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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미카엘은 너무 무례해 보이지 않도록 제 어깨 위에서 나히덴의 손을 조심스럽게 치워냈다. 그는 데미안의 과거사를 알고 있는 데다 무엇이든 솔직하게 말해 줄 수 있는 귀한 이였기에 좋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데미안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는 미카엘을 너무 과보호하여 이런 적나라한 이야기는 해줄 것 같지 않았다.
“선생님하고는 오래 알고 지내셨나요?”
“데미안이 영 살 때부터 알았지. 그가 승천했을 때 화제의 신인을 구경하려고 온갖 신과 사도가 몰려들었거든. 물론 나도 사형들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어.”
영 살! 데미안에게 붙이기엔 지나치게 깜찍한 단어여서 미카엘은 그만 무슨 질문 하려고 했는지도 깜빡 잊고 말았다.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선생님도 영 살이라고 놀리셨어요?”
나히덴은 자신만만하게 “그럼!” 하고 말했지만, 이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한 번만 놀리고 그 뒤론 놀리지 않았어.”
“어째서요?”
나히덴은 왜 데미안이 남들에게 늘 차갑고 무뚝뚝하게 구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나라면 저 잘생긴 얼굴을 듬뿍 써먹어 줬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다.
「그리 놀릴 정도로 내가 귀여운가?」
하지만 코앞으로 불쑥 다가온 절세 미남을 보고는 깨달았다. 저리도 고아하고 잘생긴 이가 매혹적으로 굴기까지 하니…… 과해도 너무 과했다! 순간 배 속까지 울렁거려서 나히덴은 자기가 저 농을 듣고 임신한 건 아닐까 두려웠을 정도였다.
“난 4천 년 동안 데미안만큼 잘난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나히덴은 진한 눈썹을 위로 올린 그가 근사하게 미소 짓는 걸 떠올리고는 등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아니잖아! 절세 미남은 귀엽지는 않잖아! 한 살이야 반려니까 데미안이 귀여워 보일지 몰라도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미카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차마 남 앞에서 그리 말할 수는 없어서 말없이 웃기만 했다.
데미안은 장엄한 산과 같은 남자라서 멋지거나 위엄이 넘친다는 말이 어울리지, 귀엽다는 말은 그에게 쓰기엔 좀 무엄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왜 당신을 친구라고 하시지 않는 거죠? 그 하리엘이란 사람은 친구라고 하시던데요.”
“난 무영체가 아니라 영체라서 그래. 절세 미남은 외모 때문에 하도 데인 게 많아서 그런지 무영체가 아니면 마음을 잘 열지 않더라고. 봐, 자기만 보는 그 개한테도 곁을 내주지 않잖아.”
“무영체요?”
정신체 중에는 특수하게도 영혼이 없는 존재가 있었는데 이들은 따로 무영체라고 불렸다. 유리시아처럼 인간이 승천하여 신이 된 게 아닌, 태초부터 존재했던 고대의 신과 그가 창조하여 일체의 욕구가 없는 사도들이 이에 해당했다.
무영체는 판단력은 있으나 감정이 매우 희박하여 정해진 일만 하는 기계와 비슷했다. 하지만 학습 능력이 있어서 세월의 흐름에 따라 차차 영체처럼 변화하는 이들도 있었다.
“데미안은 무영체 중에서도 최초의 사도들에게만 마음을 내주고 이름을 불러 줬어. 아, 하리엘도 1세대 천사야.”
유리시아가 처음으로 창조한 사도들, 흔히 말하는 1세대 천사들은 삐거덕거리는 목석과도 같았다. 그들은 도구적인 측면이 강하여 자아나 학습 능력이 아주 미약했고 신의 명령에 따르기만 할 뿐 개인적인 호불호 같은 게 없었다. 그래서인지 미묘한 사안은 잘 판단하지 못하기도 했다.
한 번은 신이 ‘어린아이를 희롱한 자에겐 벌을 내린다.’라고 명령하자, 천사들은 아기의 코를 훔친 척하며 장난한 부모에게 모두 벌을 내렸다. 다음에 신이 ‘어린아이를 성희롱한 자에게 벌을 내린다.’라고 명령을 수정하자, 천사들은 아기의 기저귀를 갈면서 생식기를 만진 부모에게 모두 벌을 내렸다.
“도둑질한 자를 벌하라고 했을 땐 세상의 많은 어린이가 천벌을 받았지.”
“극단적이군요.”
“그래. 선악을 판별하는 기능은 아주 고차원적인 거거든.”
1세대 천사들은 미추 또한 구별하지 못했다. ‘검은 머리의 미남이 데미안이다.’라고 말을 하면 여러 흑발의 남자 중에서 데미안을 골라내지 못할 정도였다.
사교적인 접촉 또한 이해하지 못해서 데미안이 어깨를 두드리거나 악수하려 손을 내밀면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고는 슥 피해 버렸다.
“선생님께서 아주 좋아하셨겠네요. 그분은 변태라서 누가 자길 냉대하거나 재수 없게 구는 걸 좋아하시잖아요.”
미카엘이 으득으득 이를 갈며 말했다.
“맞아. 친구가 되자며 천사들을 귀찮게 굴 정도였지. 천사들은 차갑게 거절하고 말이야. 내가 그에게 늘 차이는 것처럼!”
나히덴은 하하 웃었지만, 그 웃음엔 이내 씁쓸함이 배였다.
“하지만 모두 작별 인사할 땐 데미안더러 우린 좋은 친구였다고 말해 줬어.”
미카엘은 지난번에 데미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하리엘을 제외한, 8천 살 먹은 천사와 악마는 모두 죽었다고. 그 말은 이제 데미안에게 남은 친구란 오직 정신이 이상해진 하리엘뿐이란 뜻이었다.
“끝끝내 데미안이 잘생겼다는 건 인정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나히덴은 그립다는 듯 작게 웃으며 말했다.
“참 특이하고 재미있는 애들이었어. 나중에는 어설프게 농담도 할 줄 알아서 4천 살 연하라고 날 놀렸다고. 그러면 난 데미안을 3천 살 연하라고 놀리고 말이야.”
저희끼리 잘 놀고 있는데 어른이 끼어들어서 성질이 난 어린애처럼 나히덴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유리시아도 참 못되셨지. 모든 천사가 너에게 넘어갔다고 비꼰 탓에 데미안이 그 뒤로 사람들의 이름을 잘 불러주지 않게 되었잖아.”
“이름은 왜요?”
“네가 백 번만 이름을 불러주면 다들 너에게 넘어가는 것 같구나, 하고 말씀하셨거든.”
“와, 진짜 못됐다.”
“그렇지? 데미안은 그게 신경 쓰였던 게 틀림없어. 그래서 그 개도 이름으로 불러주지 않잖아.”
불쌍한 데미안. 일어나면 꼭 껴안고 예뻐해 줘야지. 앞으로는 조금만 꼬집고.
미카엘이 웬일로 착한 다짐을 했다.
“아! 잠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우리처럼 강인한 육체를 지닌 영체가 왜 잠자리를 하고 난 뒤에 피로를 느끼느냐! 그건 잠자리 상대에게 내 영력을 불어넣게 되어서 그래.”
“영력이요?”
“그래. 관계를 맺으면 자연스럽게 영혼이 지닌 힘을 서로 뒤섞게 되거든.”
혹시나 미카엘이 충격을 받을까 조심하면서 나히덴이 조심하면서 말을 이었다.
“넌 사특한 존재라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안 좋은 영향을 미쳐. 그러니 그 체액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면 더욱 안 좋지. 괜히 악마들이 인간에게 자기 피를 먹이려 하는 게 아니야.”
말하다 보니 의문이 들었는지 나히덴이 슬며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이상하네. 데미안이 너한테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네가 정화되면서 몸이 많이 피곤해질 텐데. 좋은 기운이라고 해도 어쨌든 남의 영력을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
아, 역시나. 나히덴은 두 사람의 관계를 반대로 생각하는 듯했다.
“뭐, 어쨌든 좋은 거니까 힘닿는 대로 많이 해 달라 그래! 네 사특한 기운을 누르는 데도 도움이 될 거야.”
“만약 반대로 하면요?”
“반대라니…… 뭐? 네가 절세 미남에게 그런 걸 하겠다고?”
나히덴이 두 눈을 크게 뜨자, 미카엘이 재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러니까, 그냥 궁금해서요. 체액을 몸 안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 꼭 하나인 건 아니잖아요.”
몸은 순결하나 머릿속은 아주 음탕한 나히덴은 그 말을 단숨에 알아듣고 요사스럽게 웃었다.
“뭐야, 둘이. 그렇고 저렇고 이런 걸 다 하는 거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 말이야.”
“머리에 피가 왜 마르죠? 그러면 죽는 거 아닌가요?”
그러게. 그건 나도 잘 모르겠네.
나히덴은 할 말이 없어져서 괜히 자기 뺨만 긁었다.
“제가 선생님을 아프게 하거나 약하게 만드는 건 아니겠죠?”
미카엘의 낯빛이 어두워지자, 나히덴이 크게 손사래를 쳤다.
“데미안처럼 신격을 얻은 이라면 등이 간지러운 정도일 거야! 그 기운을 가라앉히려면 또 성력을 써야겠지만…… 모기가 피 좀 빨았다고 코끼리가 빈혈로 죽을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
나히덴은 괜히 자기가 의기양양하며 말했다.
“데미안은 진짜로 대단한 존재거든.”
“그건 저도 알아요.”
“그래? 그 대단한 데미안이 너에게 뭘 가르치고 있는데?”
“몸과 신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고 계세요. 그리고…… 아, 심리학을 공부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하셨어요.”
“흠. 우리랑 크게 다르진 않네.”
역시 데미안은 우리 쪽에 왔어야 했어.
블람만큼이나 미련이 깊은 나히덴이 작게 한탄하며 중얼거렸다.
“그래요?”
“육체 단련과 정신 수양을 시킨 거잖아.”
정신 수양…… 아.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 건가. 하기야 심리학을 공부하지 않았다면 미카엘은 자해한 흔적을 보고 수치스러워하거나 죄책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자해가, 적어도 환자 본인에겐 나쁜 게 아니며 그것이 필요했기에 한 일이라는 걸 안다.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라면 가시 박힌 줄이라도 잡아야 살지 않겠는가.
자해하는 사람의 심리라든지, 자살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라든지, 그런 걸 공부하면서 미카엘은 생전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자살하고자 하는 이에겐 그 욕구를 실천으로 옮기는 걸 막는, 소위 보호 요인이라는 게 존재하는데 미카엘에게 있어 데미안은 아주 큰 보호 요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죽고 싶었더라도 데미안을 생각해서 차마 그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면 왜 결국엔 자살했는가. 보호 요인보다 절망감이 더 커졌거나…….
‘누군가 보호 요인을 제거하려 했다든가.’
미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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