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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내키지 않는다면 하지 마세요. 나중에 저랑 데미안이 가서 자르고 먹이면 되니까요.”
미카엘이 으름장을 놓듯이 말했다. 어린 영체라 그런지 그는 참 혈기가 왕성했다.
‘그러고 보니 루테도 어릴 땐 으르렁거리고 캉캉 짖고 먹이를 주면 구석으로 물고 가서 등을 돌린 채 허겁지겁 먹곤 했지.’
눈앞에 있는 이가 귀를 바짝 눕힌 새끼 고양이라고 생각하자 나히덴의 낯빛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의 눈엔 천 살짜리 데미안도 너무 조숙해져서 서운한 옆집 청소년으로 보일 정도니 미카엘은 그야말로 핏덩이나 다름없었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을 못 들어 봤어? 한 가지 죄로 이중 처벌을 해선 안 돼.”
“왜 안 되죠? 피해자는 몸도 상처 입고 거듭해서 마음도 상처 입을 수 있는데요. 더 나아가 일상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기도 하고요.”
한 마디를 하면 세 마디가 돌아오네.
나히덴은 털을 삐쭉삐쭉 세우고도 하아악 하고 당돌하게 덤벼드는 미카엘을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알았어요.”
나히덴이 무어라 하면 데미안에게 고자질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물어뜯어도 그가 웃기만 하니 도리어 미카엘은 시들해졌다.
“그럼 우리가 하는 건 응징이 아니라 피해자를 위한 추가 서비스라고 해 두죠.”
“아이고…….”
“왜요? 그쪽 종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 아니에요? 업보. 그 자식은 그냥 업보를 치르는 것뿐이에요.”
나히덴은 못 말린다는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렇게 되면 더는 말릴 방도가 없었다. 어차피 데미안과 관련된 일이라고 하면 뭐라고 할 장군도 없을 터였다. 장군들은 첫째 사형만큼이나 데미안을 두려워했으니까.
“그런데 그 집에 있던 섀넌이란 처자는 어떻게 하다가 그 일에 엮인 거야?”
미카엘이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해 주자, 나히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처자가 들어 왔다던 과도는 어쨌어?”
“선생님께서 없애셨어요.”
나히덴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아! 절세 미남아. 선한 이를 아끼는 건 알지만, 과해도 너무 과하군!”
“과하다고요?”
“종교는 달라도 우리 모두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추구하지. 옳은 일을 한 자에게는 상을, 죄를 저지른 자에겐 벌을 주니 말이야. 하지만 평소에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지도 않던 이를 강제로 떠밀어서 선행하게 만드는 건 곤란하지. 그런 식으로 인간사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미카엘은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나히덴이 말을 끝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게다가 그 처자는 칼을 들고 왔다며? 그건 살의를 드러낸 거잖아. 아무리 그 죄인이 나쁜 놈이라고 해도 사람을 죽이려 한 이를 감싸 주면 안 되지.”
“칼을 들었다고 해서 다 살의가 있다는 뜻은 아니죠. 그저 위협하는 용도로 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섀넌은 신체를 단련하지 않은 평범한 여성이에요. 당연히 힘으로는 성인 남성을 제압하기 힘들 테니 뭐라도 필요했겠죠.”
“그 처자가 결국 사람을 찌르지 않았을 거라고 누가 보장하지?”
“저와 데미안이요. 우린 섀넌에게 말했어요. 우리가 그 집에 가서 제니스를 보호할 거라고요. 그걸 알면서도 왔으니 당연히 우리가 그 장소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겠죠. 그런데 굳이 목격자를 만들어 가며 누군가를 살해하겠다고요? 비록 적극적으로 선을 행한 적은 없다고는 하나 누군가를 해한 적도 없는 사람이요?”
미카엘은 술집에서 섀넌을 과도하게 경계하며 데미안에게 치근덕거렸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선생님은 그저 섀넌에게 길을 제시했을 뿐이에요. 선택하고 행동한 건 그녀이죠. 이런 걸 적극적인 선행이 아니라고 하면 뭐라고 불러야 하죠? 게다가 제니스를 지켜주겠다고 공언한 건 무려 데미안이라고요? 그 튼튼한 분이 누구에게 무슨 짓을 당할 것 같지도 않은데 왜 굳이 찾아와 봤겠어요? 당연히 제니스를 걱정해서겠죠. 당신네 신도를 말이에요.”
데미안의 판단을 단 한번도 의심한 적 없다는 듯 미카엘이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자기도 막 그렇게 복권에 당첨되게 해줘도 되냐고 따졌던 주제에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섀넌처럼 집에 가서 과도까지 챙겨온 뒤 사태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진 않아요. 아마 저라도 그냥 집에 머물렀을 거예요. 걱정과 근심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다음 날 바로 친구에게 달려갔겠죠. 하지만 섀넌은 그러지 않았잖아요? 그 용기만으로도 상 받을 만하지 않나요?”
나히덴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이 친구, 정말 말을 잘하는군! 역시 정치인이야!”
미카엘은 웃으며 답했다.
“아셨으면 더는 우리 신도를 물고 늘어지지 마세요.”
솔직히 말해서 미카엘은 유리시아의 신도에게 그리 공동체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교도 앞에서 그를 두둔하고 있자니 묘하게 친밀한 감정이 생겨났다.
데미안이 언젠가 유리시아의 유지를 이을 거라고 생각하니 펠름교가 내 사업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데미안이 펠름교의 맨 꼭대기 자리에 앉는다면 그의 머리 위엔 미카엘이 앉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절세 미남은 어디 갔어?”
“주무시고 계세요.”
“자? 잔다고?”
나히덴이 놀라서 되묻자, 미카엘이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평소엔 전혀 주무시지 않는데 저하고 잠자리만 하고 나면 무척 피곤해하시면서 잠이 드세요. 선생님께서도 왜 그러는지 모르시는 것 같던데, 혹시 나히덴은 그 이유를 아시나요?”
루테는 제 스승에게 불경한 질문을 던진 미카엘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나히덴은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뻔뻔하게 답했다.
“좋아! 질문할 상대를 잘 찾아왔어. 나처럼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아니라면 잘 모를 만한 이야기이지.”
나히덴은 4천 살 먹은 동정이지만, 수치심이라곤 없는 데다 음란한 이야기를 아주 좋아했다. 그는 단번에 찻잔을 비우고는 물었다.
“한 살은 죄인이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미카엘이 미간을 좁혔지만, 나히덴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말을 이었다.
“악인이라면 치를 떠는 절세 미남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걸 보면 나쁜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지만, 처음 봤을 때부터 너에게서 아주 사특한 기운이 느껴졌거든.”
“사특한 기운이요?”
“사악하고 음침한 기운 말이야. 너희 쪽에서 이런 기운을 풍기는 건 대개 둘 중의 하나거든. 악마 아니면 죄인.”
“왜 제가 악마가 아닐 거라고 생각하세요?”
“사람이 죽어서 악마로 다시 태어나려면 악덕을 쌓고 추종자를 얻은 뒤에 승천해야 하는데 누가 한 살을 따르겠어. 그렇게 수치스럽게 죽었는데!”
나히덴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적나라하기 그지없었다.
“그거 알아? 한 살이 살던 왕궁이 지금 유명한 관광지가 된 거. 그곳이 개장하던 날 유리시아께선 손수 절세 미남에게 입장권까지 사 주셨어. 가서 보라고.”
두 눈을 가늘게 뜬 나히덴은 서늘한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고 고통받으라고.”
데미안은 그가 성기사였을 적에 걸었던 왕궁 홀과 자살한 태자의 침실, 그리고 검 수업을 받던 뒤뜰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죄 둘러보고는 피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벽에 미친 듯이 머리를 박기 시작했다.
당황한 하리엘과 나히덴이 그러지 말라며 데미안을 말렸지만, 내면 무기에 사로잡힌 데미안은 지나치게 강력했다. 당시엔 하리엘이 그보다 훨씬 강했는데도 도저히 데미안의 힘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데미안은 왕궁 벽 한쪽을 붉은 피로 물들인 채 머리가 깨져서 죽어 버렸다.
그것이 그의 첫 죽음이었다. 하리엘은 원래 정신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 균열이 더욱 심해진 건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5천 프랑입니다.”
한 번 죽은 거로는 부족했는지 그 후로도 데미안은 그곳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하도 여러 나라를 전전한 탓에 데미안은 화폐 단위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심지어 현재 사는 나라의 빵값조차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데미안은 5천 프랑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잘 알게 되었다. 차 한잔보다 약간 비싸고, 점심 한 끼보다는 약간 싼 가격. 그리고 홀리브링어 성에 입장할 때 내야 하는 비용.
데미안은 지갑에서 꾸깃꾸깃한 프랑을 꺼내 값을 치르고는 웅장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왕족과 귀족, 사용인들만 드나들 수 있었던 성엔 이제 수많은 관광객이 바글거렸다.
“저기, 저 사람 좀 봐.”
“꼭 명화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네…….”
관광객들은 화려한 궁성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크고 새카만 점처럼 시선을 무섭게 빨아들이는 이에게 관심을 끊지 못했다. 커다란 키에 단단하고 늘씬한 체형을 지닌 이는 황홀하리만큼 잘생긴 외모까지 갖춰 그 모습이 꼭 중세 성기사를 구현해 놓은 것처럼 성스러우면서도 거룩해 보였으니 자연히 눈길이 갔으리라.
주변이 시끄러워지자, 데미안은 스스로 고립되고자, 두 눈을 굳게 내리감았다.
서방에서 들여왔다는 희귀한 도자기가 놓여 있던 복도, 미카엘의 방으로 가는 길목, 미카엘과 차를 마셨던 휴게실, 단장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응접실, 토라진 미카엘이 몸을 숨겼던 정원…….
하도 문이 닳도록 드나든 탓에 데미안은 앞을 보지 않고도 붉은 융단이 깔린 푹신푹신한 홀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었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가 가장 오래 머무는 곳으로 향했다.
「미카엘이라고 불러 주세요.」
목적지에 다다라 눈을 뜨자, 화사한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어린 소년의 초상화가 망막에 맺혔다. 천사 같은 외모를 한 아이는 아름다운 제복을 입은 채 화려한 의자에 앉아 기품 있으면서도 우아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14대 왕태자 미카엘 홀리브링어(271~293)
데미안은 초상화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이내 빨간 글씨로 강조된 ‘손대지 마시오.’라는 문구를 발견하고 흐린 웃음을 흘리며 도로 손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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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감기 조심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