿔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하루에 대여섯 번도 덤벼들던 남자가 일주일에 한두 번 반응할 정도로 시들해지면 어린 부인이 바람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마셔라.”

“예?”

빨리 정력을 회복해야지! 그래야 저게 도망가질 않지!

블람은 의아한 얼굴로 절 돌아보는 데미안의 손에 반강제로 신주를 쥐여 주며 눈짓을 보냈다. 그걸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데미안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나히덴을 구하러 온 두 사람이 왜 블람의 침소로 들어와 신주를 마시고 있는지, 그 사정을 말하자면 이야기가 좀 길었다.

***

“여기부턴 무릎 꿇고 들어가야 해.”

로다나교 사원에서 나온 두 사람은 담벼락을 죽 따라 10분쯤 걷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엔 데미안의 어깨가 빠듯하게 들어갈 만한 구멍이 나 있었다.

“멀쩡한 문을 놔두고 왜 하필 개구멍으로 들어가는 거죠?”

“문이 달라. 아까 거긴 일반인용, 여긴 영체용.”

네발로 기어야 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는 듯 미카엘이 떨떠름한 얼굴을 하는데 데미안이 돌연 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블람께선 어떻게 들어가시는지 궁금하지 않나?”

그 유의미한 웃음에서 정체 모를 사악한 기운을 느낀 미카엘이 냉큼 그에 동조했다.

“궁금해요.”

데미안은 왼손으로 제 오른손을 슥 훑더니 금빛으로 물든 오른 주먹으로 냅다 벽을 후려쳤다. 튼튼해 보이는 담장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슬쩍 머리만 숙여도 아무 문제 없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개구멍이 커졌다.

데미안이 성큼 안으로 들어서자, 미카엘이 그 뒤를 따르며 담장을 돌아보았다. 벽은 언제 무너졌냐는 듯 도로 원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멋지네요. 그런데 집에 돌아갈 때쯤엔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어요.”

미카엘이 집에 갈 때도 해 달라는 의미를 담아 말하자, 데미안이 짐짓 어쩔 수 없다는 듯 답했다.

“그렇다면 다시 알려주는 수밖에.”

사기를 칠 때만큼은 누구보다 손발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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