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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그때 나도 영 살이었잖아, 미카엘. 영 살.”
미카엘을 뒤에서 부둥켜안은 데미안이 이젠 블람과도 호각으로 싸운다며 달래듯이 말했다.
“앞으론 그 누구에게도 지지 마세요.”
“그래.”
너에게는 맨날 지고 잔소리나 듣지만.
미카엘의 화가 좀 가라앉은 듯하자, 데미안이 커다란 고양이를 품에 가득 안은 채 뒤뚱뒤뚱 걸으며 말했다.
“이제 치우고 나갈까? 요리는 네가 했으니 치우는 건 내가 하지.”
“아니에요. 앉아 계세요. 아! 이건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데미안을 도로 자리에 앉힌 미카엘이 무언가를 내밀며 수줍게 웃었다.
아, 귀엽기도 하지. 희고 고운 볼이 발갛게 물드니 꼭 꽃이 핀 것처럼 그리 예쁠 수가 없었다.
“……으음.”
하지만 미카엘이 내민 건 전혀 귀엽지 않았다. 노랗고 괴상한 무언가가 엉성하게 수 놓인 손수건이었으니까.
손수건 자체는 무척이나 값비싸 보였기에 꼭 열두 살짜리가 얼기설기 놓은 듯한 수와 어우러지자,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해 보였다. 저런 걸 들고 다녔다간 누군가에게 놀림당하기 딱 좋아 보였다.
“이건 별, 아니, 태양, 아! 민들레인가?”
하지만 어린 연인의 노력이 가상했기에 데미안은 그의 눈치를 보며 괴상한 무언가의 정체를 맞히려 노력했다.
“고양이예요.”
미카엘은 가만히 데미안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주 귀여운 고양이인데? 여기 이 파란 콧구…… 아니, 눈이로군. 그래. 눈도 아주 초롱초롱해 보이는 게 깜찍하네.”
데미안이 너무 곱고 예뻐서 매일 들고 다녀야겠다고 말하자, 그 과장된 칭찬을 듣고 기분이 좀 좋아졌는지 미카엘이 억지로 그것을 데미안의 손아귀에 쥐여 주며 새침하게 말했다.
“처음 해본 거라 좀 못한 거 같아요. 다음번엔 이름까지 새겨드릴게요.”
넌 그냥 아무것도 최선을 다하지 마라.
데미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거 기대되는데.”
하지만 눈앞에 칼을 든 강도가 있으니 말을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 * *
저녁거리를 사 오려고 집을 나서던 러셀은 마침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옆집 청년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 외출하시나 봐요?”
베이지색 롱코트에 흰 셔츠, 검은 슬랙스를 입은 옆집 청년은 오늘도 은은한 향수 냄새를 풍기며 세련된 미청년으로서의 풍모를 뽐냈다.
“네. 안녕하세요.”
러셀은 뒤이어 옆집에서 나오는 이를 보고 무어라 건네려던 말을 새카맣게 잊고 말았다.
일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그 섹시한 신부님이었다!
‘남신이다. 진짜 신이야. 저 사람은 분명 신이라고.’
분명히 말해 두지만, 러셀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동성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고, 매력을 느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예술에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 “와! 악마한테 영혼을 팔고 재능을 산 거 아니야?” 하고 감탄할 만한 완벽한 작품 같았다.
“선생님, 제 옆집에 사는 분이에요.”
옆집 청년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말하자,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남자가 흘깃 러셀을 한 번 쳐다보았다.
오, 진짜 잘생겼는데…… 이상한 위압감이 느껴져서 정말 무서웠다! 남자의 진한 이목구비가 꼭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러셀을 위협하는 것만 같았다.
남자는 다른 사람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지 스르르 웃음기를 지운 얼굴로 엘리베이터 문만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죠? 전 미카엘 홀리브링어라고 합니다.”
미카엘이라니. 부모가 어지간히도 그를 예뻐한 모양이었다.
왜, 그 유명하지 않은가. 유리시아의 대천사 미카엘. 러셀은 로다나교를 믿어서 펠름교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말이다.
미카엘이 깔끔한 명함을 건네자, 러셀이 부랴부랴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마주 건네주었다.
“저, 크흠! 저는 러셀 카자흐입니다. 서른여섯 살이고요.”
미카엘은 갑자기 나이를 대는 러셀을 보고 조금 놀란 듯했지만, 그저 말없이 미소 짓고는 그가 건넨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아! 나이 이야기를 하지 말걸. 여기 사람들은 초면에 나이를 밝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단 것을 자꾸 잊는단 말이야.
“스테인 법률 회사…… 와, 변호사이셨군요?”
“아, 아! 네.”
러셀은 미카엘에게 대답하면서도 자꾸만 그의 옆에 서 있는 남자에게 눈길이 갔다. 저렇게 잘생긴 사람은 난생처음 봐서 그런지, 무례하게 힐끔거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가만 보니 미카엘보다 조금 연상으로 보일 뿐, 2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자이다. 그런데 왜 당연하게 연상일 거라고 생각한 걸까? 너무 존재감이 강한 사람이라서 기죽었던 걸까?
“언제 한번 사무실에 방문해도 될까요?”
미카엘의 말을 듣고 퍼뜩 정신을 차린 러셀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예? 우리 사무실에요?”
“네. 제가 아는 분께 법률 자문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아, 그럼 감사하지요! 아니, 좋지요. 아, 저기, 저 말고도 훌륭한 변호사분들이 많거든요.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자신의 어설픈 대응 때문에 신규 고객을 놓칠까 봐 러셀이 서둘러 선배 변호사들 이야기까지 꺼냈다.
“법률 자문이 필요한 사람이라니?”
맙소사! 목소리까지 끝내주게 근사했다!
제발 저 남자의 고추가 작기를. 아니면 발가락에 무좀이라도 있기를.
질투에 눈이 먼 러셀이 블람에게 불경한 기도를 올렸다.
“엘레인이 여성 참정권 운동을 하다가 벌써 세 번이나 수감되었다가 풀려났거든요. 그때마다 제가 대신 보석금과 벌금을 내주긴 했지만, 전과가 남을 걸 생각하면 좀 더 합법적으로 시위할 방법을 찾아야겠더라구요.”
“대신 내주다니. 엘레인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나?”
“아직 보험금이 남은 것 같긴 하지만, 엘레인은 아직 젊잖아요.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았으니 그 돈은 비축해 둬야죠.”
우와, 어린 청년의 입에서 ‘젊다’, ‘살날이 많이 남았다.’라는 말이 나오니 위화감이 장난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또래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어르신 같은 말투를 사용하는 건 퍽 어울려 보이니 참 신기한 노릇이었다.
“엘레인이 직업 훈련을 받고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런데 실습 기간에 엘레인에게 좋은 평가를 주었던 업체들조차 그녀가 여성 참정권 운동에 참여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절대로 엘레인을 쓰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나 봐요.”
“…….”
남자가 입 모양으로 욕을 했는지 미카엘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 그렇다고 욕을 하시면 안 되죠.”
“살해를 할 수는 없잖은가.”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듣던 러셀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저어, 우리 사무실에 여성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여성 변호사분도 계시거든요. 꼭 한번 들러 주세요.”
미카엘은 선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정말 고마워요, 러셀. 아! 선생님, 제 이웃분한테 인사 좀 해 주세요.”
미카엘이 살짝 소매를 당기며 말하자, 남자가 도로 고개를 들어 러셀을 바라보았다.
와, 그저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가슴이 떨려 왔다. 어떻게 하면 사람이 칼 들고 위협하는 듯한 기세인데도 저리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는 거지?
러셀은 고추가 작아지라는 저주도, 무좀에라도 걸리라는 저주도 얼른 취소했다.
“데미안 페르페오 신부라네. 시끄러운 이웃 탓에 자네가 고생이 많겠군.”
너무 크고 잘난 남자 앞에서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간 러셀이 무어라 답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꼭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고 멋있는 학생회장이 친구도 없고 존재감도 없는 나에게 씩 웃으며 말을 걸어 준 것 같아서 영광스러운 한편 쑥스러웠다.
다행히 친절한 이웃이 제대로 된 대꾸도 하지 못하는 러셀을 구조해 주었다.
“세상에, 데미안. 시끄럽다뇨. 사람들은 다 저더러 조용하고 차분하다고 그러는데요.”
자기 입으로 말한 탓에 상당히 모양새가 안 좋았지만, 미카엘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모두 금발에 푸른 눈을 지닌 품위 있는 청년이 정말 예의 바르면서도 상냥하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으니까.
하지만 데미안이란 남자는 그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검지를 들어 옆집 청년의 입술 앞에 대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10분만 조용히 해 볼까?”
“제가 겨우 10분도 가만히 있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 10분.”
“진짜 너무하시네요. 선생님은 저에게 너무 야박하세요.”
“미카엘, 10분.”
미카엘은 잠시 말이 없었지만, 10분은커녕 10초도 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우리 개인 마차 타고 갈까요?”
“미카엘.”
“이것까진 정해야죠. 걸어가실 거예요? 아니면 마차?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이용하는 역마차는 좀 그런데…… 개인 마차를 타고 가죠?”
“그래. 그러지.”
미카엘은 도로 입을 다물었지만, 이번엔 5초도 견디지 못했다.
“그런데 그렇게 입고 가실 거예요?”
“미카엘.”
“진짜로 이것까지만요. 남의 신전에 가는 거니까 오히려 사제복으로 갈아입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신분을 확실히 하셔야죠.”
“그럼 우리 신전으로 돌아갔다가 개인 마차를 잡고 가도록 하지.”
옆집 청년은 생각보다 애교 있고 붙임성 있는 성격인 것 같았다. 그는 꼭 거대한 나무 위에 둥지를 튼 성가신 새처럼 끊임없이 과묵한 나무를 두드려 댔다.
‘아,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구나.’
하지만 러셀이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아차린 건 사근사근한 옆집 청년 때문이 아니라 조용한 남자 때문이었다.
데미안은 연신 한숨을 섞어 대답하면서도 어찌나 미카엘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지 그의 검은 눈동자를 녹여 내면 황금빛 꿀이 줄줄 흘러나올 것만 같았다. ‘이야, 진짜로 좋은가 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눈빛이었다.
러셀은 한 번도 동성애에 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조금 민망했다.
하지만 미남 둘이라서 그런가, 아니면 예쁘게 연애하는 모습이 좋아 보여서 그런가, 생각보다는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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