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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76화 (76/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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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세상에, 데미안이잖아! 여기에 데미안이 있다고 왜 아무도 나한테 말을 안 해 줬지?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더 빗질을 왔을 텐데! 아껴 두었던 장군복도 차려입고 말이야!”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건 비단 섀넌과 제니스, 그리고 죄인만이 아니었다.

“망할 절세 미남 같으니. 상대적으로 내 꼴이 초라해 보이잖아! 이래 봬도 4대 미남 장군 중 하나인데 하필이면 비교 대상이 데미안이라니!”

현관문 근처에 쓰러져 있는 섀넌을 먼저 눈으로 살핀 데미안은 그녀가 무사하단 걸 확인하고는 고개를 들어 호리호리한 체형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긴 흑발을 느슨하게 하나로 묶은 소년은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지만, 무척 이국적인 생김새였다. 그는 눈이 과하게 크고 코는 작으면서 오뚝했는데 앳된 인상 탓인지 몸은 그리 작지 않은데도 꼭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그 옆에는…….

“안 돼, 루테! 너처럼 순결한 애는 저런 걸 봐선 안 된다! 적어도 동정을 뗀 후에 봐야 한다, 알았느냐? 자, 얼른 바닥을 봐!”

루테라 불린 커다란 남자는 그 말을 듣고 바로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그는 그대로 자세를 유지한 채 소년에게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저만 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은…… 스승님께선 순결한 몸이 아니시란 말씀입니까?”

소년은 기고만장한 얼굴로 하하 웃었다.

“나야 당연히 경험이 풍부하지! 아, 아니. 거짓말이다! 그런 얼굴 하지 마라, 제자야!”

아무래도 두 사람은 사제 관계인 듯했다. 소년은 허둥지둥 루테의 넓은 어깨를 두드리며 변명했다.

“그래도 지식은 풍부하니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지! 정숙한 부인이라 할지라도 여덟 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쓰레기 같은 남자가 등장하는 연애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으냐? 그게 바로 나다!”

“스승님께선 소설도 집필하고 계시나 보군요. 존경스럽습니다.”

“아니, 소설을 쓰고 있는 건 아니고…… 여하튼 중요한 건 데미안의 얼굴을 봐선 안 된다는 거다!”

소년은 힐끔 데미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크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몸도 봐선 안 된다! 저자는 몸이 더 음란한 자야! 목소리도 듣지 마라! 데미안이 네 귀에 대고 뭐라고 속삭였다간 네가 임신할지도 모른다!”

“스승님, 저는 건장한 남성체입니다.”

“스승이 장담컨대 저자라면 돌멩이도 임신시킬 수 있을 것이다!”

데미안은 본인 앞에서 그를 심하게 매도하는 소년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았다. 인상을 찌푸린 건 오히려 미카엘 쪽이었다.

“선생님, 혹시 돌멩이를 임신시킨 적 있으세요?”

이딴 헛소리에도 대답해 줘야 하나.

데미안은 차게 식은 눈으로 미카엘을 돌아보았다가 그가 금색 속눈썹을 나비 날개처럼 팔랑이는 걸 보고 바로 입을 열었다.

“없는데.”

그래. 해 줘야지.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데.

미카엘은 그제야 안심했는지 날이 선 눈매를 조금 누그러뜨렸다.

“선생님의 애를 가지는 건 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야 할 거예요.”

박는 게 넌데 왜 네가 임신을 해. 미친 소리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어느 정도지.

데미안은 이번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말을 돌렸다.

“아제트인은 처음 보는 거겠군.”

“네. 우리와는 다른 인종이죠?”

데미안은 조용히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는 의식을 잃은 섀넌을 들어 소파 위에 조심히 눕힌 뒤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는 나하무트 사람이다. 나히덴이라고 불리지만, 그건 이름이 아니라 아홉이란 뜻이지. 그는 블람이 인간이었을 때 거둔 아홉 명의 제자 중 막내거든. 루테 또한 이름이 아니라 수행자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저 자그마한 소년이 대장군이자, 거물 중의 거물이란 뜻이었다.

미카엘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도로 곧게 세운 데미안이 그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기죽지 마라. 블람 본인께서 오신 것도 아니니.”

“블람께서 강림하신다면 제가 조심해야만 하나요?”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도 없겠다고 여겼는지 데미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공경하는 척만 해라. 네 특기 아닌가. 웃으면서 존댓말로 물 먹이기.”

미카엘은 선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선생님, 제가 당신께 먹인 건 정액 포함해서 무수히 많지만, 진짜로 물을 먹인 적은 없잖아요?”

데미안은 어디에 내놔도 남부끄러운 제자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자랑이다, 새끼야.

아무래도 저쪽도 제자를 데리고 온 모양인데 그와 어떤 기 싸움을 벌이게 되더라도 우리 미카엘이 질 거란 자신감이 들었다.

“제자야.”

“네, 스승님.”

“내 비록 데미안보단 덜 강하고, 덜 잘생겼어도 난 여전히 너의 스승이다. 이 말에 동의하느냐?”

“네.”

“그래. 앞으로도 그 마음 변치 말거라.”

“네.”

나히덴은 불안한지 루테의 두 눈을 가린 채 신신당부했다. 두 사람을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던 데미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며 운을 뗐다.

“나히덴.”

“악, 데미안이 내 제자를 타락시킨다! 이리 와라, 루테! 스승이 네 귀를 보호해 주마!”

부랴부랴 루테의 어깨를 끌어당긴 나히덴은 그의 얼굴을 제 자그마한 품에 묻게 한 채 두 손으로 그 귀를 막았다.

막내 제자라서 늘 사형들에게 아기 취급을 당하더니 제자 하나를 들이고서 스승 행세하는 재미에 푹 빠진 모양이다.

‘나’라는 단어를 아예 ‘스승’으로 쓰고 있는 걸 보니 말이다.

“정말 반가워, 데미안! 두 손을 쓰고 있어서 비록 포옹해 주진 못하지만, 내 마음은 잘 알 거라 믿어!”

자기 제자를 품에 숨긴 채 나히덴이 쾌활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일부러 의뭉스럽게 구는 게 아니라 그는 원래 뻔뻔하고 단순했다.

“빌어먹을 절세 미남 말이지?”

데미안이 웃으며 대꾸하자, 나히덴은 바로 시끄럽게 조잘거렸다.

“그래! 그런데 어떻게 그리 강해진 거지? 20년 전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잖아? 무슨 깨달음이라도 얻은 거야? 그러고 보니 넌 속세의 연을 끊지 못해 고통스러워했었지? 그럼 혹시…….”

데미안 쪽으로 몸을 기울인 나히덴이 속삭이는 의미라고는 전혀 없을 만한 음량으로 말했다.

“유리시아에게 고문이라도 당했어?”

데미안은 빙긋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농담도 잘하는군.”

나히덴은 그를 따라 웃었지만, 그 웃음은 금세 비명으로 바뀌었다. 데미안의 손등에 새파랗게 돋은 핏줄이 그 원인이었다.

“악! 아프잖아! 난 그냥 농담…… 아악!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고!”

정황상 나히덴은 데미안과 비슷한 나이거나 그보다 더 연장자일 텐데도 외모가 어려 보여서 그런지 꼭 데미안이 자기 가슴팍에도 오지 않는 자그마한 소년을 괴롭히는 것처럼 보였다.

미카엘이 말리듯 손등 위에 가만히 손을 얹자, 데미안은 그제야 손을 도로 거두었다.

“정말 난폭하다니까!”

“누가 자기 어머니를 모욕한다면 누구라도 나처럼 행동할 거라 생각하는데.”

“유리시아께서 최강의 호수천신을 얻기 위해 대천사 하나에게 일부러 참혹한 시련을 내리고 계신다는 소문이 파다한데 뭘 감추려고…… 아, 알았어! 말 안 한다고!”

데미안이 그런 식으로 유명세를 치르고 있었구나.

미카엘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데미안이 유리시아 이야기만 나오면 방어적으로 굴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래. 우리 어머니는 블람처럼 아주 따스한 분이 아니시지. 만약 내가 블람께 귀의했다면 자네처럼 4천 살이 넘도록 아주 약해 빠진 몸이었을 텐데 정말 아쉽군그래. 그분은 전투의 신이면서 왜 제자들을 죄다 물렁물렁하게 키우시는지 모르겠군. 혹시 신념에 문제가…… 아니, 미안하군. 내가 너무 나간 것 같아. 아무리 그게 진실이라도 그분의 제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

데미안이 웃으면서 비꼬자, 꼭 입으로 칼날을 뱉는 것만 같았다.

“내가 잘못했어. 천하의 효자 앞에서 그런 망발을 하는 게 아니었어.”

나히덴이 솔직한 태도로 사과했다. 애초에 그는 자존심도 별로 없었다.

미카엘은 그 옆에서 데미안을 노려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꼭 “언젠 패륜아라면서요?” 하고 따지는 것 같아서 데미안은 자연스럽게 그 눈을 피했다.

패륜아가 맞고, 앞으로 더 심한 짓을 저지를 예정이지만, 미카엘이 지금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쪽은 미카엘 홀리브링어, 내 제자라네.”

데미안이 그만 노여움을 풀라는 의미를 담아 미카엘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나히덴은 놀란 눈으로 미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자였어? 하도 널 무섭게 노려보길래 네게 돈을 빌려준 사람인 줄 알았지.”

“누가 내게 돈을 빌려주겠나.”

“그러게. 그냥 바치는 거면 몰라도. 참, 여전히 개종할 생각은 없고? 혹시 마음이 바뀌면 우리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 줘야 해. 블람께서 네 뒤에 가장 먼저 줄을 서셨다는 걸 잊지 마.”

저건 신성 모독 아닌가? 저쪽은 원래 저런 분위기인가?

데미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해했다기보다 더는 대화하기 귀찮다는 투였다.

“게다가 그쪽 강아지보단 우리 쪽 고양이가 더 귀엽잖아?”

사신은 강아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붙임성이 없고 냉소적인데 신령은 고양이 모습이라도 애교가 많고 사근사근했다.

‘꼭 우리 미카엘처럼.’

데미안은 이번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제자야! 왜 그러느냐?. 왜 갑자기 그런 얼굴을 해, 응? 내 강아지야.”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루테가 몸을 바로 세우자, 나히덴이 놀라서 물었다.

자기 입으로 강아지라고 불러 놓고 왜 그러냐니.

“스승님께선 개를 좋아하지 않으십니까?”

루테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옆에 있는 누군가가 보고 배우면 참 좋겠다 싶을 정도로 진심으로 조심스러우면서도 공손한 태도였다.

“개도 좋아한다. 좋아하고말고! 내 강아지, 스승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구나. 너는 특별한 강아지니 그런 말에 휘둘릴 필요 없다!”

“네, 스승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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