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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92화 (9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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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나히덴이 일부러 잔혹한 방식으로 자결한 건……”

“인간이 신이 되기 위해선 추종자가 필요한데, 그의 고통이 클수록, 비극적으로 죽을수록, 그의 간절한 기도가 강한 신앙으로 승화될 수 있기 때문이죠.”

저게 천 년 전에도 있던 이야기인가?

미카엘과 관련된 추억은 하도 많이 반추해서 꼭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나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유리시아가 정신적으로 무너지는 걸 막고 싶다면 많은 걸 기억하지 말라고 했기에 미카엘이 들어 있지 않은 기억은 최대한 잊으려고 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성기사단이 왜 그렇게 이단 심문에 목숨을 걸었겠어요. 누군가 자꾸 유리시아를 부정하고 인간을 생신(生神)으로 만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죠.”

미카엘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죄송해요. 선생님과 관련된 건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런 거나 기억하고…….”

“괜찮아.”

미카엘이 의기소침할 때마다 데미안은 가슴께가 서늘해졌다. 그는 제 금색 고양이가 열두 살 때처럼 건방지게 굴고 의기양양해야 마음이 놓였다.

그때가 가장 미카엘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던 때였으니까.

“잊었나 본데, 내가 바로 성기사였거든. 그러니까 나와 관련된 기억이 맞아.”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신앙심도 없던 분이 왜 성기사가 되셨어요?”

“당시엔 동성애가 죄였으니까 남자 종교쟁이가 많은 곳에 가면 아무도 나한테 달라붙지 않을 거라 생각했지.”

데미안은 유의미한 눈길로 미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가장 극심한 종교쟁이가 나한테 달라붙었지만 말이야.”

저게 신부님 입에서 나올 말인가.

가장 극심한 종교쟁이가 신성 모독에 한탄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블람은 생신이 죽어서 천계에 오른 거군요.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을 추종한 사람은 없었나요?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있었지. 애초에 내가 승천한 건 유리시아가 불러서가 아니라 신의 위상을 얻어서였어.”

블람도 승천한 뒤 5년이 지나서야 신력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데미안은 천계에 오르자마자 바로 신력을 사용할 수 있었을 정도로 그를 추종하는 이들의 믿음이 막강했다.

「너에게 아주 독한 추종자가 있구나.」

유리시아는 그 추종자가 널 위해 뭘 희생했는지 모를 거라며 차갑게 웃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러냐고 건성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그게 바로 자기 뜻을 거역하고 홀리브링어 왕국을 멸망시킨 자들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왜 신이 되시지 않고…….”

“그야 유리시아에게서 훔칠 보물이 있었으니까.”

두 눈을 내리뜬 보물이 속상한 얼굴을 하자, 데미안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왜 그런 얼굴을 해. 오히려 잘됐지. 만약 내가 그대로 신이 되었다면 아마 몇 년도 가지 않아서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을 거야. 사도로 삼을 정도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길 해, 신도를 관리할 줄 알길 해. 하지만 유리시아께서 날 강력한 존재로 만들어 주신 것도 모자라 여러 경험도 하게 해 주셨으니 이젠 준비가 된 채로 신이 될 수 있어.”

혹여 미카엘이 자기 자신을 짐짝처럼 생각할까 봐 데미안은 반복해서 정말 잘된 일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행이라고 생각할게요.”

눈치 빠른 미카엘이 그 속내를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애써 밝게 웃다가 음식이 다 데워진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카엘.”

“네?”

“나에겐 뭘 해도 되니까 미카엘에겐 상처 주지 마라. 나에겐 잘할 필요 없으니 그에게만 잘해 줘.”

미카엘은 목 안을 뻐근하게 걸 힘겹게 삼키고는 담담한 어조로 알았다고 답했다.

“무엇보다 난 데미안이란 이름이 추앙받는 게 싫거든. 그러니 신이 되더라도 유리시아의 이름을 이어받을 거야.”

새 그릇에 따뜻한 음식을 옮겨 담은 미카엘이 그걸 데미안 앞에 내려놓고는 그 옆자리에 앉았다.

“왜 싫으세요?”

“사람들한테 사랑받는 데 질려서.”

미카엘은 황당하단 얼굴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폐쇄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내향적인 사람인데 어딜 가든 주목받고 사랑해 달라고 목매다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정말 피곤할 만했다. 심지어 그 짓을 천 년 동안이나 해 온 것 아닌가.

“하지만 넌 고양이니까 날 사랑해 줘야지?”

미카엘의 허리를 끌어 제 한쪽 허벅지 위에 앉힌 데미안이 그의 아래턱을 간질이면서 미소 지었다.

“글쎄요. 선생님이 하는 거 봐서요.”

미카엘의 새침한 대꾸가 마음에 들었는지 데미안은 환하게 웃으면서 그의 가슴팍에 이마를 콩 박았다. 그 웃는 얼굴이 어찌나 눈부신지 해와 달 대신 하늘에 달아도 될 것 같았다.

“로다나 문파 사람들은 모두 사이가 좋아. 심하게 좋아서 탈이지. 극성스러운 대가족 같은 느낌이거든. 특히 막내인 데다 가장 심하게 고생한 나히덴은 모두에게 지대한 관심을 받고 있어.”

“그런데요?”

“그런데 나히덴은 말년에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다가 방랑벽이 생겼거든.”

미카엘은 설마 조미료가 뭔지 모르나?

데미안은 재료의 맛만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마디로 별로 맛이 없는 음식을 애써 맛있게 다 먹고는 말했다.

“내가 아주 자유로운 영혼이라 널 내버려 둔 채 홀로 이곳저곳을 떠돈다고 생각해 봐.”

“가만 안 둬.”

바로 데미안의 멱살을 잡아챈 미카엘이 으득으득 이를 갈면서 두 눈을 형형히 빛냈다.

“가만 안 둘 거라고.”

미카엘이 코끝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민 채 뜨거운 숨을 훅훅 불어대자, 데미안은 두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아, 이게 바로 뭔가 얹힌 느낌이지.’

천 년 만에 느낀 소화 불량 기미였다.

“나히덴은 개새끼예요. 어떻게, 씨발, 사람이 그래요? 자기만 자유로우면 다예요? 사랑하는 사람은요?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참고 기다려야 해요?”

미카엘은 데미안이 깨끗하게 비운 그릇에 억하심정을 꾹꾹 눌러 담았다. 별로 맛이 없는 음식도 다시 그득그득 담았다. 기어코 저걸 다 먹일 생각인 것 같았다.

“같이 갈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혼자 가는 건데요? 불편해서요? 아니,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이 불편해요?”

아무리 사랑해도 불편할 수는 있지, 라고 말했다간 미카엘이 죽자사자 덤벼들 것 같아서 데미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입을 열고 별로 맛이 없는 음식을 최대한 맛있게 먹으면서 말만 하지 않았다.

“선생님, 연인이란 칼을 든 강도와도 같은 거예요. 시간이든, 돈이든, 사생활이든, 모조리 다 털어서 내놔야죠.”

고양이 주제에 개소리도 참 잘하는군.

데미안은 속으로 생각했다.

“네 말이 맞다.”

하지만 눈앞에 칼을 든 강도가 있으니 말을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사형이 일곱 명인데…… 와, 그 사람들을 나히덴이 다 상대하는 거예요?”

“응?”

“진짜 문란하다. 로다나교는 정말 끔찍하네요! 분명 나히덴은 성병을 두세, 아니, 여섯 종 정도는 앓고 있을 거예요.”

나히덴이 들었다면 기겁할 만한 말이었다. 그가 억울한 얼굴로 “아니야! 우리 문파는 난교 클럽이 아니라고!” 하고 외치는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데미안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미카엘은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에요.”

“4천 살짜리 동정에게 하기엔 너무 과한 농담 아닌가? 나도 네 다리 사이에 곰팡이가 피면 한번 구경시켜달라고 농담한 적이 있긴 하지만.”

“…….”

미카엘이 최선을 다하는 개자식이라면, 데미안은 하늘이 내린 개자식이었다.

당연히 범재는 천재를 이길 수 없었다.

“쫓긴다는 사람치고 무척 여유로워 보여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나히덴이 하도 정착하지 못하니까 사형들이 안달하는 거였군요.”

“나히덴이 거둔 제자도 눈에 거슬렸겠지. 로다나 문파를 멸문한 왕이 대요괴와 손을 잡았다고 했지?”

“아! 설마 그게 개 요괴였나요?”

“그래.”

“하지만 루테는 개 요괴의 후손일 뿐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차라리 정액을 집어넣지.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거보다 정액이 더 맛있겠어.

데미안은 별로 맛이 없는 음식을 최선을 다해 맛있게 먹고는 말했다.

“미카엘, 연좌제가 사라진 건 정말 몇 년 되지 않았어. 심지어 내가 인간이었을 때도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다는 이유로 손주가 같이 처형당하거나 핍박당하는 일도 당연했지.”

“하지만…….”

“그게 고작 천 년 전이야. 블람과 그의 제자들은 4천 년 전 사람들이고.”

천 년이란 말 앞에 ‘고작’이 붙으니 위화감이 장난 아니었다. 그제야 미카엘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빈 그릇을 또다시 그득 채워주었다.

‘나는 굶주린 백성이 아니라고 말해야 할까.’

데미안은 아주 잠시 고민했지만, 순순히 스푼을 집어 들었다. 왕자님께서 먹으라고 하시면 먹어야지. 저 귀한 손으로 만드신 건데.

“그럼 우리는 나히덴의 도피를 도우면 되는 건가요?”

“도피는 나히덴의 전문 분야인데 그걸 어찌 도우려고.”

“그럼요?”

“한 번 사형들한테 붙잡힐 테니 구하러 와 달라는 소리야. 와서 사형들 좀 두들겨 패주고, 내가 자기 뒷배라는 걸 다시 머리에 각인시켜 달라는 뜻이지.”

“왜 자기가 직접 안 때리고요? 사형들을 전부 더해도 나히덴에겐 상대가 안 될 거라면서요.”

데미안은 불편한 낯빛으로 한숨 쉬며 말했다.

“아제트인들은 연공서열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거든. 사제가 사형에게 손을 올린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럼 형은 동생을 때려도 되고요?”

“계도하는 목적으로 때리기도 하고 벌주기도 해.”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잠깐. 선생님은 나히덴보다 훨씬 어리시잖아요?”

“내가 물불 가리지 않는 개자식이란 건 천계 사람이라면 이미 다 아는 사실인 데다…….”

데미안은 머쓱한 얼굴로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난 이미 영 살 때 블람에게 덤빈 전적도 있어서.”

“무승부였어요?”

“아니. 진 데다 팔다리도 죄다 쥐어 뜯겼어.”

“말도 안 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미카엘이 “블람, 싫어!” 하고 바닥을 쿵쿵 구르는 걸 보고 데미안은 웃음을 터트렸다.

쟤는 왜 성질내는 모습마저 귀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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