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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한 살이 왜요? 누구나 다 영 살부터 시작하잖아요. 당신은 뭐 태어날 때부터 천 살이었나 보죠?”
4천 살이나 먹은 대장군에게 시비를 걸다니!
데미안이 그와 친구처럼 지내는 건 실제로 막역한 사이인 데다 나히덴 쪽에서 먼저 강한 사람이 형님인 거라며 한 수 접고 들어와 주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데미안은 자기보다 어린 장군이든, 직급이 낮은 장군이든 가리지 않고 정중하게 대했다. 그런데 고작 한 살짜리가…….
하룻강아지, 아니, 하룻고양이라 겁이 없어서 그런 것도 있을 테지만, 여차하면 데미안이 자길 보호해 줄 거란 생각에 저리 뻗대는 거였다.
블람과 호각으로 싸울 정도로 강해도 그 역량을 남에게 뽐내지 않고 자기보다 약한 이들에게 오히려 몸을 낮추며 살아온 데미안은 어린 제자의 오만한 행각에 부끄러웠다.
그보다 더 부끄러운 건 미카엘의 믿음대로 데미안이 정말로 그를 위해 주먹을 휘두를 수도 있다는 거였다.
데미안은 자신이 다른 이들에게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며 자책했지만, 미카엘은 그보다 더했다. 그는 생전엔 데미안을 고자에, 청상과부로 만들더니 사후엔 어린 제자에게 눈이 멀어 분별력을 잃은 스승으로 만들었다.
세상에 저런 놈이 다 있다니!
“너의 제자, 정말 굉장하네!”
나히덴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미카엘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저런 애를 제자로 거둔 것도 모자라 연인으로 삼기까지 하다니. 데미안 선생, 당신도 정말로 그릇이 큰 사내야. 다시금 존경하게 되었어. 진심이야.”
나히덴이 깊숙이 허리를 숙여 경의를 표하자, 데미안이 커다란 손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
“그만하지.”
그래도 부끄러움을 아는 천 살짜리와 달리 한 살짜리는 자기가 뭘 잘했다고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그 모습이 꼭 일부러 져준 큰 개 앞에서 의기양양하는 하룻고양이 같았다.
“자네, 계속 이 나라에 머물 건가?”
“한동안은. 왜?”
데미안은 고개를 까딱여 사신을 제 곁으로 부르고는 섀넌의 이마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모든 걸 잊고 쉬도록.”
이제 섀넌은 술집에서 데미안을 만났던 것도, 제니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도, 과도를 들고 이 아파트에 찾아왔던 것도 잊게 되리라. 복권 또한 그저 일탈에 가까운 충동에 휩싸여 사겠지. 데미안과 관련된 기억은 새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원래 천사들은 존재감이 약해 인간이 웬만큼 큰 관심을 두지 않으면 어제 만난 이도 머릿속에서 흐지부지 사라졌다. 인간이 기억하지 못해야만 천사들이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고, 그들 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데미안은 워낙 잘생겨서 그런지, 유리시아가 아무리 그의 존재를 숨겨 놓아도 인간들은 자꾸만 그에게 주목했다. 그러니 데미안과 길게 접촉한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기억을 지우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이 일에서 빠질 테니 자네는 가서 사후 처리반을 불러 주겠나?”
사신이 미심쩍은 얼굴―강아지인데도 표정이 아주 생생했다―로 데미안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죄인을 양보하시려고요?”
“생각해 보니 우리 한 살은 앞으로도 인간을 경험할 일이 많을 것 같아서.”
한 살이란 호칭이 귀에 거슬렸는지 미카엘이 힘껏 데미안의 어깨를 꼬집었다. 나히덴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 자기 제자를 품에 안은 채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천하의 데미안을 꼬집다니! 나도 한 살 때 저리 무모했나?’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데미안이 어린 제자를 억울한 눈빛으로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는 거다.
데미안은 점잖고 신사적인 대천사지만, 절대로 쉬운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예의를 갖추는 사람만 부드럽게 대했지, 제게 대드는 이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잔혹하게 짓밟았다. 아니, 이미 자태에서 묵직한 위압감을 풍기는 자인데 누가 감히 데미안을 우습게 볼 생각을 하겠는가.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미치광이거나…….
‘한 살짜리 애인이겠지!’
나히덴은 웃음을 참다가 배에 경련이 다 일었다.
‘아이고, 웃겨 죽겠네. 내가 사형들과 싸우지만 않았어도 절세 미남이 한 살짜리에게 잡혀 산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을 텐데! 아니지, 너무 거짓말 같은 얘기라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지 몰라.’
나히덴이 무슨 생각을 한지도 모르는 채 데미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나히덴은 내 소중한 친구이기도 하고.”
“정말이야? 절세 미남!”
팔을 위로 번쩍 든 나히덴이 욕심도 많게 그와 제자를 동시에 껴안으려 하자, 데미안이 슥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나히덴은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웃으며 말했다.
“나중에 우리 사형들 앞에서 그 말을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될까? 우리 둘이 친구라는데 아무도 안 믿어준다니까!”
데미안은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진짜로 친구도 아니고, 하기도 싫다는 의미였다.
“그럼 가서 사후 처리반을 불러오겠습니다.”
사신은 여전히 의심하는 눈초리였지만, 블람이 가장 아끼는 막내 제자가 저리 좋아하니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데미안은 그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작은 부탁 하나만 하지.”
“좋아. 말해 봐, 친구. 아! 알았어, 절세 미남. 거짓말인 거 아니까 정색하지 마. 넌 무표정한 얼굴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무섭단 말이야. 꼭 서리가 인간의 형태를 취한 것 같아!”
한 마디를 던지면 열 마디가 돌아왔기에 데미안은 그 허풍에 말을 더 보태진 않았다.
“내가 한 번 자리를 비우게 될 것 같은데 그때 자네가 내 제자를 지켜 주었으면 하네.”
“누가 네 제자를 노리는데?”
데미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천사일 수도 있고, 악마일 수도 있고.”
“블람이실 수도 있고?”
“떠나기 전에 그분과 담판을 지을 테니 그분이 강림하실 일은 없을 거야. 유리시아께선 얼마 전에 현신하셨으니 한동안 이 세계에 오실 일은 없을 테고.”
“아, 정말로 천사나 악마가 적이야?”
나히덴이 안심한 얼굴로 말했다.
비록 가벼워 보이는 인물이긴 하나 나히덴은 그 블람의 제자였다. 그는 대천사 수십 명쯤은 능히 혼자서 상대할 수 있었다.
“그렇긴 한데 어두운 금발에 잘 웃는 남자나 짧은 흑발을 올백으로 넘긴 여자가 나타난다면 자네 신전으로 몸을 피하게.”
“그게 누군데?”
“세르비엘과 젠티엘, 마지막 4세대 천사이지. 그 둘은 셋이서 상대하기 힘들 거야.”
“셋?”
“자네하고 내 제자하고 제브. 그, 왜 내가 개라고 부르는…….”
“아! 그에게 이름이 있는지 몰랐네.”
“개 이름은 개로 충분하지.”
데미안은 피식 웃으며 말하다가 미카엘에게 또 한 번 어깨를 꼬집혔다.
나히덴은 또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이번엔 루테도 그에 박자를 맞춰 같이 위로 뛰어주었다. 누구와 달리 참 착한 제자였다.
“그런데 마지막 천사라니? 유리시아께서 더는 천사를 창조하지 않겠다 하셨어?”
“말씀하진 않으셨지만…….”
그럴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으실 테니까.
아무리 눈앞에 있는 이가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해도 속사정을 이야기하기 힘든지 데미안이 난처한 낯빛을 했다.
“그래. 알았어. 자세한 건 묻지 않을게. 괜히 남의 집안일에 깊숙이 발을 들였다가 낭패를 보고 싶지도 않고.”
나히덴은 천진난만하고 속이 없었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그는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바로 화제를 전환했다.
“그런데 네 제자도 상당히 강해 보이는데 우리 넷이서 상대하지 못할 정도라고?”
“넷이라니?”
“우리 루테도 끼워 줘야지! 이럴 때 아니면 우리 애가 언제 실전을 경험해 보겠어? 그것도 천사를 두들겨 팰 기회인데!”
“웬만하면 내 제자는 일선에 나서지 않게 해주면 좋겠는데.”
데미안이 커다란 미인을 쓰다듬으며 말하자, 나히덴이 웃으면서 속으로 욕했다.
‘자기 눈에는 새끼 고양이로 보이는 모양이지? 아무리 고와도 걔는 호랑이인데 말이야.’
저리 커다란 청년을 연약한 아기 취급하다니. 아무리 제자가 귀여워도 그렇지, 데미안이 아예 냉철한 판단력을 잃은 모양이다.
“데미안 선생. 아무리 연인이 예뻐도 제자이기도 한 애를 너무 과잉보호하면 못 쓴다고.”
나히덴이 장난스레 말했지만, 데미안의 얼굴에선 웃음기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미카엘은 강한 영혼을 지니고 있네. 게다가 한동안 내가 계속 그의 몸에 성력을 주입해 주었으니 웬만한 천사나 악마는 적이 되지 못하겠지.”
데미안은 꼭 그를 먹어서 자기 배 속에 감추고 싶은 것처럼 미카엘을 끌어당겨 제 품에 묻었다. 그 필사적인 몸짓은 나히덴이 장난처럼 자기 제자를 품에 숨긴 것과는 전혀 달랐다.
“하지만 미카엘은 천사가 아니야. 그러니 그가 죽거나 크게 다치면 난 어떻게 해줄 수가 없어.”
데미안이 두 눈을 내리뜨자, 긴 속눈썹 아래로 짙은 무기력이 번졌다.
그 매서운 유리시아 앞에서도, 그 강건한 블람 앞에서도 위축된 적 없던 데미안이었기에 나히덴은 희미한 충격을 받았다.
꼭 울창한 산이 온몸이 허옇게 벗겨진 채 부르르 떨며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 같았다. 혹은 광활한 바다가 바짝 말라붙은 바닥을 내보인 채 사막으로 뒤바뀐 것만 같았다.
“유리시아께선 절대로 미카엘을 되살려 주지 않으시겠지. 내게 두 번이나 기회를 주진 않으실 테니.”
천사가 아닌 한 살짜리 제자.
하지만 죽은 연인을 제외하곤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준 적이 없던 데미안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
두 번째 기회.
그제야 나히덴은 눈앞에 있는 곱상한 청년이 데미안을 마음껏 꼬집어도 괜찮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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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내일 또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