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102화 (102/106)

102

7. 광기가 때론 신앙을 만든다

씨, 뭐라고?

난생처음 저열한 욕설을 들은 미카엘이 두 손으로 귀를 가린 채 뒤로 주춤 물러섰다.

“왜 그러느냐, 아가?”

남자의 나지막한 저음을 들은 게 그 하나였는지 옥좌에 앉은 왕비가 새하얗게 질린 왕자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내려다보았다. 왕자는 두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다가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아, 이분이 너무 멋있게 웃으셔서 깜짝 놀랐어요!”

“입만 열면 거짓말이군.”

뭐라고?

미카엘이 고개를 옆으로 홱 틀었지만, 남자는 시치미를 뚝 뗀 얌전한 얼굴로 머리를 숙이고 있을 따름이었다.

어리석은 왕자 행세를 하고 있기에 뒤에서 그를 비웃는 사람이라면 이미 수도 없이 봤지만, 면전에 대고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난생처음 봤다.

태어난 지 12년밖에 안 됐으니 당연히 경험이 적을 수밖에 없지만, 오늘 하루에, 그것도 저 사람 하나 때문에 겪는 ‘난생처음’이 너무 많았다.

그것도 안 좋은 쪽으로.

“적당히.”

남자의 행실을 보다 못한 단장이 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남자보다 머리 두 개쯤은 작은 단장은 곱상한 얼굴에 체구도 호리호리했다.

어째서 사람들이 ‘그녀’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왕자는 마르세지 백작가의 둘째 아들이 실제로는 ‘아들’이 아니란 걸 한눈에 알아차렸다.

하기야 여자가 속바지가 아닌 일반 바지를 입고 갑주를 걸친 채 전쟁터에서 싸우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이들은 목울대도 없는 데다 손도 작고 고운 그가 설마 남자가 아닐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리라.

더군다나 그와 함께 다니는 남자가 이토록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이였으니 당연히 ‘그녀’는 관심 밖에 날 수밖에 없었다.

왕 또한 단장이 아닌 남자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던가.

“폐하, 제가 감히 한 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일어나서 고하라.”

하지만 왕자는 단장을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불길한 기운이 알현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도 그녀는 그에게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처럼 맑은 금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까.

단장은 몸을 바로 세우고는 머리를 깊이 숙였다가 들면서 말했다.

“마르세지 남작의 차남인 라파엘입니다. 왕자님께 검술 선생이 필요하신 거라면 미흡하나마 제가 대신하는 건 어떤지요?”

마르세지 가문은 명문가가 아닌지라 왕자는 그에 대해선 그리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이면 유리시아의 말씀을 옮긴 천사의 이름이니 아마 독실한 펠름교 신자일 거다.

자연스럽게 왕자는 바짝 힘이 들어갔던 눈가에서 힘을 뺐다.

“데미안은 이번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군법을 위반하고 위계질서를 흩트린 죄로 스물아홉 번이나 징계를 받았으며 현재도 자숙 기간이기에 왕성에 머물 동안 지하 감옥에 가둬 둘 예정이었습니다.”

단장이 한 손으로 데미안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그 순간 남자가 목줄과 입마개를 한 짐승처럼 보였다. 그는 여전히 흉흉한 눈초리로 왕자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단장이 퍽 능숙하게 남자를 통제하는지 더는 그가 소름 끼치도록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매일 서른다섯 대의 채찍도 맞아야 하니 그를 홀리브링어의 유일한 빛 곁에 둘 순 없습니다.”

“채찍으로 때리겠다고요?”

왕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형벌의 목적은 응보와 예방에 있다. 전자를 강화하기 위해선 더욱 가혹한 벌이 내려져야 하고 후자를 강화하기 위해선 죄인의 교화에 초점을 맞춰야만 한다.

왕자는 후자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또한 무거운 벌을 내리더라도 그 안에 신체적인 고문이나 정신적인 학대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 성안에서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하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굳은 얼굴을 한 왕자가 정색하며 말하자 단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왕자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 앞에 살포시 양 무릎을 꿇었다.

두 손으로 남자의 양 손등을 감싸 쥔 왕자는 강제로 손바닥을 마주하게 한 뒤 손끝을 꼬옥 손등 위에 붙이게 했다. 그런 뒤 세워져 있던 나머지 무릎을 마저 바닥에 꿇게 했다.

기도하는 자세였다.

“제가 참회하게 할게요. 이분…….”

솔직히 말해서 왕자는 눈앞에 있는 이 죄악 덩어리에 손끝 하나 갖다 대고 싶지 않았다.

“데미안이 참회할 수 있도록, 제가 도울게요.”

하지만 왕자는 죄인이라고 해서 구원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과 피해자에게 참회하고, 더 나아가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 이제 괜찮은 거죠?”

왕자가 왕과 왕비, 그리고 단장을 번갈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들은 모두 난처한 듯한 낯빛이었지만, 선하고 무구한 왕자에게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왕자는 흠칫 놀라서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가 도로 아래로 내렸다. 그는 가느다란 길을 전부 볼 수는 없었지만, 굵직한 길은 여러 갈래라도 볼 수 있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건 남자의 또 다른 미래였다.

남자는 금빛의 재갈을 입에 문 채 목에 굵직한 금빛 목줄을 차고 있었다. 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휘황찬란하고 영광된 형구(刑具)였다. 또한 여전히 흉흉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등에는 길고 커다란 금빛 날개를 질질 끌고 있었다.

대천사와 죄인, 그 중간쯤의 기괴한 모습이었다.

‘변화의 요인은…… 나인가.’

왕자는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틀어 바틴을 바라보았다.

바틴의 미래엔 신앙과 관련된 길이 없었다. 그래서 왕자는 처음부터 바틴은 믿음이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여 그를 포기했다.

하지만 성기사단이 압수했다는 이교의 성물, 블람 목각상을 만진 순간 바틴의 머리 위에 갑주를 걸친 금빛의 형상 같은 게 어리는 걸 봤다.

그제야 왕자는 처음 본 미래와는 또 다른 미래가 존재할지도 모른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바틴이지만, 어쩌면 그가 나중에 블람에게 귀의할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만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짝.

남자가 왕자의 손을 뿌리치자, 이번엔 근위대가 검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자에게 달려들기 전에 단장이 먼저 남자의 양 손목을 봉쇄한 뒤 그를 바닥에 강제로 찍어 눌렀다. 남자는 바닥에 얼굴을 박은 채였지만, 여전히 매서운 눈초리로 왕자를 노려보았다.

“보십시오. 데미안은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귀족들이 손바닥 뒤에 얼굴을 감춘 채 수군거렸다.

아마도 그들은 단장이 참다못해 남자를 제재한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왕자는 근위대가 그에게 손을 대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나선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남자가 그녀의 말엔 순순히 따르는 것처럼, 그녀 또한 남자를 보호하고 있었다.

‘연인 사이인가?’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약점이 있는 이는 다루기 쉬우니까.

“괜찮아요, 라파엘. 저는 데미안이 기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있을 거라 믿으니까요.”

단장이 제 뒷머리를 강하게 찍어 누를 때만 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남자, 아니, 데미안은 왕자가 부드러운 손길로 제 뺨을 쓰다듬자, 난폭한 들짐승처럼 발광하기 시작했다.

“저는 당신에게 검을 배울 거예요, 선생님. 그리고 매일 당신을 위해 기도할 거예요.”

하지만 왕자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닥에 짓눌린 금빛 날개를 퍼덕거리는 남자는 이제 왕자의 눈에 또 다른 가능성을 지닌 유리시아 신자로 보일 뿐이었으니까.

“반말하면서 이름을 불러 주세요.”

상황이 역전되었다.

왕자가 자기 머리 위에 있던 왕관을 벗어 살포시 머리 위에 씌워 주자, 데미안은 자애와 광기로 가득한 새파란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눈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당신 앞에선 왕자로 있고 싶은 게 아니니까요.”

평생 자기가 제일 미친놈인 줄만 알고 살았던 데미안이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난 순간이었다. 왕자는 그냥 미친놈이 아니라 강한 신념을 지닌 미친놈이었으니 말이다.

“제가 멱살을 끌고라도 천국에 데려가 드릴게요.”

천사처럼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을 보면서 데미안은 자기 인생이 좆같이 꼬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을 했다.

* * *

두 눈을 번쩍 뜨자마자, 미카엘은 속으로 생각했다.

‘와, 진짜로 미친 종교쟁이네.’

데미안을 돈벌이로 이용할 생각으로 가득했으면서 구원해 준다느니, 천국에 데려가 준다니.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이 아주 재수 없었다.

자기가 가장 똑똑하고 다 아는 척 구는 꼴도 밥맛이었다. 게다가 목적만 훌륭하다면 다라는 식으로 데미안의 자유를 빼앗은 것도 너무 화가 났다.

‘좆같은 애새끼…….’

어디에 화풀이할 수도 없어서 미카엘은 꽉 쥔 주먹으로 애먼 자기 배만 꿍꿍 때려댔다. 그러고도 분노가 가시지 않아서 발뒤꿈치로 바닥을 꿍꿍 찍어 대면서 자학에 가까운 난동을 부렸다.

과거로 돌아가서 왕자, 아니, 자기 자신을 세차게 후려치고 싶었다. 씨발 놈이라는 저열한 욕을 잔뜩 퍼부어 주고 싶었다.

불쌍한 데미안.

불쌍하고…… 미치도록 꼴리게 하는 데미안.

지난 1년간 데미안은 단 한 번도 미카엘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는 미카엘에게 언제나 부드럽고 달콤한 푸딩 같은 남자였으니까.

그런 그가 길들이지 않은 짐승처럼 날뛰는 걸 보고 있자니 절로 다리 사이에 열기가 모여들었다.

게다가 지하 감옥이라니.

데미안을 그곳에 가두고 싫다고 반항하는 걸 붙잡아 강간하는 상상을 하자, 미카엘의 양 볼에 절로 발그스름한 꽃이 피었다.

‘이왕이면 열두 살 몸으로 했으면 좋겠다. 털도 안 난 자그마한 자지에 박힌 데미안이 자존심마저 박살 나게.’

왕자가 들었다면 기겁하면서 “아니, 누구더러 좆같은 애새끼라는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저질스러운 변태인데! 데미안이 불쌍해!” 하고 억울해했을 정도로 음습한 망상이었다.

이러나저러나 데미안만 불쌍했다.

하지만 결국 그가 선택해서 미카엘을 옆에 끼고 있는 거니 누굴 탓할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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