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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미카엘이 제 가슴팍 위에 턱을 얹자, 데미안이 접은 검지로 그의 콧등에 난 연한 갈색 점을 건드렸다.
“잠은 좀 잤나?”
“아뇨. 졸리지 않아서 안 잤어요.”
“몸은?”
“괜찮아요.”
미카엘은 당신은 괜찮으냐고 물으려다가 관뒀다.
피곤하니 잠든 거고, 이제 괜찮으니 일어난 거겠지. 데미안이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에 미카엘은 괜히 참견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누가 걱정해 준다고 감동하는 성미가 아니라서 속으로 잔소리한다고 귀찮아할 게 뻔했다.
하고 싶은 걸 하게 내버려 두는 걸 애정이라고 생각하는 데미안은 미카엘더러 신전 밖으로 나가 살지 말라거나 굳이 직업을 가질 필요까진 없지 않으냐고 말리는 대신 그저 멀리에서 미카엘을 감시, 아니, 보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미카엘에게 있어 애정이란 끊임없이 관심을 보여주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데미안도 저리 의식적으로 질문하고 사소한 말에도 반응해 주는 것이리라.
자고로 애정 표현은 상대가 좋아하는 대로 해주는 게 가장 좋았다.
“나히덴이 선생님 이야기를 많이 해 주셨어요.”
“어떤?”
강해지기 위해 자학에 가까운 행동을 하셨다고요.
미카엘은 금빛 속눈썹으로 새파란 눈동자를 한 번 덮었다가 도로 들어 올렸다.
“관광지가 되어 버린 옛 성에 종종 방문하셨다고요.”
데미안은 그곳을 떠올려 보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차분한 저음으로 물었다.
“가보고 싶나?”
미카엘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서서히 열이 오르는 눈가를 데미안의 서늘한 몸 위에 내리눌렀다.
“제 추억은, 제 고향은, 제 마음은 여기에 다 있는데 뭐 하러요…….”
“뭐하긴. 관광하러 가는 거지. 성벽에 ‘데미안, 하트, 미카엘 다녀감’ 같은 낙서도 하고.”
그 가벼운 말에 미카엘의 눈동자를 간질이던 물기가 웃음으로 흩날렸다. 데미안의 무던한 성격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상처입는 미카엘을 자신도 모르는 새 우울의 바다에서 건질 때가 많았다.
“언제 네 초상화를 훔치려고 벼르고 있거든.”
“데미안…….”
미카엘은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다가 퍼뜩 어깨를 일으키며 말했다.
“아, 그럴 거면 왕관도 같이 훔쳐요. 그러고는 선생님께서 신이 되시는 날, 제가 그 왕관을 선생님의 머리 위에 씌워드리는 거예요.”
“잠깐.”
데미안이 심각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생전에 이렇게 희망에 가득 찬 미래를 설계하고는 망한 기억이 있거든. 그러니까 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라.”
미카엘은 입술을 삐쭉거렸지만, 그것이 저희의 영원한 이별과 관련된 일일 거라고 추측하고는 어깨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쓴웃음을 흘린 데미안이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누르며 말했다.
“월계관이 없어도 난 신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왕관이 없어도 네가 여전히 나의 왕자이듯이…… 쿨럭!”
데미안이 말하다 말고 갑자기 검붉은 피를 토하자, 미카엘이 흠칫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이런 이야기까진 해선 안 되는 모양이군.”
데미안은 아무렇지 않게 손등으로 입가를 닦아내다가 두 눈을 바르르 떠는 미카엘을 바라보고는 그를 억지로 품 안으로 끌어당겨 안았다.
“미카엘,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왜, 왜…….”
“내 말을 들어. 이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문틀에 발가락을 찧은 것보다 가벼운…… 그래. 종이에 손가락을 벤 정도의 일이다.”
“어떻게 유리시아가 이러실 수 있는 거죠! 당신을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런데, 어, 어떻게…….”
두 눈을 일그러뜨린 미카엘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럽게 울자, 데미안은 속이 서늘해졌다.
‘내가 방금 피를 토하지 않았나? 지네나 거미를 토한 게 아니라? 왜 저렇게 충격받는 거지.’
나히덴이 옆에 있었다면 “피 색깔이 맑지 않네. 양파 좀 많이 먹어.” 하고 까불었을 텐데.
데미안은 자신이 뒷구멍으로 피를 흘리게 한 미카엘이 입으로 피 좀 토하게 했다고 유리시아를 원망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나마 유리시아는 약속을 어겼으니 벌을 준 거지, 미카엘은 향유 쓰기 싫다고 피를 보게 하지 않았던가.
아니, 그래. 피 좀 볼 수도 있지.
영체로 천 년을 살아온 데미안에게 있어 몸이 좀 망가지고 잘리고 죽고 그런 건 아주 큰 일도 아니었다. 유리시아도 바쁘신 몸이라 죽은 천사를 바로 되살려 주시진 않지만, 어쨌든 영체에게 있어 죽음은 그저 한시적인 동면일 뿐이기에 그리 중대하게 다루는 사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이제 막 한 살이 된 영체인 데다 자신을 신처럼 우러러보고 있는데 그 앞에서 피 토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실수였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대신 아프지 않다고 말해야 했는데.
“미카엘, 다 나았다. 봐. 이제 괜찮아. 하나도 아프지 않아.”
데미안은 여전히 놀란 눈을 깜빡거리는 미카엘에게 괜히 입안까지 보여주었다. 그런다고 뭐가 보이겠냐마는 미카엘은 그 안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안심한 얼굴을 했다.
“정말로 안 아프세요?”
“그래. 그냥 피비린내가 날 뿐이야.”
사실 목 안도 타들어 가는 듯 아팠지만, 미카엘이 정말로 유리시아를 증오하게 될 것만 같아서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온건한 벌 아닌가? 다짜고짜 혀를 자른 것도 아닌데.
‘내가 영체로 너무 오래 살았나.’
데미안은 이불로 제 입가를 꼼꼼하게 닦아 주는 미카엘을 내려다보며 세대, 아니, 세기 차이를 느꼈다.
“나히덴이 또 뭐라 하던가.”
“사형들한테 쫓기고 있으니 도움을 달라고 하셨어요.”
미카엘은 전해야 할 말을 모두 전달하고는 그에게 빨리 가 봐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지만, 데미안은 베개에 도로 머리를 깊숙이 파묻을 따름이었다.
“나히덴이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협조적이고, 호기심 많고, 남을 보살피기 좋아하는 상냥한 사람이요.”
“그래. 하지만 그는 생전에 피도 눈물도 없는 퇴마사였어. 하도 성정이 잔혹하고 사나워서 그나마 사형들에게만 마음을 열 정도였지.”
사람은 성격이 크게 변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180도 달라졌다면, 그건 그가 정신적으로 심하게 무너졌다가 인격이 재확립되어 원형을 알 수 없어졌기 때문일 거다.
나히덴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의 밝고 낙천적인 성품은 한번 밑바닥까지 치달았기에 새로이 얻은 성질이었다.
“한마디로 심하게 미친 사람이란 이야기지.”
데미안은 부드럽게 웃으면서 나처럼 말이야, 하고 말을 덧붙였다. 그 또한 생전엔 개차반 같은 남자로 통하지 않았던가.
선한 마음을 지닌 신실한 왕자와 달리 데미안은 신앙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가짜 성기사였다. 하지만 이제 왕자는 죄인이 되어 있고, 가짜 성기사는 대천사가 되어 신을 모시고 있으니 인생이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영체는 제정신이 아닐수록 강한 이가 많아. 그만큼 고통받았기 때문이지. 그러니 나히덴도 네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사실 데미안은 “영체는 죽으면 또 되살리면 돼.”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그랬다간 미카엘이 마음 좀 곱게 쓰라며 꼬집을 게 뻔했기에 일부러 달리 말했다.
“아, 나히덴이 호법 대장군이란 말은 했던가?”
“아뇨. 하지만 그분께서 말씀하셨어요. ‘아이고, 호법 장군 죽네!’ 하고요.”
또 엄살을 부렸나 보군.
데미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호법 장군은 우리로 치면 응징의 천사와 같아. 그러니 설사 둘째에서 여덟째 사형까지 죄다 오더라도 나히덴에겐 상대가 되지 않을 거다.”
“그럼 첫째 사형은요?”
“그는, 음. 사제들의 유치한 싸움에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라서…….”
데미안은 비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그는 조심해라. 우리 같은 미친놈이 아니라 정말 정상인이거든.”
왜 ‘우리’죠?
미카엘은 일순 뾰족한 눈초리로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그는 인자하고 자애로운 성품을 지닌 인격자야. 보통 그런 놈일수록 뒤로 이상한 짓을 하기 마련인데 탈탈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더군. 조심하는 게 좋아.”
“음. 그렇군요.”
“내가 하리엘이나 나히덴을 가까이하고, 유르엘과 젠티엘을 멀리하는 것도 같은 이유지.”
미친놈과는 어울리고 인격자는 조심하라는 스승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미카엘은 가만히 웃음 짓기만 했다.
“요리했나?”
침실 밖에서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데미안이 몸을 일으키며 묻자, 미카엘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며 답했다.
“네. 먼저 씻고 나와서 드시겠어요?”
왜 저렇게 뭔가를 먹이는 데 열심인 거지.
솔직히 말해 미카엘의 요리는 별로 맛있진 않다. 맛없는 건 아니지만, 차라리 나가서 사 먹는 게 나을 정도다.
미카엘의 요리 스승은, 그러니까 데미안은 야영할 때 간편하게 뭔가를 해 먹는 정도밖에 몰랐다. 엉성한 스승 아래에서 뛰어난 제자가 나오는 경우가 드물게 있긴 하지만, 그게 두 사람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 그럴까.”
하지만 왕자가 손수 요리를 만들었다는데 마다할 수는 없었다. 이젠 나라가 없으니 그도 왕족이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데미안 안에서 미카엘은 귀하신 분이었다.
몸을 정화하면 번거롭게 목욕할 필요도 없지만, 미카엘이 씻고 나오라 했으니 데미안은 오래간만에 욕실에 들어가 육신을 씻어냈다.
‘망할 물총 새끼.’
훤한 욕실 아래에서 제 나신을 내려다보며 데미안은 바로 귀하신 분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리 마음대로 쓰라고 했다지만, 온몸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심지어 이 미친놈은 굵은 펜으로 데미안의 아랫배에 하트를 엄청나게 그려 놨다. 어찌나 빼곡히 그려 놨는지 무슨 저주를 건 것 같아서 등이 오싹할 정도였다.
이런 짓을 하고도 ‘우리가 미친놈’이라는 말에 뾰족한 눈을 하다니. 정말 양심도 없는 새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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