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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저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염치없다는 건 아는데…….”
염치? 지금 염치란 말을 했어?
그 짧은 사이 나히덴이란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한 미카엘이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부탁을 하려고 저러는 거지?
“우리 애는 아직 격이 낮은 영물이라 밥을 먹어야 하거든. 그런데 내가 며칠 동안 제대로 밥을 먹이지 못했어…….”
나히덴의 눈이 먹음직스러운 요리가 담긴 냄비로 향하자, 미카엘이 가만히 웃었다. 선하게 웃는 얼굴과 달리 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저게 뭔데 내가 만든 요리를 먹겠다는 거지?’
미카엘은 가난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애쓴 왕자였다. 왕자. 백성들의 머리 위에 존재하는 지배자. 그는 철저한 계급 사회의 상류층이었다. 그러니 남을 대접할 때 절대로 돈을 아끼는 법이 없었고, 누군가 공손한 태도로 부탁하면 거절하지 않고 크게 베풀었다.
하지만 그 안에 손수 만든 요리나 직접 수를 놓은 손수건 따위는 들어 있지 않았다. 왕족이 품을 들인 건 오직 그가 사랑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었다.
한마디로 요리도, 잘 다려 놓은 옷도, 노란 실로 깜찍하게 고양이 모양 수를 놓은 손수건도, 모두 데미안 전용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방에서 지갑을 들고 나온 미카엘이 그 안에 든 지폐를 모조리 깨끗한 봉투 안에 넣으며 말했다.
“다 쓰셔도 돼요. 혹시 더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신전에 와서 데미안더러 달라고 하시고요.”
나히덴이 미안한 얼굴로 냄비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그냥 저걸 줘도 되는데.”
그냥 저거라니. 내가 한 요리더러 그냥 저거라니!
미쳤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데미안의 친구에게 못되게 굴 수는 없었다. 혹시 데미안이 아랫사람 하나 제대로 부리지 못한다는 평을 들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데미안의 체면을 가장 구기는 사람도 미카엘이었지만, 데미안의 체면을 가장 신경 쓰는 사람도 미카엘이었다. 정작 데미안은 자기가 개자식으로 보이든, 빈 지갑 전사로 보이든, 불효자식으로 보이든 별 신경 쓰지 않겠지만.
“저건, 음…… 안 되겠네요.”
다급히 변명거리를 떠올려 보던 미카엘이 고고하게 앉아 있는 개를 흘깃 쳐다보고는 싱긋 웃었다.
“제 정액을 넣었거든요.”
“푸으읍!”
정말로 차를 뿜어내는 사람이 다 있군.
미카엘은 아주 잠시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히덴을 쳐다보았지만, 이내 표정을 바꿔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으세요?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적나라하게 말했죠?”
충직한 개는 미카엘이 자기 스승을 욕보였다고 생각했는지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하지만 미카엘은 가늘게 웃으면서 고개를 돌려 버릴 뿐이었다.
그 모습이 꼭 목줄을 맨 사나운 개를 담벼락 위에서 놀리는 못된 고양이 같았다.
“아니야, 한 살 선생. 좋은 걸 배우고 가!”
나히덴은 도리어 하하 웃으며 좋아했다.
예민한 제자들과 달리 나이 든 스승들은 저열한 성적 농담이나 인종차별적인 농담 따위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히덴도 한때 데미안의 성질을 긁어 보겠답시고 “와! 엉덩이 한번 봉긋하니 예쁘네, 절세 미남. 그걸 주물럭거려 줄 어린 애인이 없다는 게 아쉬울 정도야!” 하고 시시덕거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거기에 한술 더 떠 “자네처럼 조그만 엉덩이에 엄지손가락만 한 걸 가진 사람이야 부러울 수밖에 없겠지.” 하고 대꾸했다.
깜짝 놀란 나히덴이 대체 언제 내 걸 본 적 있느냐고 되묻자, 데미안은 점잖게 웃으면서 “아제트인 자지는 죄다 엄지손가락만 해서 바닥에 떨어뜨리면 그 옆에 있는 생강이 자기 건 줄 알고 주워 간다던데.” 하고 인종차별적인 농담까지 얹어 되돌려 주었다.
나히덴은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손뼉까지 치면서 좋아하고는 신전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에게 돼지고기와 생강으로 국물을 낸 국수를 사 주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무던한 데미안이라도 옆에서 들려온 “내 자지 육수 맛이 좀 어때?” 하는 농담을 듣고 국물을 뿜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한참 웃은 후 서로 주먹으로 한 대씩 후려치고는 각자 갈 길로 헤어졌다. 아마 둘 다 속으로는 ‘저 새끼는 진짜 미친놈이야.’라고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그 뒤에도 또 만나고 같이 어울리는 걸 보면 둘 다 미친놈들이었다.
“결계 때문에 내 제자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으니까 우린 이만 가볼게. 절세 미남이 일어나면 나히덴이 사형들에게 쫓기고 있으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고 전해 줘.”
“도와달라고요?”
미카엘이 슬며시 미간을 찌푸리자, 나히덴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나도 절세 미남한테 도움을 많이 줬어! 그 계산적인 남자가 자기한테 도움도 되지 않는 사람을 곁에 둘 것 같아?”
“도움이라고요?”
미카엘이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나히덴을 아래위로 훑었다. 아무리 봐도 데미안이 그에게 도움을 구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아! 그 많은 신령조차 쉽게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잘 숨어 있으며, 같은 천사에게 맡기기 어려운 인물 하나가 떠올랐다.
“하리엘의 도피를 도우셨나 보군요.”
나히덴은 빙긋 웃었다.
“이 친구,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머리도 아주 좋네.”
“웬만한 일은 직접 하시는 선생님이니 남에게 맡길 만한 일은 그리 없을 테니까요. 그 하리엘을 데려오려는 것도 선생님께서 부재하셨을 때 절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두 눈을 내리뜬 미카엘이 풀이 죽은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전 그냥 선생님의 짐이네요.”
“왜 그런 말을 해.”
나히덴은 깜짝 놀라서 미카엘의 어깨를 두드리려다가 그가 신체적인 접촉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고는 도로 손을 거두었다.
“설사 짐이라고 해도 천년 묵은 나무에 몸 좀 기대는 게 뭐가 부끄러워? 오히려 그 1년 사이에 돈도 잔뜩 벌어 놨지, 심신 단련도 했지, 그 와중에 절세 미남까지 꼬셔서 연애하고 있는데 한 살은 어마어마하게 대단하지.”
말하다 보니 허탈해진 듯 나히덴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난 4천 년 동안 뭘 했지? 아! 루테를 키웠지. 좋아, 적어도 4천 년 중의 20년은 쓸모 있는 시간이었어!’
나히덴은 잘 넘어지지도 않았지만, 넘어져도 회복이 아주 빨랐다.
“한 살, 들어 봐. 쓸모는 남이 부여하는 거야. 난 하는 게 없어 보여도 누군가에겐 아주 쓸모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기가 울고 먹고 싸기만 한다고 쓸모없는 존재야? 아니잖아.”
미카엘은 으르렁거리듯이, 아니, 하악질을 하듯이 매섭게 대꾸했다.
“전 아기가 아니에요”
“영체로서 아무 경험이 없으니 매한가지지. 데미안도 한 살 때는…….”
인간 출신 운운하는 대천사들을 죽여서 하늘나라로 돌려보내 어머니께 가정 교육을 다시 받게 하고, 누가 대악마의 ‘대’자만 꺼내도 바로 달려가서 죽이는 통에 대악마를 자칭하는 악마들이 없어지고, 블람하고 싸우다가 사지가 찢어져서 본인도 하늘나라로 돌아갔지.
부모가 학을 뗄 정도로 지나치게 활발한 한 살이었다. 유리시아도 내심 “저 미친놈은 뭐지?”라고 생각하셨으리라. 아! 순정 또라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신 것도 그분이었지.
“데미안은 활약이 좀 많긴 한데 그건 사지가 찢어져도 복구해 줄 신이 계셔서 그런 거고. 한 살은 상황이 다르잖아?”
미카엘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이 자신의 안전에 집착하는 것도 유리시아가 치유해 주지 않을까 봐 그게 두려워서였으니까.
“사특한 존재에서 벗어나 천사가 되고 나면 한 살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별 신경도 쓰지 않을걸? 그러니 지금 과보호의 단맛을 실컷 누려 놔.”
“그 말을 들으니 영원히 연약하게 살고 싶네요. 그럼 선생님이 제게서 눈을 절대로 떼지 못하실 거 아니에요?”
나히덴은 하하 웃었다. 참 성가신 애네!
“이거 하나만 기억해. 데미안은 지금 한 살 때문에 사는 거야. 그러니 절대로 그 앞에서 짐이니 쓸모니 그런 말 하지 마. 만약 내 제자가 그런 말을 한다면 난 진짜 울어 버릴 거야!”
안절부절못하던 루테가 바로 순종적인 태도로 말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응. 그래야지! 자학이 심한 제자보단 차라리 건방진 제자가 나아. 알았지? 내 말 명심해. 그리고 데미안에게 꼭 말을 전해 주고.”
나히덴은 이 동네를 배회하고 있을 것이며 자신이 자주 갈만한 곳에 있을 거라고, 이름은 예전에 쓰던 그 이름을 그대로 쓸 거라고 말했다.
미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침실로 돌아온 미카엘이 서늘하게 식은 데미안을 만지작거리다가 그 김에 그 몸을 몇 번 더 ‘사용’한 뒤 마침내 데미안이 눈을 떴다.
그 옆에 누워 데미안의 속눈썹 개수를 세던 미카엘은 얼른 눈을 감고 자는 척했다.
“씹…….”
몸이 불편한지 반사적으로 욕설을 뱉으려던 데미안이 제 옆에 곱게 누워 있는 미카엘을 바라보고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제 통증의 원인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그 속눈썹 위에, 콧등 위에, 입술 위에 간지러운 입맞춤을 하고는 다정히 뺨을 쓰다듬었다.
보지 않아도 애정이 담뿍 묻어나는 얼굴이 눈에 선했다.
“자는 줄 알았죠?”
그 얼굴을 얼른 보고 싶어서 미카엘은 자는 척을 그만두고 두 눈을 떴다.
“아니.”
데미안은 조용히 웃고는 손가락으로 미카엘의 가슴을 두드렸다.
“심장 소리가 오죽 시끄러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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