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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죄의 무게를 다는 접시 옆엔 그의 죗값을 상쇄해 줄 선행의 무게가 더해지는데…….”
이상야릇한 웃음을 입가에 건 데미안은 조개껍데기처럼 매끈한 미카엘의 손톱을 엄지로 한 번 문지르고는 그의 손을 천칭 위에서 떼어 냈다.
“그 말은 매력적인 개자식을 단죄하기 어렵다는 뜻이지. 특히 그가 죄악감이 희박한 데다 그가 한 짓을 모두 선행으로 포장해 줄 이가 차고 넘친다면 말이야.”
데미안의 손만이 천칭 위에 올라가자, 그것은 완벽한 평행을 이루었다.
“전에 내게 매몰차게 거절당한 알렌의 기도 또한 이 위에 올라가 있지.”
데미안은 한쪽 접시를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는 날 전혀 원망하지 않아. 오히려 악마의 유혹에 넘어가 감히 날 주제넘게 탐냈는데 내가 그를 용서해 주었다며 고마워할 따름이지.”
아무리 개같이 굴어도 죄업은 모조리 상대가 치른다니 정말 불합리한 일 아닌가.
여태까지 데미안은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강력한 방패로 삼아 왔다.
하지만 믿었던 유리시아마저 ‘그 말’을 입에 올리고 나자, 적극적으로 멀리하지 않았음 또한 죄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선생님들, 의붓형제와 자매, 성기사단 단장, 미카엘…….
자신이 분란을 일으키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면, 그 위험성을 생전에 충분히 자각했다면 처음부터 누군가와 엮이지 말았어야 했다.
하리엘, 개, 유르엘, 알렌, 블람 그리고 유리시아.
「당신을 왕도에 들이는 게 아니었어! 당신은 존재 자체가 저주야!」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라는 말을 떠올린 탓인지 데미안은 생전에 아들이 지녔던 보석을 깨끗이 닦아 품에 안고 울던 젊은 왕비를 떠올렸다.
데미안은 자기가 하지도 않은 짓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기에 그 원망을 듣고도 괴로워하지 않았다.
미카엘이 그를 위력으로 눌러 앉혔을 뿐 오히려 데미안은 궁성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으니 그 비난은 정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왕비는 순진한 미카엘이 그에게 첫눈에 반해 그런 짓을 한 거니 어린 미카엘을 유혹한 데미안에게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데미안은 그 비난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연히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미카엘이 나한테 첫눈에 반했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녀는 정말 자기 아들에 대해 잘 몰랐다.
미카엘은 드물게도 데미안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지나치게 영리했으니 아마 데미안을 만나자마자 재빨리 득실을 계산했으리라.
하지만 똑똑한 사람이 연기를 잘하라는 법은 없었다.
어린 미카엘은 그의 부모를 속일 수 있었을지언정 데미안을 속이진 못했다. 데미안은 자신에게 첫눈에 반한 이를 이미 수백 명은 만나 봤기에 그의 푸른 눈동자에 어린 열기를 착각하지 않았다.
아마 미카엘은 자신을 보자마자 생각했겠지.
‘아, 저 사람! 돈이 되겠다!’
그러고 나서 데미안의 색깔을 닮은 보석을 깡그리 매입해 뒀을 거다. 데미안이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게 되면 그의 머리카락 색이나 눈동자 색을 닮은 보석 값이 줄줄이 오를 테니 말이다.
당시 사교계에선 흠모하는 이의 색깔을 처박은 장신구를 다는 게 유행이었다.
미카엘은 다만 한 가지가 유감스러웠으리라.
‘젠장! 머리 색깔하고 눈 색깔이 달랐다면 더 다양한 종류의 보석을 사재기할 수 있었을 텐데!’
어쩌면 저 망할 떡대 새끼는 왜 하필 둘 다 검은색이냐고 속으로 욕했을 수도 있다.
머리카락과 눈 색깔이 무채색이 아니라 푸른색 같은 유채색이었다면 채도나 명도와 관계없이 온갖 푸른색 보석의 값이 치솟았을 테니 말이다.
워낙 천원 자원이 풍부하여 나라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았던 그의 부모와 달리 미카엘은 홀리브링어 왕국이 외국에 부채가 많다는 사실에 늘 불안해했다.
한마디로 그는 어린 나이임에도 돈독이 올라 있었다.
사치를 부리는 게 곧 위엄을 나타내는 거라고 생각하는 그의 부모 탓에 속마음을 그들 앞에서 드러낸 적은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는 늘 데미안 앞에서 이 나라가 자기 대에서 망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아니, 나라가 망하는 건 상관없는데 그 탓에 백성들이 지금보다 더 고된 삶을 살게 될까 봐 우려했다.
백성을 밀알 모아 오는 벌레쯤으로 생각하는 왕과 왕비 밑에서 나온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카엘은 성군이었다.
비록 성적 취향이 변태 같았지만 말이다.
왕족들은 광물 자원과 산림 자원을 독점해 외국에 수출하며 큰돈을 벌어들였지만,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풀진 않았다.
그들은 강력한 통치를 위해 백성이 더 가난하고 무식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오히려 과다하게 세금을 거두고 평민에게만 가혹한 법률을 적용했다.
미카엘이 개인 자산을 늘리는 데 혈안이었던 건 그의 부모가 절대로 굶주린 백성들에게 국고를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는 최대한 왕족과 제후들에게 많은 돈을 뜯어낸 후 그걸 남몰래 백성들에게 베풀었다.
물론 왕과 왕비 앞에선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그들과 함께 평민을 모욕하고 그들의 게으름을 비난했다.
백성들이 지나치게 무거운 군역과 노역에 시달리지 않도록 알게 모르게 법률을 개정할 때도 백성은 무식하고 멍청해서 그런 어려운 작업을 맡기면 안 된다며 부를 독점한 귀족들에게 은근슬쩍 떠넘기기도 했다.
「미카엘…… 으흐흑. 우리 천사!」
비록 왕비가 자기 아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하나 데미안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자식을 잃은 슬픔이 어떤 건지 몰라도 연인을 잃은 제 아픔보다는 더 클 거라 생각했으니까.
당시 직계 왕족들은 서거하면 선조가 묻힌 능묘에 그가 즐겨 착용하던 보석들과 함께 안치되었는데 미카엘은 자신을 화장해 달라는 유지를 남긴 탓에 그 시신조차 보존하지 못했다.
유언에 따라 관에 손수 불을 붙이는 데미안을, 왕비는 어떻게 그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 주지도 않는 거냐며 악을 쓰고 원망하다가 이내 혼절해 버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때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엔 홀로 성을 빠져나가는 대신 성안의 모든 병사를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미카엘과 함께 성을 나갔어야 했다는 후회만이 가득했으니까.
누굴 미워할 여유도, 슬퍼할 여유도 없었다.
왕은 어리석었고 왕비는 이기적이었으나 그것이 단두대에 목이 걸릴 만한 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폭동을 일으킨 백성들의 손에 의해 옥좌에서 끌려 내려와 처형당했고 그 뒤 왕국은 미카엘의 우려대로 멸망해 버렸다.
그 반란 뒤에 추종자들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건 데미안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아무리 데미안이, 피해 당사자가 그들을 나무라지 않는다고 해도 그를 신봉하는 자들이 두 사람을 이미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것을.
유리시아 또한 블람을 믿는 로다나교와 덧없이 종교 전쟁을 일으키는 자신의 신도들을 바라보며 그런 감정이 들었을까.
안타까움, 체념, 그것 위에 쌓인 희미한 분노.
이제 미카엘의 왕관은 ‘지혜로운 왕태자가 자살한 후 멸망한 비운의 왕국’이란 테마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 안엔 그의 부모를 악의적으로 그린 종교화와 전쟁화 또한 걸려 있다.
여기저기 보수하여 관광지로 개장한 궁성 안의 박물관에 말이다.
한때 홀리브링어 왕가의 권위를 의미하던 화려한 궁성은 이제 사치의 상징이 되어 매일 수천 명의 관광객을 맞이한다.
그곳은 데미안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자신에게 고통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마다 매번 찾는 장소이기도 했다.
“기다리실 건가요?”
곁에서 미카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데미안은 그 질문에 내포된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한쪽 접시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아니.”
채앵.
데미안 그것을 강제로 바닥에 내리찍었다.
“기다리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서.”
데미안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홀로 앞서 걷다가 갑자기 멈칫하고는 뒤로 돌아와 손을 내밀어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린 미카엘이 그 위에 갸름한 손을 올리자, 데미안은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걸 실감하려는 것처럼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손등을 문질렀다.
미카엘을 화장하기 전 마지막으로 만졌던 그의 손등은 영혼이 빠져나갔다는 게 여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늘한 무기물 같았는데 지금 손가락에 닿은 매끈한 피부에선 온기가 느껴졌다.
비록 이 몸이 진짜 살아 있는 몸이 아니라지만, 생명력이 깃들긴커녕 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인형과도 같은 육신에 불과하지만, 데미안은 그저 그가 지금 제 곁에 있다는 데 안심했다.
“빨리 안 가요?”
하지만 데미안보다 성질이 급한 금색 고양이는 그가 감상에 젖도록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미카엘은 연신 데미안의 손등을 꼬집어 대며 잔소리했다.
“이러다 옷가게가 닫겠어요! 집에 갈 때 앞치마를 사 가야죠.”
그래. 이런 게 바로 현실이지. 깨물고 지랄하고 꼬집고 잔소리하는 어린 연인을 데리고 사는 게 이제 데미안의 현실이었다.
“그런데 금속으로 된 갑옷은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요?”
“……적당히.”
데미안은 빛바랜 추억 탓에 심하게 미화된 미카엘을 바로 화장터에 보내 버리고는 삑삑거리는 한 살짜리와 함께 미리 봐 둔 창문을 통해 아파트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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