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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69화 (69/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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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공작은 드물게도 데미안의 어머니를 동등한 인격체처럼 대해 준 사람이었다. 아무리 아름답고 기예가 뛰어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성이었는데 말이다.

데미안의 어머니는 학식이 뛰어난 데다 언행에 품위가 있어 왕족들이 자식에게 침실 교육할 때 은밀하게 부를 정도로 명성이 높은 창부였다. 자연스럽게 아는 왕족이나 귀족도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신분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었기에 귀족들은 앞에서 웃으며 그녀를 대하고 뒤로는 그 비천한 처지를 비웃었다.

하지만 공작은 앞뒤가 다른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수업 중에도 플루트 선생에게 무례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고, 귀족 세계로 돌아간 뒤에도 비겁한 뒷말을 한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은 마음이 잘 맞았는지 공작은 어느 정도 플루트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어 수업을 종료한 후에도 종종 친구로서 그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좋아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공작은 치안 대장 직위를 맡고 있었기에 종종 왕도에서 일어난 이상야릇한 범죄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그녀와 함께 나누었다.

그러다 예기치 않게 그녀에게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공작이란 작위에, 치안 대장이라는 직위까지 지닌 이가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성에게 도움을 요청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그는 플루트 선생이자, 차 친구인 그녀에게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부탁했다.

데미안의 어머니 또한 그와 함께 여러 사건을 해결해 나가면서 처음으로 해방감 같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어머니는 노래도 잘 불렀고 춤도 잘 추었으며 플루트를 다루는 솜씨도 훌륭했지만, 그 모든 재능 중에서도 지능이 가장 뛰어났다. 그녀는 평생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냈다가 공작을 만나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자신의 재능은 아름다운 얼굴이나 맑은 목소리, 섬세한 손발이 아닌 머리에 있다는 걸 말이다.

“어머니로선 영영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을 거야. 실제로 어머닌 아버지와 함께 해결한 사건이 쌓여 갈수록, 자신의 유능함을 깨닫게 될수록, 점점 그를 증오하게 되셨거든.”

함께 얻은 단서로 동등한 조건하에서 한바탕 추리 결투를 벌였을 땐 살아 있는 것 같다는 해방감을 느꼈지만, 그녀는 항상 사건을 해결한 뒤 사창가로 돌아가야만 했다.

공작에겐 돌아갈 거대한 저택이, 부유한 가문이, 아리따운 부인과 자식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가 공작을 침실로 유혹했던 것도 그를 사랑하게 되어서가 아니라 질투나 비참함 따위를 그저 충동적으로 표출한 거였을 거다. 나와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 친구가 알고 보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그를 내가 있는 곳까지 끌어내리고 싶다는 추한 가학심이었을 거다.

“애먼 화풀이였지. 남을 탓함으로써 자신의 신세 한탄을 한 셈이니 말이야.”

애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이제 그녀에겐 출산한 적이 있는 창녀라는, 사창가에서도 가장 밑바닥 계급의 꼬리표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 또한 부인에게 순애를 바치지 못한 부덕한 남자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으니 그녀는 그걸로 비틀린 만족감을 얻었으리라.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당신 혼자 드높은 곳에 둘 바엔 나와 같이 진창에 구르는 꼴을 보겠다며 그를 파멸시키려 드는 이였다.

공작이 그녀에게 한 짓이라곤 고작 친절을 베푼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정말 무섭도록 삐뚤어진 사람이었지. 아마 나는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더 닮았을 거야.”

왕비가 처음부터 데미안을 가혹하게 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녀는 일국의 왕비였음에도 일개 사생아를 좋은 말로 회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부탁해 가며 제발 자기 아들이 죄를 짓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정인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그를 떠나는 대신, 날 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해도 좋다고 말하는 대신, 그더러 왕좌를 버리고 함께 도망가자고 말했다.

마치 그의 어머니가 고결한 공작을 진창에 처박았던 것처럼 말이다.

“제가 공작님이었다면…… 전 행복했을 거예요.”

아무리 부인과 자식에게 깊은 죄악감을 느끼게 되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날 원한다는 사실이, 내 미래를 생각해 날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함께 지옥에 떨어지자는 유혹이 무척 기꺼웠으리라.

그래. 미카엘 왕자도 그랬을 거다.

왕좌를 버린 채 데미안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면서, 신을 등진 채 데미안의 발등에 입을 맞추면서 그는 죄악감과 동시에 기쁨을 느꼈으리라.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머니가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깨달아 비참해졌다면, 아버지는 뒤늦게 사랑을 알게 되어 비참해졌다.

공평하고 도덕적인 공작은 일말의 정도 느끼지 못한 여인과 정략결혼 하였으나 비록 그녀를 사랑하진 못했을지언정 진심으로 아끼고 배려했다.

하지만 처음으로 알게 된 사랑은 그의 드높은 명망을 쓰레기통에 처넣게 했다. 그것도 그 자신의 손으로.

공작은 평생 부인에게 죄악감을, 자식들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살았지만, 그 와중에도 몇 번이나 데미안의 어머니를 찾아갔었다.

꼭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하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또 손을 덜덜 떨면서 마약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다른 이에게 미안해하고, 그 자신을 부끄러이 여기면서도 한 번만이라도 더 그녀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그 지독한 여자가 자기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려 버렸는데도 그에 매달리는 아버지는 참으로 어리석고 지고지순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를 더 닮았는지 모르겠군.”

데미안이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말하자, 미카엘이 말없이 고개를 떨궜다. 만일 데미안이 공작 역이라면 그의 인생을 망가뜨린 지독한 여자 역이 미카엘일 테니 말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검지로 쓱 미카엘의 이마를 민 데미안이 반강제로 그의 얼굴을 들어 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그 길은 아버지가 선택한 거야.”

“네. 그렇죠…….”

너나 나나 상대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데미안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듯했다.

“내가 용병단에 들어간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공작가에서 연락이 왔어. 날 양자로 삼고 싶다는 서신이었지.”

공작에겐 두 아들과 딸이 하나 있었는데 장남은 낙마 사고로 사망했고 차남은 원체 몸이 약해 오늘내일하는 이였다. 혹여 차남마저 죽고 나면 가문을 이을 사람이 없어지기에 어쩔 수 없이 데미안을 부른 듯했다.

아무리 눈총을 받아도 작위를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사생아 남아와 달리 여아는 아무리 적통이어도 가문을 이을 자격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께서 순순히 보내 주시던가요?”

데미안은 가벼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용병단에 들어가면서 아예 어머니와 연락을 끊고 살았어. 그분이 내 안부를 궁금해하지 않는 것처럼 나 또한 그분을 그리워하지 않았거든.”

그저 월급의 일부를 선생님들께 보내면서 겸사겸사 어머니의 소식을 전해 듣긴 했다. 여전히 아름답고 똑똑하며 차갑고 비정한 사람이란 소식을 말이다.

미카엘은 혹여 어머니의 냉담한 태도 때문에 데미안이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사실 데미안은 감정이 희박한 편이라서 미카엘을 제외하고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그리 정을 주는 편은 아니긴 했다.

“당신이 제 아이였다면 듬뿍 사랑해 줬을 텐데…….”

그래도 미카엘은 혹시 어릴 적 환경이 그를 이렇게 무심한 이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타까웠다.

“그러고는 자라서 너처럼 잔소리가 풍부하고 변태성이 강하며 엄살에 어마어마한 재능을 보이는 완벽한 남자가 되라고?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데.”

“선생님도 참, 그렇게까지…… 응?”

예쁜 포장지로 꽁꽁 감싼 탓에 그 안에 든 악담을 뒤늦게 발견한 미카엘은 그만 화를 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가 지랄탄(彈)을 장전하기도 전에 데미안이 먼저 입을 열었으니 말이다.

“내가 공작가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께선 돌아가셨어. 그리고 그 뒤를 따른 것처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지.”

치사하게 부모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니 차마 거기에 대고 “아까 내가 뭐라고요?” 하고 따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미카엘은 입술을 씹어 대면서도 그들의 사인에 대해서만 묻고 말았다.

“두 분 다 병사였어. 적어도 세간엔 그렇게 알려졌지.”

“실상은요?”

“글쎄. 독살과 자살이 아닐까.”

그녀의 부고를 전해 들은 새어머니가 어쩐지 통쾌하단 얼굴을 하는 대신 꺼멓게 죽은 얼굴을 한 걸 보면 직접 죽이진 않았더라도 어쨌든 그녀의 죽음에 무언가 영향을 주긴 했을 거다.

“난 결국 두 손을 더럽히고 만 새어머니가 안됐다고 생각했어. 어쨌든 그녀는 무고한 피해자였으니 말이야.”

“아버지도 피해자 아니셨나요?”

“칼을 든 건 어머니가 맞지. 하지만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는 그를 찌를 수 없었을 거야. 그러니 그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공범자인 셈이지.”

데미안은 절 핍박하던 새어머니를 동정하던 것과 달리 아버지를 냉담한 말로 평가했다.

“자기 발로 나락에 떨어진 이를 내가 동정할 필요 있나.”

미카엘은 말없이 데미안의 목깃을 끌어 내리고는 그의 하얀 목덜미에 난 잇자국을 어루만졌다.

칼로도, 총알로도 상처입힐 수 없는 이 강인한 육신에 잇자국을 남길 수 있었던 건 미카엘이 그보다 강해서가 아니다. 데미안이 자기에게 상흔을 남겨도 좋다고 허락했기 때문이지.

“정말 아버지를 닮으셨네요.”

“미련한 점이?”

미카엘은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련한 점이.”

차라리 공작이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주지 않았더라면, 동등한 존재로 대해 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까.

차라리 공작이 그녀에게서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면 좋았을까.

글쎄. 그땐 또 그때 나름대로 다른 좌절이 기다리고 있었겠지.

인생이란 꽝과 당첨이란 양 갈래로 나뉜 길이 아니라 꽝과 당첨이 무수하게 섞인 상자 속을 뒤지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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