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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왕비는 우리 모자가 얼마나 미웠을까.”
갑자기 자기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미카엘이 가슴께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미카엘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죄악감을 느꼈지만, 부모만은 속죄의 대상이 아니라 원망의 대상이었다. 부모를 두고 자살한 자식이 어찌 그런 배은망덕한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당연히 그들에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일 거다. 그것도 데미안과 관련된 죄가.
미카엘은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들에게 이미 유죄 판결을 내린 지 오래였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는 신도, 부모도 아닌 데미안이었으니까.
“절친한 친구의 남편을 유혹해서 한 집안을 엉망으로 만든 여자의 아들이, 이번엔 자기 아들을 유혹해서 그릇된 길로 가게 했으니 말이야.”
“저도 두 사람이 안됐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죄책감에 한없이 가까운 분노가 속을 시리게 해서 자연스럽게 말이 차갑게 흘러 나갔다. 혹여 데미안에게 화풀이하듯이 불손한 말이 흘러 나갈까 미카엘은 이를 한 번 사리물었지만, 그 탓에 그의 어조는 더욱 간절하고 처절해졌다.
“선생님께서 그러셨잖아요. 자식은 그저 선택의 여지도 없이 태어난 것뿐이라고요. 그렇다면 어머니의 죄가 아들의 죄는 아니지 않나요?”
미카엘은 말을 하다가 문득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고는 미간을 좁혔다.
「생전엔 선생님 노릇도 했었지.」
「제 기억이 맞다면 성기사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 그런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에게 명령을 받아서 말이야.」
제기랄. 이번엔 아버지인가.
미카엘은 두 손으로 자기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왕은 강제로 데미안이 궁성에 눌러앉게 했고 왕비는 그더러 아들을 유혹하지 말라며 강제로 내쫓으려 했으니 미카엘이 부모에게 치를 떨게 된 것도 당연했다.
「어린애를 가르치셨나 봐요? 선생님은 종종 저를 어린애 어르듯이 하시거든요.」
「나보다 열 살이 어렸네.」
안 그래도 남성을 극도로 혐오하는 데미안이 열 살이나 어린 남자를 먼저 유혹했을 리 없다. 아마 미카엘이 먼저 그에게 반했겠지.
「아, 그래요?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진 않았네요.」
「많이 나지 않는다고? 열두 살과 스물두 살이었는데?」
「그게 왜요?」
「아…… 아니. 그렇군.」
그때 데미안이 왜 놀란 얼굴을 했는지도 이제 알 것 같다.
열 살 차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놓이기엔 너무 간극이 좁지만, 연인 사이에 놓이기엔 무척이나 넓은 편이니 말이다.
“홀린다는 말은 꼭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요. 왕비의 아들이 혼자 흥분해서 그릇된 길로 간 걸 왜 자기 탓이라고 하시나요?”
데미안이 놀란 눈을 깜빡거리자, 미카엘이 쐐기를 박듯이 말을 덧붙였다.
“선생님께서도 그러셨잖아요. 자기 혼자 마음을 품어 놓고 왜 다른 이더러 책임지라고 하느냐고요.”
자신이 알렌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 듯 데미안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그하고 왕자는 경우가 다르지.”
“뭐가 다르죠?”
“결국 난 그의 마음을 받아 주었으니까.”
“결국, 이라는 말은 거기에 이르기까지 선생님이 무수히 많이 휘둘리셨다는 뜻으로 들리는데요.”
미카엘은 한숨을 내쉬면서 물었다.
“선생님, 대체 왜 그딴 놈을 받아 주셨던 거예요? 취향에 너무 문제가 있으신 거 아니에요?”
진한 눈썹을 일그러뜨린 데미안이 억울하다는 투로 더듬더듬 항변했다.
“자기 손으로…… 그걸 잘라냈어. 내가 왕비한테 그런, 그런 짓을 당했다는 걸 알고 나서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그냥, 그런 짓까지 할 정도니까. 모든 걸 다 손에 쥐고서도 나밖에 없다는 식으로, 그냥…… 그러는 게 너무 안쓰럽고 그래서.”
내 손으로 나를 거세했다고?
미카엘은 두 눈을 크게 떴지만, 그 놀람은 스쳐 가는 바람보다도 더 빨리 사그라졌다.
“자업자득이네요. 선생님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놈은 자지가 잘려도 싸요.”
황당하다는 얼굴로 미카엘을 바라보던 데미안이 저도 모르게 따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넌 왜 그렇게 그에게 가혹하지?”
“그럼 선생님은 왜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야박하신 건데요? 게다가 왜 그렇게 눈도 낮고, 취향도 나쁘고, 열 살이나 어린 새끼 때문에 고생만 하고…….”
왜 자기한테 반했느냐고 당사자에게 추궁을 당하고 있으니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취향이 좆같다는 걸 긍정하는 수밖에.
“그래. 알겠다, 알겠어. 모두 내 잘못이다.”
“네. 선생님. 앞으로는 사람에게 쉬이 정을 주지 않으시는 게 좋겠어요. 아무리 그가 어리고 불쌍하고 처절하게 매달리더라도요.”
“이미 그러고 있어.”
아무리 본인이라지만, 그가 자꾸만 자기 애를 욕하니 속으로 욱했는지 데미안이 시비조로 물었다.
“그러는 네 취향은 훌륭한 줄 아나?”
“제 취향이 왜요?”
“네 남자는 잔인무도한 살인광에, 천하의 개새끼에, 패륜아라고.”
“엄마한테 찍소리도 못하는 효자보단 패륜아가 낫죠. 그리고 제 남자는 세상 사람 백 중 백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정도로 잘생긴 데다 가슴도 크다고요.”
“가, 아니, 가슴 이야기가 왜 갑자기 나오지?”
“왜요? 선생님 남자는 가슴이 납작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열등감이 느껴지세요?”
“뭐?”
이 새끼가, 씨발, 누구더러 납작 가슴이래. 우리 미카엘 가슴이 뭐 어때서!
머리에 확 열이 오르려고 해서 데미안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잠깐. 진정하자. 미카엘이 하고 싶은 말은,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잘생긴 데다 가슴도 커서 좋다는 뜻이잖아. 전혀 화낼 일이 아니라고.
‘그런데 왜 이렇게 열받지?’
입술을 꾹 깨물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마른 가슴이 뭐 어때서! 하고 소리쳐 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 미카엘이 얼마나 예쁜데. 지나가는 사람 천 명 중 천 명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릴 정도라고. 자의로 들어 올리지 않으면 데미안이 강제로 엄지손가락을 뽑아 버릴 거라 그런 거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내 취향도 그리 나쁘지 않으니까 그만해라. 씨발, 기분 좆같으니까.”
데미안이 제게 절대로 나쁘게 굴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게 되어서인지 이제 미카엘은 그가 씹어뱉듯이 한 욕설에도 전혀 겁을 먹지 않았다.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그렇게 제가 부러우세요?”
데미안은 자랑하듯이 자신의 두툼한 가슴팍을 어루만지는 하얀 손가락을 확 부러뜨려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애써 꾹 눌러 참았다.
“그만하라고.”
데미안이 이를 악문 소리를 내자, 비로소 미카엘은 입을 다물었다.
내 가슴이 크단 이유로 내가 자존심 상해야 한다니.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을까.
“내 가족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한 적 없어.”
그야 다른 사람에게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고개를 끄덕이던 미카엘은 이어진 말에 흠칫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생전에도.”
천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했을 정도로 당신에게 무척 소중한 그 사람이, 지옥에 떨어졌다는 그 사람이, 당신을 거세한 왕비의 아들이 바로 저인가요?
목전까지 올라온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건 데미안이 자신에 관한 이야기엔 답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건 말해 줄 수가 없어.」
「정말로 말하기 싫어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야.」
아마 유리시아가 금한 거겠지. 미카엘이 스스로 답을 찾아 속죄하기 전까지.
“그 말은 그, 선생님의, 소중한 사람에게도요?”
“그래.”
한마디로 과거의 자신에게도 한 적이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아니었나? 천 년을 기다렸을 정도로 깊은 사이였으면서 그 정도 이야기도 못 나눴다고?
미카엘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가 어렸을 땐 내가 그를 너무 싫어해서 개인사를 나눌 여유가 없었고, 그의 마음을 받아 주었을 땐 사방이 적이라서 서로를 보듬느라 과거 이야기를 할 여유가 없었거든.”
그저 입에 올리지 않았을 뿐 ‘그’가 미카엘이라는 걸 염두에 둔 대화였다.
질투도 심하고 순결에도 집착하는 두 사람이 제삼자를 자기들 안에 끼워 줄 리가 없으니 애초에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면 이뤄질 수도 없는 대화이기도 했다.
“싫어하셨다고요?”
“그래. 아주 죽도록 혐오했지. 그래서 걱정이야. 네가 기억을 되찾다가…….”
“상처받지 않을게요.”
데미안이 쉬이 말을 잇지 못하자, 미카엘이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선생님 취향이 진짜 이상하다고 실망할진 몰라도요.”
두 눈을 내리뜬 미카엘이 작게 중얼거렸다.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상처받겠어요.”
데미안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이어진 말에 도로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는 선생님을 한 번 버린 적 있는 사람이잖아요.”
“…….”
“미안하단 말은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사과하지 않을게요. 이런 말을 하면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저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하기도 하고요.”
데미안의 두 손을 끌어당긴 미카엘이 마치 기도하듯 그의 손등 위에 제 이마를 얹으며 말했다.
“제가 어떻게 당신을 배신했겠어요. 어찌 감히.”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데미안이 그 말을 뱉지 못했던 건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을 꽉 조여 와서 입을 여는 순간 묵은 감정이 울컥 흘러 나가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유리시아를 무너뜨린 뒤 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 데미안은 그의 앞에서 휘청거리는 시늉조차 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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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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