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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84화 (84/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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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악마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려야 한다

“데미안이 허락해 주지 않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를 좀 불러 줄래?”

“제가 대신 허락해 드릴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네 호의를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런 결계는 시술자가 허락해 줘야만 하거든.”

“괜찮아요. 들어오세요.”

데미안이 두 사람의 영혼을 한데 엮었으니 미카엘의 허락이 곧 그의 허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허락해야만 상흔을 남길 수 있는 성체에 미카엘이 손쉽게 상처를 낼 수 있는 것 또한 데미안의 몸이 그걸 외부적인 공격이 아닌 자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가 곧 둘이고, 둘이 곧 하나였다.

“스승이 먼저 들어가 보마.”

나히덴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엄살을 떨었다.

“아이고, 호법 장군 죽네! 악한 자를 막는 건 이해하겠는데 왜 선한 자까지 막는 거야? 이 정도로 깐깐하고 무거운 결계라면 선신(善神)조차 정이 떨어져서 돌아가 버리시겠어!”

당연히 그런 용도로 친 결계겠지. 유리시아는 일단 선신에 속했으니까. 데미안은 그녀가 이미 한 번 강림했으니 가까운 시일 내에는 인간계로 내려올 일이 없을 거라 말했지만, 그는 미카엘의 안전과 관련해서는 병적일 정도로 예민하게 구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의식을 잃은 사이 그 어떤 정신체도 미카엘 곁에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을 생각이었겠지.

“내 제자도 들어와도 될까?”

“물론이죠.”

“강아지야, 이리 와라! 결계 안으로 들어오면 심장이 찌그러질 듯이 아파질 테니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두고!”

살며시 침실 문을 닫은 미카엘은 부엌으로 가서 가스 불을 완전히 끈 뒤 찻잔을 세 개…… 꺼내려고 했으나 그의 집에 있는 살림살이는 모조리 2세트짜리였다.

어쩔 수 없이 미카엘은 자기가 쓰는 찻잔과 자기가 쓰는 물잔, 그리고 자기가 쓰는 술잔을 꺼내 놓은 뒤 따뜻한 물을 부어 예열했다. 아무튼 데미안의 것은 그 누구에게도 내주기 싫은 듯했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미카엘이 고개를 내민 채 부르자, 자기 제자에게 신력을 불어 넣어 주던 나히덴이 그제야 신기하단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부엌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나히덴이 하도 요란을 떨어대서 이제야 처음 본 루테는 생각보다 차갑고 고고한 인상이었다. 그는 미카엘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강아지라고 부르기에 제브 같을 줄 알았는데.’

하기야 제브도 하는 짓이 맹할 뿐 얼굴 자체는 냉담하고 무뚝뚝해 보였다. 특히 눈 화장을 한 것처럼 눈 점막이 검게 칠해져 있어서 약간 사나워 보이기까지 했다.

‘저 사람은 점막이 아니라 눈 가장자리를 붉게 칠했네.’

미카엘이 빤히 루테를 쳐다보자, 나히덴이 웃으며 말했다.

“영물은 얼굴 어딘가에 표식을 새겨야만 하거든.”

“아. 화장이 취미이신 줄 알았어요. 원래 도도하게 구는 사람 중에 숨은 변태가 많다잖아요.”

루테가 말없이 미카엘을 노려보자, 나히덴이 남의 집 고양이를 보고 으르렁거리는 개를 말리듯 손을 뻗어 루테의 어깨를 잡았다.

“남자가 화장 좀 하면 어때. 어울리면 그만이지.”

“그것도 그러네요. 그런데 저런 화장 도구는 어디에서 구할 수 있죠?”

미카엘에겐 뭔가 흥미로운 걸 발견하면 바로 데미안과 연결 지어 생각하는 몹쓸 버릇이 있었다. 그는 생크림을 보다가도, 두툼한 이불을 보다가도, 화려한 발찌를 보다가도, 심지어 커다란 개집을 보다가도 데미안을 떠올렸다.

데미안이 시시때때로 알 수 없는 오한을 느끼는 이유였다.

“화장에 관심이 있어?”

“네. 훌륭한 도화지도 가지고 있으니까요.”

아주 널찍한 도화지 말이지?

나히덴은 살면서 온갖 변태를 다 만나 봤기에 눈앞에 앉아 있는 청순한 미모의 청년이 음습한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데미안은 영체도 아닌 성체라서 얼굴에 저런 표식을 남긴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굴욕이 될 텐데.”

생전에 덕이나 악덕을 쌓아 자신을 신봉해 줄 추종자를 얻은 뒤 죽어서 정신체를 얻는 걸 승천이라 하고, 이 정신체는 필멸자에서 벗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정신체는 노화로 인한 죽음을 맞지 않을 뿐 불멸자는 아닌 영체와 신격을 갖춰 불멸자가 된 성체로 나뉘며 미카엘이나 나히덴 같은 자는 영체, 데미안이나 블람 같은 자는 성체라고 불렀다. 또한 동물이나 요괴가 승천하여 정신체를 얻으면 이는 따로 영물이라 불렀다.

정신체 사이에 따로 계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영체는 대부분 성체를 존경하고 영물을 하대했다. 그러니 나히덴이 한 말은 “넌 신이 될 자의 얼굴에 짐승이라는 낙서를 할 생각이냐.”라는 뜻이었다.

미카엘이 웃으며 답했다.

“그럼 더 좋죠.”

나히덴은 그를 따라 웃었다.

‘참 하극상 하나는 일품인 친구로군! 내 제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

미카엘이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차를 내주자, 나히덴이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아! 고마워, 한 살. 그 남자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절세 미남이 궁금해할 것 같아서 왔어.”

스승에게 되바라지게 굴기에 시건방진 청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예의가 바른 것 같았다. 왜인지 찻잔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지 않은 데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술잔처럼 보였지만 말이다.

“막내께서 이런 곳까지 오시게 하여 정말 죄송합니다. 저에게 말씀하시면 제가 나중에 선생님께 전달해 드릴게요.”

“응. 정말로 죄송하다면 막내 말고 나히덴이라고 불러 줘.”

“막내가 뭐 어때서요. 저는 한 살인걸요.”

“내년엔 두 살이라고 불러 줄게.”

“그럼 저도 내년엔 막둥이님이라고 불러 드릴게요.”

이거 봐라! 역시 성깔이 있을 줄 알았다니까.

나히덴은 향긋한 꽃향기가 나는 차처럼 화사하게 웃는 청년을 마주 보며 웃었다.

“봐 줘. 네 이름을 부르는 게 영 껄끄러워서 그래. 지난 천 년간 네 이름은 금구나 마찬가지였어. 그 이름을 부르면 하리엘은 미친 듯이 윽박질러댔고 데미안은 조강지처를 잃은 홀아비처럼 구슬픈 얼굴을 했으니까.”

조강지처가 뭐고 홀아비가 뭐지?

사전적인 의미는 모르겠지만, 미카엘은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여하튼 데미안이 불쌍하니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는 거지. 정작 데미안은 어제 신발장 위에서 미카엘이란 이름을 수십 번은 불러 댔는데 말이다.

“그 죄인은 손발의 주요 근육을 자르고 머리를 모두 민 다음에 정수리에 범죄자라는 낙인을 찍어서 집으로 되돌려 보냈어.”

“죽이진 않으시고요?”

“죽음은 명예로운 죄인에게나 내릴 수 있는 자비로운 형벌이야, 한 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고통스러운 형벌이지. 데미안만 봐도 알잖아?”

나히덴이 넌지시 건넨 말에 미카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데미안이 아비 용처럼 그를 과보호하던 걸 떠올린 나히덴이 그만 달래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살아있으니 이리 재회의 기쁨도 누릴 수 있는 거겠지만 말이야.”

나히덴이 제 머리를 만지려 하자, 미카엘이 몸을 뒤로 빼면서 쌍심지를 켰다.

“미치셨습니까?”

“너…….”

“미안해,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 큰 성인을 함부로 만지면 안 되지, 응.”

두 눈을 매섭게 치뜬 루테가 무어라 입을 열기 전에 나히덴이 재빨리 사과했다. 미카엘은 턱을 치켜든 채 새초롬하게 말했다.

“저한테 고마워하셔야 할 거예요. 아까 그 모습을 데미안이 봤더라면 당신 팔을 부러뜨린 뒤 엉덩이에 쑤셔 넣었을 테니까.”

아무렴 데미안이 그런 짓까지 하진 않았겠지만, 이 자리에서 왕은 용의 거죽을 뒤집어쓴 고양이였다.

“응, 고마워! 한 살 덕분에 목숨을 부지했네.”

미카엘은 절 무섭게 노려보는 루테에게 눈길을 한 번 던졌지만, 어른스럽게 대응해 준 사람을 봐서 끝까지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보아하니 그자는 일용직 근로자 같던데 특별한 기술도 없는 데다 배운 것도 없으니 이제 완력까지 없어진 몸으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어지겠지. 앞으로 처자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해도…….”

“강간이라고 하세요. 죄목을 괜히 듣기 좋은 말로 에두르지 마시고.”

“그래. 앞으론 강간도 할 수 없을 거야. 지금 힘으로는 어린애한테도 질 테니까.”

루테는 자기 스승에게 건방지게 구는 미카엘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양 무릎 위에 올린 주먹을 꽉 쥐었다. 미카엘도 그걸 눈치챈 듯했지만,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비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힘을 못 쓴다고 해서 강간을 못 하는 건 아니잖아요? 피해자에게 약물을 사용할 수도 있고 어두운 골목에서 급습할 수도 있고. 마음만 먹으면 뭘 못하겠어요?”

“그럼 한 살은 어떻게 하면 좋겠어?”

나히덴이 능글능글하게 웃으며 묻자, 두 손을 탁자 위에 올린 미카엘이 엄숙히 말했다.

“자지를 자르죠.”

루테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그는 저런 적나라하고 저열한 단어는 난생처음 들었다. 불순한 한 살과 달리 그는 정말로 순수한 스무 살이었다.

“불알은 잘라서 날것인 채로 억지로 먹여요.”

나히덴은 고집스러운 어린애를 코앞에 두고 있는 것처럼 난처한 얼굴로 한숨 쉬었다.

“한 살, 네 심판은 너무 복수에 가까워. 법 집행은 날카롭게 하되 사심을 담지 말고 차갑게 해야지.”

“죄인을 응징하는 게 내 일이라면 나도 좀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평생 피해자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나 봐야 하는데 그 와중에 소소한 즐거움을 챙긴 게 뭐 어때서요?”

미카엘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마를 일그러뜨리던 나히덴은 그가 “나도 쾌적한 근무 환경에서 일할 권리가 있어요.” 하고 말한 순간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아이고, 미치겠다. 데미안이 꼭 자기 같은 애를 데리고 사네! 한 살, 너 말이야. 사실은 데미안의 아들인 거 아니야? 어쩌면 둘이 그리 똑 닮았어!”

“그럼 밑바닥 인생끼리 어울리지, 왕자가 개자식하고 어울리겠어요?”

그 담담한 대꾸에 나히덴은 또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진짜 왕자가 저런 말을 하니 더욱 웃겼다.

데미안과 엮인 사람들은 뭐에 홀린 것처럼 그를 점점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힘들어지는데 이 한 살은 그를 광신적으로 추종하는 것처럼 보여도 은근히 신랄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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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항상 힘이 되는 추천과 코멘트로 응원해 주시는 독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레온 님과 떡대수렛츠기릿, 키릭스팬덤 님께는 늘 감사한 마음을 담아 작게나마 딱지 선물을 보내드렸습니다. 노블레스 란에서 재미있는 소설을 많이 찾으실 수 있다면 좋겠네요!

아! 그리고 아레온 님의 원고료 쿠폰 선물도 두 번이나 잘 받았습니다. 제 연재가 늦어진 탓에 따로 인사를 드리지 못해서 이렇게 한꺼번에 인사를 드리게 되어 정말 송구스럽네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모두모두 건강하고 편안한 연말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술은... 쬐금만 드세요! (*자기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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