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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97화 (9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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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좋은 분이시네요?”

“그래. 신의도 두터운 분이시니 너도 가까이 지내 두는 게 좋아.”

“하지만 선생님의 팔다리를 끊어 버린 사람이잖아요.”

미카엘이 화가 난 얼굴로 입을 꾹 다물자, 데미안이 무어라 말하려다 말고 그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었다.

지난 1년간 미카엘은 영체보다 상담소 사람이니, 투자진흥공사 사람이니 하는 인간과 더 자주 어울렸다. 그래서인지 그는 여전히 생사를 무겁게 여겼다.

인간의 생사는 성냥에 붙은 불과 같아서 한번 꺼지면 끝이지만, 영체의 생사는 하루해가 지는 것과 같아서 밤이 온다 해도 큰 의미는 없다.

하지만 영체로서 죽어 본 적도 없는 미카엘은―아직 죽어서도 안 되는 그는―그 비유를 실감하지 못할 터였다.

“원망하고 싶으면 원망해라.”

세월이 흐르면, 나이를 먹으면, 인간계가 아닌 천계의 방식에 적응하고 나면 미카엘도 언젠가 익숙해질 테니 굳이 당장 그 예민한 성질머리를 죽이라고 닦달할 필요는 없었다.

천 년이란 세월은 성질 급한 영체 또한 느긋한 대천사로 다듬어 주었으니 데미안은 그를 천천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하지만 밉지도 않은데 억지로 미워하려고 노력하진 말고. 괜히 너만 힘들어지니까.”

데미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미카엘은 그를 따라 블람의 사원 안으로 향했다.

“와…….”

유리시아 신전이 근엄하고 금욕적인 인상을 준다면, 블람 사원은 화려하면서 자기 과시적인 인상을 주었다. 전자가 검은 사제복을 입은 엄숙한 신모를 떠올리게 한다면 후자는 장식용 갑옷을 걸친 호방한 장군을 떠올리게 했다.

신자들도 그 분위기를 따라가는지 신전 안에선 발걸음 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조용 걷는 펠름교 신자와 달리 로다나교 신자는 사원 안에서 크게 웃고 떠들어 댔다. 심지어 사제들마저 가판대 너머로 무어라 소리치거나 춤을 추는 사람에게 손뼉을 쳐주었다.

좋게 표현해서 흥미로운 축제가 벌어진 곳 같았고, 나쁘게 표현해서 시끄러운 시장통 같았다.

미카엘은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알록달록한 색채를 띤 장식물과 이국적인 건축물을 바라보다가 데미안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선생님, 저건 진짜 금일까요?”

미카엘이 금박을 입힌 것처럼 번쩍거리는 신상을 공손히 손바닥으로 가리키며 묻자, 데미안이 웃으며 물었다.

“금 붙이기를 해볼 텐가?”

데미안이 가리킨 곳을 보니 로다나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자그마한 노점상에서 얇디얇은 금박 종이를 팔고 있었다. 신도들은 그걸 돈 주고 산 뒤 조심조심 걸어가 손수 신상에 금박을 정성스레 붙여 댔다.

블람 신상이 하도 거대해서 제아무리 성인 남자라도 블람의 무릎에밖에 손이 닿지 않았지만 말이다.

“제가 왜 남자 몸을 만져요. 더럽게.”

데미안은 조금 전에 제 몸을 열심히 만져댄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남의 종교라고 막말하긴.

“두 장만 주게.”

로다나교 사제는 기계적으로 금박 종이를 내밀다가 펠름교 사제복을 입은 데미안과 눈을 마주하고는 흠칫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옆에서 미카엘이 돈을 건네자, 얼떨떨한 얼굴을 하면서도 조심스레 그의 손끝에 금박 종이를 붙여 주었다.

“아주 얇아서 찢어지거나 접히기 쉬우니 조심히. 신상에 금박을 깨끗하게 잘 붙이면 한 해 운이 좋아진다는 말이 있어.”

“진짜인가요?”

“당연히 거짓말이지.”

“…….”

왜 ‘당연히’죠? 여긴 신전이잖아요.

미카엘은 참으로 할 말이 많았지만, 눈앞에 복권 당첨자를 조작한 사기꾼이 있으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히덴 신상도 있네요?”

블람 신상 옆엔 그보다는 훨씬 작지만, 그래도 위용이 넘치는 아홉 개의 신상이 놓여 있었다.

블람의 제자들이었다.

금박 종이를 잔뜩 덧대서 두툼해진 제자들 사이에서 나히덴만 몸이 호리호리했다. 그는 정말로 인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눈물 나는 광경을 보다 못한 미카엘이 쭈뼛쭈뼛 나히덴 신상 앞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아는 사람의 몸에 뭘 붙이려니 영 머쓱한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최대한 손이 닿지 않도록 조심조심 나히덴의 콧등에 금박 종이를 붙여 주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데미안이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나도 콧구멍에 쑤셔 넣어 볼까.”

“제가 언, 콧구…… 선생님!”

미카엘이 억울하단 얼굴로 소리쳤지만, 데미안은 진짜로 나히덴의 코 안에 금박 종이를 푹 쑤셔 넣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와, 진짜 못됐다…….”

미카엘이 흘겨보는 데도 데미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그는 고르게 금박이 붙은 신상을 쭉 둘러보고는 미카엘의 귓가에 속삭일 따름이었다.

“한 군데도 빈 곳이 없다니. 참 놀랍지 않나?”

“그게 왜요?”

“저들 중 누군가는 신상의 거기에 금박을 붙였다는 뜻 아닌가.”

거기가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 바로 알 수 있었기에 미카엘은 바로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 선생님 때문에 제 머릿속이 오염됐어요!”

“원래 더러웠지 않나.”

“선생님하고 관련된 더러운 생각밖에 없었는데 음담패설 탓에 잡탕이 되어 버렸다구요!”

내가 지금 고양이어를 듣고 있나. 왜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모르겠지?

다른 생각을 해서 머릿속을 정화해야 한다며 입술을 삐쭉거리던 미카엘이 금박 종이를 파는 가판대와 데미안의 다리 사이를 번갈아 보다가 갑자기 깨달음을 얻은 듯한 얼굴을 했다.

“저, 혹시 금박 종이를 사서 외부로 반출해도 될까요?”

미카엘이 볼을 붉힌 채 수줍게 묻자, 데미안이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미카엘, 적당히 해야지.”

“대량으로 사 가도 뭐라 그러진 않죠?”

“미카엘. 적당히.”

데미안은 알몸 위에 금박 종이를 더덕더덕 붙이고 싶지 않았기에 바로 그의 말을 잘라냈다.

미카엘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무어라 꿍얼거렸지만, 워낙 호기심이 많다 보니 주위를 에워싼 새로운 물건으로 금세 관심을 돌렸다.

“선생님, 저기 좀 보세요! 저건 우리 묵주를 따라 한 거 아니에요?”

미카엘이 동그란 알을 실로 꿰어 만든 긴 목걸이와 팔찌를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그가 가리킨 곳으로 눈길을 던진 데미안은 무심하게 대꾸할 따름이었다.

“묵주 기도할 때 쓰는 묵주나 염할 때 쓰는 염주나, 그게 그거지.”

“그게 그거라니…… 우릴 따라 한 거잖아요.”

“미카엘, 종교는 사업이야. 아무리 지향하는 바가 달라도 비슷한 장사를 하는 이상 영업 방식이 비슷할 수밖에 없어.”

한 교도의 사도이자, 한 종교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업’이란 말에 미카엘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본 종교 중 열의 열은 다 저런 성물이나 부적, 등불, 초, 향 같은 걸 팔아. 헌금은 보이지 않는 봉헌이라 내고 나서 뿌듯한 마음이 덜 들 수 있거든. 하지만 성물은 이 신전에 돈을 보태고 있다는 마음이 들어 살 때도 기분 좋고, 사고 나서도 내 소유의 물건이 눈에 보여 헛된 곳에 돈을 썼다는 마음이 덜 들지.”

“너무 세속적이에요…….”

“애초에 신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초월적인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한 것이니 세속적일 수밖에. 선행하는 데에도 돈은 드니까. 다만 탐욕적으로, 필요 이상의 것을 구하면 안 되겠지.”

데미안은 지나치게 청렴한 사도를 부드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업이란 말이 영 마음에 걸리면 민간인이 운영하는 비영리 사회복지단체 같은 거라고 생각해.”

미카엘은 황당하단 얼굴로 데미안을 쳐다보았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기에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 신앙심이란 건 타고난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거라고 하더라구요.”

“그래?”

네. 당신이 얼마나 신앙심이 없는 사람인지 잘 알겠어요.

미카엘은 두 눈을 내리뜨며 데미안의 딱딱한 손끝을 꼭 감싸 쥐었다.

실제로 신을 만나고도 경외심을 느끼지 못하고,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종교화도 그저 무덤덤한 눈길로 바라보고, 당신이 몸을 담은 종교조차 외부인의 시선으로 분석하고…….

궁지에 몰려도 절대자를 찾지 않고 자기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데미안은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 대천사가 되게 하다니…… 순애란 정말 저주 같은 거네요.”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카엘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왜 순애가 저주이지?”

데미안이 우뚝 걸음까지 멈춘 채 묻자, 미카엘이 황당하단 얼굴로 대꾸했다.

“다 들어 놓고 왜 되물으시는 거예요?”

“못 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런 건데.”

아차. 귀가 너무 좋지. 정말 지나치게 좋지!

머쓱해진 미카엘은 괜히 화내듯이 말했다.

“선생님처럼 신앙심이 없는 사람이 대천사가 될 정도니 저주나 마찬가지잖아요.”

데미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림 그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어. 붓을 들 때마다 우울증이 오는 것 같다며 앓는 소리를 하곤 했지.”

“그런데요?”

“죽을 때까지 화가로 살던데?”

미카엘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묘하게 설득당했다!

“꼭 좋아하고 적성에 잘 맞아야만 그 일을 하는 건 아니지. 정치인들만 봐도 남을 등쳐먹고 권력을 쥔 채 잘난체하고 횡령으로 한몫 크게 잡고 싶은 주제에 민생을 살리려고 어쩔 수 없이 정치인이 된 것처럼 구는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나. 심지어 정치를 잘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말이야.”

“신앙심 없는 대천사처럼 말이죠?”

“그래. 그 대천사도 자기 연인이나 구원해서 둘이 잘 먹고 잘살 생각밖에 없을 거야.”

그 에두른 자학에 결국 미카엘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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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후원 쿠폰 선물해 주신 아레온 님

원고료 쿠폰 선물해 주신 콩떡팥떡시루떡 님, 유아해 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도 선작이 적은 작품이라 "누가 보고 계시나..?"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떻게 알고 독자님들께서 댓글로, 추천으로, 쿠폰으로 기별을 주시는지 신기할 정도예요.

정말로 항상 큰 힘을 얻고 있습니다. 감사드려요!

아레온 님ㅠㅠ 저야말로 스릉흡니다. 우리 팀이 감히 행복의 한 축이 될 수 있다니! 아마 미카엘과 데미안도 예뻐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대신 감사 인사 드립니다! 건강하고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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