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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뜨자, 성 안엔 스케치북과 연필을 든 관광객 대신 그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사용인들과 화려한 부채를 살랑이며 흘깃 눈길을 건네는 귀족들이 가득했다.
「저기 봐, 제7 성기사단이야.」
「저 사람이 페르페오 공작의 첫째 아들이지?」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데미안을 힐끗거리는 귀족들의 눈에선 끈적거리는 탐욕이 느껴졌지만, 데미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 환각을 무척이나 많이 보았기에 이제 이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몸이 뒤로 밀릴 정도로 온 체중을 실어 ‘데미안’의 허리춤에 돌진한 아이는 초상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화사하게 웃는 얼굴 아래에는 생몰년도, 손대면 안 된다는 경고 문구도 붙어 있지 않았다.
「이번엔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수다스러운 새처럼 종알거리는 목소리는 가볍고 빨랐지만,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커다란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팔랑거리는 긴 속눈썹도 어여뻤고 날렵한 콧날에 난 연갈색 점도 앙증맞았다.
「꺼져.」
하지만 ‘데미안’은 무릎으로 자그마한 몸을 퍽 떠밀어 버렸을 뿐이었다. 왜 그땐 그가 이토록 귀엽단 걸 몰랐을까. 다른 귀족들이 그를 예찬하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으면서 왜 그땐 그가 이토록 사랑스럽다는 걸 몰랐을까.
「음. 저기, 고생이 많으셨어요.」
벌렁 나동그라진 왕자는 놀라서 두 눈을 끔뻑거리긴 했지만, 울지도, 인상을 쓰지도 않았다.
「선생님이 일부러 절 떠미신 건 아닌 걸 알아요. 전투를 마친 후엔 고양감 때문에 사람이 좀 날카로워질 질 수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아! 선생님이 그렇다는 뜻은 아니구요. 전 그냥, 아니에요.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왕자는 그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복도를 걷는 ‘데미안’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걸을 따름이었다.
「오늘 기분은 좀 어떠세요? 전쟁터에선 제대로 잠을 자기 어려우셨을 텐데 많이 피곤하시죠? 식사는 제때 하셨어요? 휴식은 충분히 취하셨구요? 저, 혹시 뭔가 이야기하고 싶으시면…….」
콰앙.
주눅이 든 얼굴로 ‘데미안’의 눈치를 보던 왕자는 그가 자기 바로 앞에서 방문을 닫아 버리자,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언제든 절 불러 주세요. 전 항상 기다리고 있을게요.」
미련이 남은 듯한 얼굴로 ‘데미안’의 방문을 바라보던 왕자는 검지로 문짝을 갉작거리다가 고개를 떨궜다.
「언제나 선생님을 위해 기도할게요.」
「꺼지라고!」
방 안에서 사나운 외침이 들려오자, 왕자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는 물기로 축축해진 코끝을 손등으로 대충 훔쳐내면서도 꿋꿋하게 울지 않았다.
“미안하다.”
살아생전엔 단 한 번도 그의 말랑말랑한 볼을 만져 준 적 없으면서 데미안은 왕자의 흰 뺨을 커다란 두 손으로 부드러이 감쌌다. 환각이란 걸 알지만, 벽에다 대고서라도 용서를 빌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난 이젠 두 번 다시 널 내치지 않을 거야.”
왕자는 ‘데미안’이 뭘 하든 그 모습이 좋아 보였는지 심지어 그의 걷는 모습마저 따라 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걸 조롱이라고 받아들이고는 더욱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한 번은 한 손에 다 들어오고도 남을 정도로 가늘고 연약한 목을 세게 움켜쥔 적도 있었다.
「내가 널 목 졸라 죽이면 안 되는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 봐.」
‘데미안’은 억지로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냈다. 의식적으로라도 목소리를 깔지 않으면 그만 참지 못하고 윽박지를 것만 같았으니까. 왕자는 뽀얗고 예쁜 손으로 데미안의 거친 손을 꼭 감싸 쥐며 답했다.
「저는 이 나라의 유일한 왕자예요.」
「……씨발!」
그리 힘이 실리지 않은 손으로 왕자를 팍 떠민 ‘데미안’은 그를 대신해 딱딱한 벽을 주먹으로 세게 두들겨 댔다. 그때마다 서늘한 벽이 퍽퍽 하고 폭력적인 소음을 냈다.
「무서워.」
등 뒤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데미안’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곳엔 미카엘이 벽에 등을 대고 쪼그리고 앉은 채 두 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나 무서워.」
최선을 다하진 않더라도 노력하는 자세를 좀 보여야 할 텐데 그럴 만한 의욕도 들지 않는지 왕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감정한 목소리로, 성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내숭을 떨고 있었다.
「내가 그리 우스워 보이나?」
눈가를 꿈틀한 ‘데미안’이 방향을 틀어 제 앞으로 다가오자, 왕자가 머리를 감싸던 손으로 이번엔 자기 얼굴을 가렸다.
「그런 게 아니에요. 전 단지, 음. 저희가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는 것 같아 보여서 잠시 분위기를 전환한 것뿐이에요.」
쫙 편 손가락 사이로 새파란 눈동자를 내민 채 데미안을 얼굴을 힐끔거리는 모습에선 여전히 겁먹은 기색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데미안’은 화가 났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머릿속을 들끓게 하던 분노는 약간 소강한 것 같았다.
「선생님이 답답해하시는 거 알아요. 궁전에 머무는 게 너무 싫으시겠죠. 어딜 가나 사람들이 눈길이 따라붙고 매일 다른 주제로 입방아를 찧어 대고…… 지긋지긋하신 거 알아요.」
「안다는 놈이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선생님, 당신이 이곳에 1년만 머물러 주셔도 수천 명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요. 그것도 굶어 죽거나 보잘것없는 감염으로 비참하게 죽는 사람들을요.」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지!」
데미안은 크게 고함을 지르는 ‘데미안’을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았다.
“상관있지.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살아생전엔 단 한 번도 어린 왕자를 쓰다듬어 준 적 없으면서 데미안은 그의 동그란 머리를 커다란 손으로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그깟 뒷이야기 좀 듣는 게 뭐 어떻다고.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칼로 찔러 죽일 땐 세상에서 가장 용감한 척하던 새끼가 형체도 없는 소문 앞에선 벌벌 떠는군.”
데미안은 장하다는 듯 왕자를 부드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맞아요. 제 욕심 때문에 한 짓이 맞아요. 하지만 선생님, 사람들을 많이 죽이셨잖아요. 그러니까 속죄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죽어서 지옥에 가실지도 몰라요.」
「닥쳐! 이 미친 종교쟁이 새끼!」
데미안은 자신이 입은 사제복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내 얼굴에 침을 뱉는군.
「절 광신자라 욕하셔도 괜찮아요. 아름다운 성기사를 강제로 성에 감금한 미친놈으로 역사에 남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선생님, 제가 말한 죽어 간다는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왕도 안에도 수두룩해요.」
「그래서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거지?」
「제가 다 보상할게요. 돈이든, 지위든, 뭐든, 제가 왕이 되면 다 선생님께 보상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몇 년만 더 참아 주세요.」
왕자가 바닥에 양 무릎까지 꿇자, 그 앞에 마주 무릎을 꿇은 데미안이 두 팔로 조심스레 그를 감싸 안았다.
“내가 보상하마. 내 평생을 바쳐 너에게 무엇으로든 보상하마.”
차가운 눈초리로 왕자를 응시하던 ‘데미안’이 무어라 말을 하려 하자, 데미안은 그가 듣지 못하도록 두 손으로 왕자의 귀를 막았다.
하지만 아무리 강한 힘을 지녀도, 아무리 고귀한 위치에 올라도, 인생은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 아무리 후회해도, 아무리 기도해도, 시간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 무엇으로부터도 널 지킬 수 있도록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자가 되겠다.”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입술을 바르르 떨던 왕자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다가 가느다란 흙과 열기가 만들어 낸 신기루처럼 한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여기로 오기만 해…….”
바짝 마른 가슴이 갈라져 새빨간 물줄기가 치솟은 뒤에야 데미안은 비로소 만족한 듯 눈을 감았다가 떠서 현실로 돌아왔다. 고통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때면 늘 반복해 온 자학이었다.
“변태도 이런 변태가 없지.”
곁에서 데미안을 지켜보던 나히덴이 손수건을 건네며 혀를 차자, 데미안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 피눈물을 익숙한 손길로 닦아 내고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서 따라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히덴은 초상화 속의 어린 소년을 한 번 바라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사랑이 뭐라고 사람이 이렇게까지 미칠 수 있단 말인가? 나히덴은 한 번도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아직 어린데도 점잖고 어른스러운 데미안이 한 번씩 이런 기괴한 짓을 벌일 때마다 속이 선뜩해졌다.
누굴 깊이 연모한다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인 것 같았다.
“당연히 강해질 수밖에 없겠지. 가기만 하면 피눈물이 나오는 장소가 있는데, 아주 직방으로 영혼을 단련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데, 어떻게 절세 미남이 강해지지 않을 수 있겠어?”
팔목에서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서 황급히 소매를 걷은 미카엘은 살덩이가 한 움큼 떨어져 나간 팔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다른 쪽 손을 살폈다. 손톱 아래엔 새빨간 피와 으깨진 살갗이 엉겨 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