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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저리 커다란 남자더러 강아지라니. 아무리 제자가 귀여워도 그렇지, 나히덴이 아예 객관적인 판단력을 상실한 모양이다.
미카엘이야 워낙 곱고 예쁘게 생긴 데다 하는 짓이 깜찍하니 고양이라고 불러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지만 말이다.
“뭐 하는 거죠?”
데미안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빼서 나히덴이 애지중지하는 제자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하자, 미카엘이 무섭도록 빠르게 어깨를 잡아챘다.
‘그냥 궁금해서 보려고 한 것뿐인데.’
데미안은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미카엘이 매서운 눈초리를 하는 걸 보고 두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왜 남의 제자 얼굴을 보려고 해서.’
도로 루테의 얼굴을 제 품에 묻은 나히덴이 데미안 쪽으로 조금씩 몸을 틀었다. 허리를 깊숙이 수그린 루테도 자연스레 그를 따라 게걸음을 걸었다.
“미안해, 데미안. 내 순결한 제자에게 소개하기에 넌 지나치게 매력적인 남자라서. 내 마음 이해하지?”
“내 제자도 순결하지만, 자네에게 소개했는데.”
미카엘이 낮은 기침을 한 번 하고는 데미안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젠 아니잖아요.”
“아.”
그랬지. 심지어 그 순결은 데미안이 더럽혔다!
나히덴은 귀가 좋았기에 그 속삭임을 모두 엿듣고 천하의 몹쓸 놈을 보는 듯한 눈초리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데미안, 난 네가 정숙한 남자라고 생각했어. 온갖 사람들이 네게 들러붙었어도 네가 전혀 상대해 주지 않는 걸 보고 그리고 유리시아께서 널 거두신 걸 보고, 네가 순애의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그건 지금도 그런데.”
“그렇지만 소문엔, 천사들이 그러는데, 너…….”
뭔지 몰라도 기분 나쁜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데미안이 손을 들어 나히덴의 말을 가로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진 몰라도…….”
“너 청상과부라며! 그런데 이제 새 출발 하려는 거야? 죽은 사람은 어쩌고? 이제 더는 그리워하지 않는 거야? 아니,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리 변해? 한 번 순애를 바쳤으면 죽을 때까지 변치 않는 게 유리시아의 신념 아니었어? 세상에, 실망이다. 대천사가 재가한다니, 정말 말세야!”
나히덴은 사람의 연애 횟수는 평생 한 번이어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처럼 떠들어 댔다. 데미안이 그를 바라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자네야말로 개종할 생각 없나?”
“아이고, 제자랑 붙어먹는 몹쓸 스승이 이제 나까지 유혹하네! 이 일은 꼭 블람께 말씀드릴 거야!”
아니, 너희는 숨 쉬듯이 개종을 권유하면서.
데미안은 억울했지만, 제자랑 붙어먹는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었기에 무어라 대꾸할 수도 없었다.
“들어 봐, 파렴치한 스승님. 네가 정말 수치란 게 뭔지 안다면 오늘만 죄인을 양보해 주는 게 어때? 네가 인륜을 저버린 천사라 할지라도 심성은 따뜻하고 관대하다는 걸 몸소 증명해 보이는 거지.”
나히덴은 말과 행동이 과장되고 허풍스러워 보였으나 데미안은 그를 상대하는 게 익숙한 듯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블람 신자가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루테를 부둥켜안은 채 엉거주춤 제니스 옆으로 이동한 나히덴이 그녀의 구두를 벗기며 말했다.
“부모가 독실한 블람 신자야. 부모가 시켜서 한 거긴 하지만, 일단 어릴 때 수계(受戒 계율에 따르겠다고 맹세하는 입문례)도 받았어.”
나히덴이 양말을 벗긴 뒤 발뒤꿈치를 보여 주자, 과연 가느다란 침으로 지진 듯한 흔적이 보였다.
“내 제자를 봐서라도 위신 좀 세워 줘. 우리 애가 현장에 처음 나온 거거든.”
“나도 제자와 같이 왔는데.”
데미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내용은 거절이었다. 대천사와 대장군이 서로 벌주려고 줄을 선 사람이라니. 참으로 인기가 많은 죄인이었다.
“우리 귀여운 강아지는…….”
“요괴이지.”
“그래. 개 요괴이긴 한데, 응? 어떻게 알았어? 이제 블람께 귀의해서 요괴 냄새도 나지 않을 텐데.”
나히덴이 제 머리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자, 루테가 안절부절못했다. 뒷모습만 보고 있는 데도 쩔쩔매는 그의 얼굴이 눈에 선할 정도였다.
“그냥 보면 알지.”
“보면 안다니. 설마 입신의 경지에 오른 것도 모자라 신화경(神化經)에 이른 거야? 아직 승천하지 않았는데도?”
또 자기네 용어를 쓰네. 거기까진 잘 모른다니까.
데미안은 쓸데없이 입씨름하는 대신 말없이 미소 짓고는 미카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승천하기 전에 최대한 내 제자에게 많은 걸 알려 주고 싶거든. 그러니 이번은 자네가 양보하지.”
“아니, 아니, 데미안 선생님. 우리 제자는 루테가 된 지 20년밖에 안 됐어. 인간을 다룬 경험도 당연히 없고.”
나히덴이 눈치를 주면서 뒷머리를 툭툭 두드리자, 루테가 복슬복슬한 검은색 귀와 길고 풍성한 흑백의 꼬리를 내놓았다.
“우리 귀여운 강아지를 봐서라도, 응? 이번만은 양보해 주라.”
아무래도 미인계, 아니, 미견계를 쓴 모양인데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 데미안은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탐스러운 꼬리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우리 애도 귀여운데. 아니, 우리 애만 귀엽지.’
데미안이 흐뭇한 눈으로 절 바라보자, 그의 빤한 속내를 알아차린 미카엘이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했다.
“뭘 봐요. 보지 마요.”
“……그래.”
나히덴은 입이 찢어지게 웃고 싶은 걸 꾹 참느라 배까지 아팠다.
데미안은 품위 있으면서도 점잖아서 대천사임에도 뭇 장군들이 선망하는 인물이었다. 블람께서도 고작 천 년 만에 입신의 경지까지 오른 그를 본보기로 삼으라고 할 정도로 그는 정숙하면서도 금욕적인 무인이었다.
하지만 장난기 많고 허풍이 심한 나히덴은 늘 조용히 미소 짓기만 하는 데미안이 묘하게 껄끄러웠다. 그는 인간 출신 천사인데도 사람 냄새라고는 전혀 나지 않아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천사들보다 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런 데미안이 난처한 얼굴로 새파란 제자의 눈치를 다 보다니. 당장 놀리고 싶어서 손가락이 다 근질거렸다.
데미안이 주먹이라도 휘둘렀다간 제자 앞에서 머리통이 터져 버릴 테니 그러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들어 봐, 데미안 선생. 저 죄인은 우리 신자에게 몹쓸 짓, 아니, 이런 고운 말로 포장하지 말지. 저 천하의 잡놈은 우리 신자를 강간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걸 봐준다면 우리 블람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어? 하지만 자네는 이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잖아.”
나히덴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뺨을 찰지게 짝짝 때리며 말을 이었다.
“이 운 없는 놈이 감히 네 구역에서 악행을 저지르려고 하긴 했지만, 피해자는 우리 신자라고. 당연히 호법 장군인 내가 벌해야지, 안 그래?”
어느새 창가엔 검은 고양이와 흰 강아지가 모여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 중 누가 죄인을 처단할지 모르기에 가만히 기다리는 듯했다.
“여기에 있는 섀넌은 제니스를 무척 아끼는 사람이자, 유리시아 신자이지. 또한 죄인 때문에 살인죄를 저지를 뻔하기도 했고.”
데미안은 의식을 잃은 섀넌을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자네도 알다시피 현재 인간의 법률은 여성에게 무척이나 불리해. 그런데도 섀넌은 제니스를 지키기 위해 자기 집에서 칼까지 챙겨 왔지. 둘 다 신체를 단련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남자의 주먹과 여자의 주먹은 위력이 전혀 달라. 그러니 섀넌이 자기 자신을 지킬 최소한의 방도를 떠올린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지.”
섀넌의 손에서 과도를 빼낸 데미안은 꼭 증거를 은폐하려는 것처럼 그것을 우그러뜨려 작은 공으로 만들고는 제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이대로 섀넌이 검거되었다면 무기를 챙겨 온 시점에서 고의성이 엿보인다며 무거운 형량을 받았을 거야. 안 그래도 인간의 법은 여성 살인마에게 유독 야박한데 말이야.”
“네 말은 우리 신도보다 네 신도가 더 큰일이었을 거란 이야기야?”
“나히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왜 나의 손가락을 보나. 난 섀넌 또한 큰일을 당할 뻔했다고 말했지, 제니스가 그녀보다 나은 상황이었다고 말하진 않았네.”
죄인 앞으로 다가간 데미안이 그의 머리를 구둣발로 퍽 걷어차고는 말했다.
“제니스도, 섀넌도 둘 다 이 새끼 때문에 인생을 망칠 뻔했어. 그러니 이 미친놈에게만 집중하지. 신도를 위해 죄인을 벌하고 싶다는 마음은 매한가지이니 괜히 피해자들을 끌어들이진 말자고.”
그건 그렇다고 여겼는지 나히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제자도 자네 제자와 마찬가지로 정신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당연히 인간을 직접 다룬 경험도 없고.”
“그런데 이렇게 딱 좋은 잡놈이 나타났으니 탐이 난단 이야기군.”
“그래. 내 제자가 생각보다 강해서 인간을 살살 다루는 법을 좀 배울 필요가 있거든. 실수로 한 번에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나.”
“그건 그렇지.”
한마디로 미숙한 제자에게 실습용으로 던져 주기 딱 좋은 죄인이란 뜻이었다. 그 말은 이 자가 대천사든 대장군이든 어느 손에 넘어가게 되더라도 지독하게 고통받다가 죽을 거란 이야기이기도 했다.
“자네 말대로 우리 애는 내 제자이자, 내 연인이기도 하다네. 그러니 이번만은 내 체면을 생각해서 그쪽에서 양보해 주는 게 어떨까?”
루테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두 사람의 공방을 조용히 지켜보았지만, 미카엘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뭐가 신경에 거슬렸는지 살짝 인상을 쓰며 말했다.
“데미안, 전 당신 애가 아니에요.”
나히덴은 입을 크게 떡 벌렸다.
로다나교 신자들은 상하 관계에 엄격했기에 그의 하극상은 나히덴으로선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하고 저분은 3천 살 차이가 나는데도 친구처럼 지내고 계시잖아요. 그럼 999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 아닌가요?”
나히덴은 두 눈도 크게 떴지만, 999살 차이라는 말 때문에 놀란 게 아니었다.
“데미안, 네 제자 한 살이었어?”
데미안은 말없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 이건 진짜 억울하다! 유리시아와의 계약 때문에 그가 생전의 연인이라는 말도 못 하고, 정신체로선 실제로 한 살이긴 해서 뭐라 말도 못 하고…… 그래도 억울하긴 억울하다!
꼭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애를 꼬셔서 제자로 기르다가 홀랑 잡아먹은 것 같지 않은가.
천 년이나 기다렸다가 엉덩이까지 고이 바친 건 데미안 쪽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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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드디어 표지 완성본이 나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수정을 앞두고 있는데 표지 작가님께서 데미안을 너무 잘생기고 고혹적이면서도 우수에 젖은 금욕적인 미남으로 그려 주셔서 얼른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미카엘은 쬐끄매서 잘 안 보이지만, 작게 봐도 화려한 미인입니다. 특히 미카엘 복장과 천칭 디자인이 너무 섬세하면서도 아름다워요!
으어어어어, 표지 작가님 만세입니다.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