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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79화 (7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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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미카엘…… 아, 그래서 하리엘이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던 건가.’

    비록 진짜 친구라고 말해 주진 않았지만, 데미안은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옛 연인을 제게 맡겨 주었다. 대천사도 아닌 블람의 대장군, 그것도 혁혁한 사형들이 아닌 자신에게.

    “내가 지켜 줄게.”

    나히덴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열의를 목구멍 밖으로 끄집어냈다. 감히 말하건대 그 열정은 블람을 향한 신앙심만큼이나 굳건하고 순수했다.

    “내 힘으로 못 지킬 것 같으면 네 제자를 데리고 잽싸게 우리 신전으로 튈게.”

    비로소 그 말을 듣고 안심한 듯 데미안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부탁하지.”

    아, 정말 무서운 남자란 말이야. 부탁받은 사람이 오히려 감동하게 하다니.

    나히덴은 자기 제자를 그에게서 더욱 멀리 떨어뜨려 놔야겠다고 다짐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자리를 비우려는 건데? 그냥 네 제자랑 같이 가면 안 돼?”

    “하리엘을 데리고 오려고.”

    과연 미카엘을 데리고 갈 만한 일이 아니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하리엘은…….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언제야?”

    “1년 전.”

    “난 2개월 전이야. 가지 마.”

    나히덴의 짧은 말 속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었고 데미안은 그걸 알아듣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미소 지어 보일 뿐이었다.

    “왜 그래. 또 자해하는 버릇이 도진 거야?”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데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해.”

    데미안이 불편한 미소를 지으며 미카엘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자, 나히덴이 바로 그의 어린 연인에게 고자질했다.

    “네 스승이 자해하는 버릇이 있거든.”

    “이젠 안 그래.”

    “겉으로 웃고 있다고 안심하지 말고 늘 지켜봐. 고작 1천 년 만에 입신의 경지에 올랐다는 말은 아주 속이 썩어 문드러질 만큼 고통받았다는 뜻이니까.”

    “이젠 네가 있으니 괜찮아.”

    미카엘의 턱을 한 손으로 쥔 데미안이 그의 얼굴을 자기 쪽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정말이야, 미카엘.”

    데미안은 난처한 듯 웃으면서 미카엘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내면 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으니 데미안이 자해한 적이 있다는 말에 크게 충격받진 않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자신이 상처받진 않았을까 눈치를 보는 모습은…… 좀 그랬다.

    가슴께가 바삭 하고 부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제 관계, 연인 관계를 떠나 그냥 데미안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하리엘한테 뭐 이상한 죄악감을 느끼는 건 아니지?”

    나히덴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평생 검은 하늘만 보고 살아오던 사람이 새하얀 달을 발견하면 당연히 그에 눈길을 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

    “네 제자를 내게서 감추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

    “우리 애가 널 멍하니 쳐다보다가 발을 헛디뎌서 다칠까 봐 걱정해서 그런 거지, 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야. 그러니 상처받지 마, 절세 미남. 하리엘은…….”

    “너무 나이를 먹어서 망가진 거지.”

    “봐,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훨씬 낫지?”

    나히덴은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하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가지 마.” 하고 한 번 더 말했다.

    “하리엘이 죽기 전에 미카엘을 보여 주려고. 그가 내 유일한 친구니까.”

    나히덴은 더운 한숨을 내쉬다가 일부러 능청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내가 새 친구가 되어줄게.”

    “괜찮아.”

    “하리엘은 이제 자기가 누군지도 몰라. 너도 못 알아볼지 모른다고. 걔는 그냥…….”

    “괜찮아, 나히덴.”

    그 담담한 말이 꼭 자긴 고통에 익숙하다는 뜻처럼 들려서 나히덴은 가슴에 커다란 돌이라도 내려앉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리엘은 1세대 천사라 아직 전투 능력이 쓸 만할 테니 내가 승천한 후에 미카엘을 보호하는 용도로 써먹어야지.”

    데미안이 일부러 저러는 건 안다. 혹여 나히덴이 마음 아파할까 봐 일부러 못된 말을 한 거란 건 아주 잘 안다고.

    하지만 나히덴은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데미안 님. 뭘 먹고 살면 그리 악랄해질 수 있습니까?”

    “너도 와서 미카엘을 지켜 줘도 돼.”

    “그럼 전 보상으로 뭘 얻을 수 있습니까?”

    “친구라고 불러 주지.”

    나히덴은 크게 손뼉을 쳤다.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데미안의 친구가 되는 게 이리 어려운 일이었을 줄이야! 아니, 친구세를 걷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인가.”

    “걷을까?”

    “아깐 나더러 친구 아니라며!”

    “그냥 돈만 내란 이야기지.”

    “대천사 님, 양아치세요?”

    데미안은 하하 웃었다. 그의 속이 어떤 모습일진 몰라도 어쨌든 겉으론 웃었다.

    “뭐, 생각보다 제정신일 수도 있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더라고.”

    데미안은 다시 한번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이번엔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걸 막지 못했다.

    “나를 위한 기도겠군.”

    “응. 어차피 그 영감은 이제 네 이름하고 미카엘이란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밖에 기억 못 하니까.”

    이전에 데미안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미카엘이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게 심리학 공부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셨던 게 그분을 치료하기 위함인 건가요?”

    데미안은 두 눈을 크게 떴다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않아. 내가 치료하고 싶었던 건, 그 심리를 알고 싶었던 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

    자살한 내 연인 말이야.

    데미안은 입안을 껄끄럽게 하는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어차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게 누굴 말하는 건지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루테를 제외하고는.

    “하지만, 그래. 네가 그를 상담해 주면 고맙겠어. 나와 만났을 때쯤엔 하리엘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나 때문에 상태가 더 악화되었거든. 하필이면 그가 날, 그러니까, 그럴 때 자주 발견해서…….”

    한마디로 그가 데미안이 자해하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는 이야기다.

    「약간 미친 구석이 있지만 좋은 자라네. 하지만 그는 자네를 만나면 분명 시비를 걸려 할 테지.」

    하리엘이 미카엘을 미워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처음엔 소중한 친구의 자살한 연인을 동정했으나 데미안이 고통스러워하다 자해까지 하는 걸 보고 도저히 그를 미워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된 거겠지.

    “네. 제가 잘 이야기해 볼게요. 하지만 그 전에.”

    불쑥 나히덴의 정면에 선 미카엘이 그에게 뒷모습만 내보인 채 데미안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들었다.

    “고통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얼마든지 꼬집어 드릴 테니 자책 좀 하지 마세요. 세상 모든 일이 선생님 잘못은 아니잖아요.”

    그대로 데미안의 어깨를 아래로 누른 미카엘은 그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데미안의 얼굴을 자기 품에 파묻었다.

    “전 선생님 애가 아니니까 이럴 때라도 좀 의지해 주세요.”

    천하의 데미안이 누군가에게 안겨서 머리가 쓰다듬어지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한 살은 생각보다 더 거물이었다.

    ‘보기보다 어른스럽네! 연상을 달래 줄 줄도 알고.’

    이제 데미안에겐 딸린 새끼가 있으니 자해하지도 못할 테고, 가르칠 제자가 있으니 삶의 의욕을 잃어 미치광이가 될 일도 없을 테고, 괴로워할 때 달래 줄 애인도 있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상대에게만 너무 의존하는 관계는 건전하지 않은데 말이야.’

    나히덴은 두 사람이 생전에 왜 나락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상대를 너무 소중히 여긴 나머지 그를 제외한 주변 사람들을 모두 의심하고 적대적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말로 설득할 생각도, 저희를 도울 아군을 만들 생각도 하지 못 하고, 오로지 둘이 도망갈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들어 봐, 절세 미남. 그리고 한 살.”

    나히덴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자, 미카엘이 그제야 품에 안고 있던 데미안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손가락빗으로 데미안의 뒤엉킨 흑발을 말끔하게 빗겨 준 뒤에야 옆으로 물러났다.

    “생과 사, 그리고 창조와 스러짐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지. 그러니 하리엘을 만나게 되더라도 둘 다 너무 크게 고통받진 마. 원래 삶과 즐거움은 찰나인 거야. 그래야만 가치가 있기도 하고.”

    나히덴은 익살스럽게 윙크까지 하고는 말했다.

    “절정에 무한대로 이른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어, 안 그래?”

    데미안은 냉소적인 웃음을 흘렸다.

    “꼭 경험도 없는 동정이 저런 외설적인 비유를 좋아하지.”

    “절세 미남.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자기도 1년 전엔 동정 동지였으면서 잘도 뻔뻔하게 저런 말을 하네.

    나히덴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짧은 순환 속에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기연이란 거야. 이 넓은 세계에서, 이 수많은 사람 속에서, 우리 넷이 만났다는 게 말이야.”

    넷이라는 것치고 두 사람은 아직 루테의 코빼기도 못 봤다. 하지만 나히덴의 말이 더 길어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현재에 최선을 다하자는 이야기지. 서로 고민 상담도 해 주고 필요할 땐 도움도 주고. 그래, 너의 개도 포함해서.”

    나히덴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너무 둘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건 좋지 않아.” 하고 미소 짓는 모습은 앳된 얼굴과 달리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래. 다 좋은데, 은근슬쩍 포교하진 마라.”

    “아니, 내가 뭐 개종을 권유했나? 블람께서 세상 사는 데 도움이 되는 지혜로운 말씀을 많이 하셨으니 좀 들어보라고 한 거지.”

    나히덴은 웃으며 말하더니 슬쩍 미카엘 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우린 신도에게 그리 빡빡하게 굴지 않거든. 일단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만 나와서 향 올리고 절만 하고 가도 돼. 아! 아프잖아!”

    나히덴의 귀를 끌어당긴 데미안이 제 가슴께에도 오지 않는 그를 위압적인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나 날 위해 기도해라.”

    “이미 하고 있어.”

    데미안이 흠칫 놀라 귀를 놓아주자, 나히덴이 얼얼한 귓바퀴를 주무르며 꿍얼거렸다.

    “그 악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널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 툭하면 난 괜찮아, 하지 좀 말고. 자네 어쩌고 하면서 내숭도 떨지 마. 우리 친하잖아.”

    “안 친해.”

    “아, 그래. 하나도 안 친해. 그냥 상대방 신전에 가서 향 올려주고 기도해 주는 배신자 같은 관계지, 우린 절대로 안 친해.”

    나히덴은 흘깃 미카엘을 돌아보며 당부했다.

    “네가 잔소리 좀 많이 해 줘.”

    “이미 하고 있어요.”

    “그래. 똑 부러지는 마님이 옆에 붙어 있으니 안심이네.”

    데미안이 자기 제자와 함께 자리를 뜨려 하자, 나히덴이 그의 등에다 대고 한마디 했다.

    “하리엘을 데리고 오면 나도 만나게 해 줘. 그 영감이 떠나기 전에 많이 봐 둬야지.”

    데미안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카엘과 함께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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