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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미안해, 한 살. 절세 미남이 어느 날 갑자기 신격을 얻은 것도 아닌데 그 누구도 그 과정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좀 불쌍하잖아?”
나히덴은 꼭 자기 스승처럼 자학하는 제자를 가만히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절세 미남이 이런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할 것 같지도 않은 데다 하리엘은 제정신이 아니라서 과거 일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테니 나 아니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해 주겠어?”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었어요…….”
탁자 위에 붉은 피눈물이 떨어져 내렸지만, 나히덴은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이 피눈물을 흘리는 걸 하도 많이 봐 왔기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응. 그럴 것 같았어. 원래 새침하게 구는 사람 중에 숨은 변태가 많다잖아.”
나히덴은 기어코 자기 제자의 복수를 하고는 싱크대에 걸려 있던 깨끗한 행주를 그에게 건넸다.
미카엘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 나히덴은 평생 손수건이라곤 한 장밖에 가져본 적이 없는데 그걸 데미안이 가져가서는 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더는 건네줄 손수건이 없었다.
“그냥 알아만 줘. 너무 티 내진 말고. 절세 미남은 한 살이 건방지게 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미카엘은 행주 대신 고급스러워 보이는 자기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아내고는 찬장 안에서 쿠키를 꺼내 놓았다. 달콤한 초콜릿이 붙은 쿠키인 걸 보니 데미안에게 주려고 사다 놓은 것 같았다.
‘아니, 이 비싼 걸 턱턱 내놓다니! 역시 왕자로군!’
나히덴은 점점 더 미카엘이 마음에 들었다.
루테는 쿠키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지만, 나히덴은 사양하는 기색 없이 양손으로 쿠키를 덥석덥석 집어 먹으면서 덤으로 자기 취향을 알려주었다.
“아! 나는 데미안하고 달리 말 잘 듣고 귀여운 사람을 좋아해. 너하고는 정반대이지? 그래도 난 네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미카엘의 입가에 아주 잠시 서늘한 웃음이 서렸지만, 그는 귀한 과거사를 들려준 사람에게 까칠하게 굴진 않았다. 오히려 루테가 그 말을 듣고는 몸을 한껏 움츠린 채 순종적인 개와 같은 눈으로 나히덴을 올려다보았다.
암만 찌그러뜨린다고 저 커다란 덩치가 손바닥만 해지는 것도 아닌데 최대한 작아 보이려 애쓰는 모습이 무척 애잔하면서도 우스워 보였다.
“이걸 발라. 영체에게도 듣는 금창약이야. 블람께서 아홉 제자에게만 주시는 귀한 물건이지.”
미카엘에게 묵직한 연고를 건네면서 나히덴이 히죽 웃었다.
“유리시아는 대천사에게 이런 것도 안 주시지?”
혹여 몸에 상처가 남을까 싶어 미카엘이 냉큼 연고를 바르며 말했다.
“저 개종할까 봐요.”
나히덴은 데미안이 피 냄새를 맡기 전에 얼른 창문을 열어 부엌을 환기하면서 웃었다.
“그래.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나와서 향만 올리고 가. 돈 좀 있으면 내 앞으로 등을 사서 신전에 달아 줘도 좋고.”
“등을 달면 당신에게 무슨 이익이 되나요?”
“내 격이 높아지지!”
사실 활동비도 더 많이 나오긴 하지만, 대장군이 속세의 물질에 너무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간 체면이 살지 않을 것 같아서 나히덴은 슬쩍 말을 삼갔다.
미카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한 번에 많은 등을 사서 달아도 효과가 있나요?”
장난기가 발동한 나히덴이 일부러 사기꾼처럼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되물었다.
“등이 하나에 얼마일 줄 알고? 아주 비싼데!”
남은 연고를 돌려준 미카엘이 뭘 그런 걸 걱정하느냐는 듯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돈 걱정은 하실 필요 없어요.”
“한 살 선생!”
멋지군! 부티가 줄줄 흐르지만, 실상은 빈 지갑 전사인 데미안보다 훨씬 나은데그래!
나히덴은 진심으로 감탄하면서도 한 살짜리를 놀리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한 살 형님이라고 불러 줄까?”
“저보다 나이 많은 동생은 좀 부담스러워서요. 그런데 등은 몇 개 정도를 달아야 할까요?”
눈앞에 있는 이는 무척이나 앳되어 보였지만, 4천 살 먹은 할아버지라 그런지 은근히 연공서열이라든지 체면 같은 걸 신경 쓰는 것 같았다. 아니, 아제트인이라서 그런가.
여하튼 미카엘은 그를 배려해 너무 적은 수의 등은 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만 개 정도면 될까요?”
나히덴은 신전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처치가 곤란해질 등을 떠올리며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그 등에 하나하나 제 이름이 새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민폐도 그런 민폐가 따로 없었다.
“아냐! 내 체면은 싸! 등 두 개 가격이면 살 수 있어!”
“그럼 제가 알아서 살게요.”
눈앞에 있는 이는 아주 값비싼 초콜릿 쿠키를 턱턱 내주는 이였으니 나히덴은 도저히 그의 금전 감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곱게 자란 외둥이라 뭔가를 나누는 데 인색하지 않은 건가?
여하튼 나히덴은 그가 너무 많은 등을 사지 못하게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몇 개나 사려고? 아냐, 대답하지 마! 아무튼 1백 개는 넘어가면 안 돼.”
“그럼 방문할 때마다 99개씩 달아드릴게요.”
이 친구, 정말로 손이 크군! 손이 크니 아마 거기도 크겠지? 그 대물만큼이나 정력도 듬뿍듬뿍 샘솟아라!
한 살의 재력에 흠뻑 반한 나히덴은 미카엘에게 복을 빌고, 데미안에게 저주를 걸어 주었다.
“차 드시고 계세요. 전 마음이 너무 안 좋아서…….”
내내 미카엘을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던 루테는 그가 좀 안됐다고 생각했는지 누그러진 눈빛을 했다.
“잠깐 가서 선생님 가슴 좀 만지고 올게요.”
하지만 이어진 말에 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응. 그래! 우울할 땐 연인의 가슴을 만지는 게 최고지!”
평생 연인이 있었던 적도 없으면서 나히덴이 한술 더 떴다.
‘남자 가슴도 효과가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데미안은 웬만한 여자만큼 가슴이 크니 효과가 있겠지. 아무튼 내 건 효과가 없을 거야!’
나히덴이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납작한 가슴을 주물럭거리자, 옆에서 루테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가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했다가 바빴다.
“아직도 주무세요?”
조심스럽게 침실 안으로 발을 내디딘 미카엘이 고른 숨소리를 내는 데미안 옆에 살포시 몸을 눕히며 입술을 달싹였다.
“나히덴이 그러는데…….”
선생님도 자학에 일가견이 있으셨다면서요? 환청과 환각에 시달릴 정도로 고통이 심하셨다면서요? 우울증을 크게 앓으셨다면서요?
입안에 맴도는 말은 참 많았지만, 결국 흘러나온 건 별 의미 없는 말뿐이었다.
“여러 나라를 가 보셨다면서요?”
눈을 뜰 기력도 없는지 데미안은 두 눈을 감은 채 입술을 달싹였다.
“가 봤지.”
잠에 취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아진 데다 바짝 메말라 있었지만, 미카엘이 물으면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아름다운 풍경도 많이 보셨겠네요?”
“그래.”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셨어요?”
“응.”
계속되는 질문이 성가실 만도 한데 데미안은 졸음에 흠뻑 취한 저음으로 대화에 어울려 주었다.
“그런데 같이 이야기할 사람이 없었어.”
순간 코끝에 물이 솟은 것처럼 찡해서 미카엘은 괜히 신경질을 부리듯 데미안의 가슴팍에 얼굴을 문질러대며 훌쩍였다. 데미안은 그 성가신 어리광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참새가 들어온 건 알았지만, 네게 해가 될 만한 이가 아니라서 내버려 두었는데.”
데미안이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나.”
맙소사! 종말의 신이 강림했다!
데미안의 검은 눈동자에 서늘한 살기와 무거운 위압감이 어리자, 화들짝 놀란 미카엘이 그의 두 눈을 부랴부랴 손바닥으로 덮어 버렸다.
「여러분! 종말이 일어났어요!」
「그럼 도로 재워!」
마치 웃기는 이인극 같은 어설픈 수습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누군가에겐 아주 무서운 종말일지언정 미카엘에겐 아주 만만한 이였기에 그 엉성한 처치에도 도로 두 눈을 감아 주었다.
그렇게 나히덴은 목숨을 한 번 건졌다.
“아, 아니에요. 참새가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저 혼자 슬퍼져서…… 누가 저한테 그런 게 아니에요.”
데미안은 정말로 피곤한지 하품을 한 번 하고는 도로 옆으로 돌아누우며 말했다.
“그래. 누가 괴롭히면 말해라. 난 이제…… 아니, 곧…… 그 무엇도 대항할 수 없는 존재가 될 테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실 필요 없어요. 당신이 민들레 홀씨처럼 약한 사람이더라도 전 당신에게 모든 걸 바쳤을 테니까요.
가만히 데미안을 내려다보던 미카엘이 그의 이마 위에 입맞춤하며 속삭였다.
“그럴게요, 나의 신.”
혹여나 제 진심이 그가 그동안 한 노력을 헛것으로 만들진 않을까 두려워 미카엘은 본심을 삼키고 그리 말했다. 그제야 안심한 듯 데미안은 눈을 감은 채로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기분은 좀 나아졌어?”
혹시 남의 집 고양이가 할퀴진 않을까 조심하면서 나히덴은 침실에서 나오는 미카엘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렸다.
“넌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적어도 데미안의 지독한 폐관 수련에 한해선 말이야. 그게 다 자기 욕심 때문에 그런 거지. 그게 왜 네 탓이겠어, 안 그래?”
나히덴이 또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수련 어쩌고, 라는 걸 보면 데미안이 관광지가 된 궁전을 찾아가는 행위를 일컫는 말 같았다.
“타인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자는 둘 중의 하나야. 성인(聖人) 혹은 호구. 넌 네가 완전무결한 성인이라고 생각해? 아니지? 그럼 호구라도 되지 말아야지. 속죄는 네 것만 하도록 해.”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나히덴은 직설적이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가르침을 전달했다. 미카엘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충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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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하고 계시고 앞으로도 더 잘하실 거예요.
좋은 일만 가득하여 당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고마울 일만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하세요!
아, 그리고 원고료 쿠폰 선물해 주신 아레온 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항상 미소가 지어지는 댓글에도 큰 힘을 얻고 있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