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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다음에 봐요.”
러셀이 작게 웃으며 이웃에게 손을 흔들었다. 옆집 청년은 공손하게 인사하고는 도로 조용한 나무를 괴롭히는 일로 돌아갔다.
“선생님, 저기 보세요. 저렇게 금색에 가까운 새는 처음 봐요. 보셨어요? 꼭 우릴 보는 거 같은데.”
데미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지만, 미카엘은 자기가 뭘 잘못했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그를 말똥말똥 쳐다볼 따름이었다.
“조용히 있는 게 싫은가?”
“네.”
“그럼 그만두지.”
“선생님, 얼른 저 새 좀 보세요. 저러다 날아가겠어요. 아직도 우릴 보는 거 같은데. 그런데 로다나교는 동성애를 금지하나요? 우리가 손잡고 가면 그곳 사람들이 싫어할까요?”
데미안은 미카엘이 요구한 대로 신기한 새도 쳐다봐주고 로다나교는 딱히 동성애를 금지하지 않으니 네가 원하면 함께 손잡고 가자고 답해주었다.
데미안을 실컷 쪼고 나자 마침내 만족한듯 미카엘이 맑게 웃으며 거대한 나무에 날개를 비벼 댔다.
“선생님은 정말 다정하세요.”
다정이란 말을 사람으로 만들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미카엘은 고요한 밤을 동경하는 사람처럼 데미안의 검은 눈동자를 황홀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감성이 메마른 데미안은 어린 연인의 몽롱한 눈동자가 꼭 마약을 한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나 했다.
“다른 곳에 가선 그런 말 하지 마라. 네 머리가 이상하다고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그야 선생님이 다른 사람한테 너무 개자식처럼 구시니까 그렇죠.”
“그래도 하리엘에겐 잘해 줬어. 네가 돌아오면 네 방패로 써먹을 생각이었거든.”
미카엘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선생님! 보통은 그런 걸 ‘잘해 줬다’라고 하지 않아요.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셔야죠.”
“한 사람한테는 그러고 있어.”
“그게 저예요?”
“응.”
데미안의 옆구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은 미카엘이 그의 단단한 팔뚝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제가 해달라는 건 다 해주실 거예요?”
“그래.”
그렇게 제가 좋으세요? 라는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꼬리가 자꾸 위로 올라가는 걸 막느라 입술이 바빴으니까.
“그 얼굴은 어릴 때 이후로 처음 보는군.”
데미안이 검지로 미카엘의 입 가장자리를 건드리며 미소 지었다.
“너무 좋은데, 그걸 티 내지 않으려는 얼굴.”
“누가 보라고 했죠?”
미카엘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홱 돌려 버리자, 데미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왜 갈수록 다루기 힘들어지지?”
“전 원래 성가신 사람이에요.”
“알지. 쳐다보면 싫어하고 안 쳐다보면 화내고, 질투심은 많은데 상상력이 이상하게 풍부해서 의심도 많고, 호기심이 많은데 거기에 하나하나 어울려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고.”
미카엘이 매서운 눈빛으로 절 노려보자, 데미안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너만 있으면 어딜 가도 심심하지 않겠어.”
그 부드러운 저음에선 짙은 애정이 묻어나서 미카엘은 또 기분이 좋아진 걸 숨기느라 입술이 바빠졌다.
* * *
“선생님, 세탁하게 이리 주세요.”
옷을 벗어서 건네면 바로 얼굴을 파묻고 냄새를 맡아대는 사람에게 순순히 옷을 건네는 건 생각보다 정신력이 소모되는 일이다.
미카엘은 종종 데미안의 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기도 하지만, 그건 연인끼리의 애정 표현이라고 변명할 수라도 있지,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변태 짓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데미안은 대놓고 옷 냄새를 만끽하는 미카엘을 애써 못 본 척한 채 사제복으로 갈아입었다.
“아! 천천히. 선생님, 조금만 천천히 입어 주세요.”
미카엘은 아름답게 갈라진 등 근육과 보기 좋게 발달한 흉근이 금욕적인 사제복으로 꽉 조여지는 걸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조각칼로 신경 써서 깎아 낸 듯한 데미안의 근육은 크고 탄탄하면서도 무겁고 둔한 인상은 주지 않았다. 오히려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음울하고 차가운 눈동자와 어우러져 차분하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두툼한 상체에 비하면 허리는 늘씬한 편이었지만, 마냥 가늘지 않아서 신체 비율이 조화롭고 아름다웠다. 커다란 손은 강인해 보였지만, 투박하진 않았다.
‘지금 침을 닦은 건가?’
데미안은 손등으로 자기 입술을 훔쳐내는 미카엘을 떨떠름한 눈으로 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미카엘, 다 봤으면 그만 갈까?”
“아! 잠깐 보석상에 들러서 퀘룸 주괴 좀 환전하고 가도 될까요?”
데미안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갑자기 환전은 왜?”
미카엘의 지갑은 늘 지폐로 가득 차 있었는데 어제는 딱히 큰돈을 쓰지도 않았다.
“나히덴에게 돈을 좀 줬거든요. 제자가 굶었다면서 제가 한 요리를 달라고 하기에…….”
“그건 안 되지.”
데미안이 단호하게 말을 자르자, 미카엘은 예쁘게 웃었다.
“네. 그래서 돈을 쥐여 줬어요.”
“개…… 제브.”
데미안이 손가락을 딱 딱 튕기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브가 모습을 드러냈다. 데미안이 그에게 시키라고 턱짓하자, 미카엘이 가방에서 퀘룸 주괴 몇 개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제브는 바로 주괴를 건네받는 대신 허리를 깊숙이 수그린 채 미카엘의 손 냄새를 맡았다.
‘선생님, 이거 좀 이상한 습성인 것 같아요.’
슬며시 데미안 쪽으로 어깨를 기울인 미카엘이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데미안도 그 말에 동의했지만, 그게 네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저, 그런데 제브가 너무 어려 보여서 보석상 주인이 환전해 주지 않으려 하면 어쩌죠? 이거 하나가 25테트 정도 할 텐데. 게다가 거리에 섞이기에 제브는 너무 눈에 띄는 외모 아닌가요?”
미카엘이 까무잡잡한 피부에 은발을 지닌 어린 소년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머리카락 색깔만 해도 특이한데 제브는 꼭 아이라인을 그린 것처럼 눈 점막도 까맣지 않은가.
“천사라면 누구든 인간을 위압할 줄 알아. 그러니 여차하면 겁줘서 받아내면 돼.”
제브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이-.” 하고 이를 드러내 보이자, 미카엘이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정말 대단하네. 저걸 보곤 한 살짜리도 겁먹지 않겠어.
“무엇보다 천사는 존재감이 약해서 인간의 머릿속에서도 쉽게 잊혀지고, 눈에도 잘 띄지 않으니 괜찮을 거야.”
“네? 하지만 이 신전만 해도 선생님을 보러 오는 신자들이 엄청나게 많잖아요. 선생님이 자주 예배에 참석하시는 것도 아닌데 매일 서른 명 가까이 나오지 않던가요?”
데미안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카엘, 내가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신자 서른 명이 아니라 3천 명이 날 보러 왔을 거야. 그러다 매일 몇 명이 발에 밟혀 죽었겠지.”
하긴.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이 가방에 채워 오시면 돼요. 만약 보석상 주인이 주괴 하나 가격으로 25테트 이하를 부르면 다른 보석상으로 가세요.”
“네.”
“그런데 이 가방 하나를 지폐로 꽉 채우면 좀 무거울 텐데. 괜찮겠어요?”
“네.”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그냥 주괴 하나만 환전해 와도 되니까요. 거금이 급히 필요한 건 아니에요.”
“네.”
미카엘이 상냥하게 제브를 챙겨 주자, 데미안이 서늘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제브.”
“네.”
“미카엘이 너더러 사형이라 그러던데.”
네가 눈치가 있으면 알아서 사양하라는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제브는 날카롭게 생긴 눈매로 데미안을 유순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죽이셔도 됩니다.”
아니, 그 사형이 아닌데? 왜 우리 애를 쓰레기로 만들지? 개같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만 쓰레기인데.
데미안이 입가에 헛웃음을 띠자, 미카엘이 재빨리 말했다.
“제브, 선생님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게 아니라……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선생님께서 농담하신 거예요.”
미카엘을 번쩍 들어 안은 데미안이 몸으로 그와 제브 사이를 막아서며 말했다.
“너무 잘해 주지 마라. 내가 저걸 발로 차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맙소사, 데미안! 못되게 굴지 좀 마세요.”
미카엘이 옆구리를 꼬집자, 데미안이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 손을 붙잡았다. 그가 흘깃 뒤를 돌아보며 그만 가라고 턱짓하자, 제브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습을 감췄다.
“미카엘, 내 주변 사람에게 너무 잘 보이려고 노력할 필요 없어.”
“하지만…….”
“저들은 힘이든, 영향력이든, 도움이든, 내게 뭔가를 원하기 때문에 내 옆에 붙어 있는 거다. 그러니 그에 대한 대가도 내가 합당하게 치를 거야.”
데미안은 웃음기가 사라진 목소리로, 그러나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너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마라. 사람에게서 좋은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하되 너무 많은 기대를 품진 마. 결국엔 다 자기만족을 위해 사는 거니까.”
나히덴이 준 연고를 발라서 이미 상처가 사라졌는데도 어떻게 알았는지 데미안이 미카엘의 팔뚝 안쪽을 가칠가칠한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문질렀다.
“너 자신을 가장 상냥하게 대해. 타인에겐 물질이든, 노동이든, 다른 거로 도움을 줄 수 있잖아. 하지만 네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다정하게 감싸 주는 것뿐이야.”
고개를 푹 숙인 미카엘은 작은 목소리로 네, 하고 대답하고는 데미안의 단단한 어깨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그의 신은 무심하고 매정한 데도 자신에겐 너무나도 다정해서 미카엘은 속절없이 그를 숭배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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