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67화 (6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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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미안하다. 다른 천사라면 모를까, 내가 유일하게 가르친 천사가 그 좆같은 변태 남색가 새끼한테 처맞았다고 생각하니 울분이 치밀어서 그만 너에게 화풀이하고 말았군.”

가늘고 부드러운 금발과 달리 건조하고 뻣뻣한 은발을 쓰다듬으며 데미안은 말했다.

“너도 이제 한두 살 먹은 어린애가 아닌데 말이야.”

난폭한 손길과 달리 착 가라앉은 저음은 무척 친근하게 들렸다.

유렐과는 부드럽게 웃으며 대화를 나눌 때조차 딱 선을 긋는 게 느껴질 정도인데 오랜 세월 동안 이름 한번 불러 준 적 없는 이에게 향한 말엔 넘실거리는 감정이 실려 있었다.

‘설마 다른 천사들이 의심할까 봐 일부러 제브에게 거리를 두셨던 건가?’

하리엘이라는 대악마를 찾는 데에도 굳이 유리시아의 사신 대신 블람의 신령을 불렀던 데미안이다.

미카엘에게 속내를 다 드러내기 전이었기에 당시 데미안은 그저 하리엘이 워낙 경계심이 강해 사신 대신 신령에게 부탁한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신은 천사와 악마, 그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은 그저 죽은 자의 영혼을 거두는 일만 할 뿐, 대수롭지 않은 부탁이라면 천사나 악마를 가리지 않고 들어주기에 둘 다 사신을 굳이 적으로 삼진 않는다.

그런데도 데미안이 굳이 신령을 불렀던 건 혹여 사신이 다른 천사에게 말을 옮길까 봐 경계했던 게 아닐까. 사신이라면 데미안이 무슨 부탁을 했느냐는 천사의 물음에 태연하게 하리엘을 찾더라고 답했을 테니 말이다.

블람을 따르는 과격파 광신도 카람과 유리시아를 따르는 과격파 광신도 밀레이가 크게 갈등을 빚은 탓에 현재 천사와 장군 관계는 매우 미묘한 상태이다.

신도들이 벌인 다툼이 그들에게까지 이어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가까이하려는 자도 없다.

아무리 중립적인 존재라고 해도 사신도, 신령도, 모두 자신의 신 아래에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신령이 무려 대장군이라고 부르며 따르는 천사는 데미안 정도일 거다. 그러니 신령은 데미안과 관련된 정보를 다른 천사나 악마에게 흘릴 일이 없으리라.

“너도 알다시피 난 남의 사람에겐 아예 관심이 없어. 그러니 내가 너에게 유독 야박하게 굴더라도 제자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런 거라고 이해해라.”

“네! 물론 이해합니다!”

말없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곱씹어 보던 미카엘의 귀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내리꽂혔다.

“잠, 뭐라고요? 제자요?”

데미안은 그가 왜 그렇게 놀랐는지 모르겠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 썰매 개를 응징의 천사장으로 키워낸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제브는 썰매 개였구나!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정 어린 눈길로 제브를 바라보던 미카엘은 그가 자기 자리를 위협하자, 바로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는 저잖아요. 저에게 여러 가르침을 주셨잖아요.”

“저 개에게도 여러 가르침을 줬는데.”

“신분도 만들어 주시고, 진로 상담도 해 주시고, 옷도 사 주시고, 신발도 사 주시고, 심지어 속옷까지 사 주셨잖아요. 그것도 동냥해 가며.”

“동냥이라니…….”

“이 사람에게 맞는 옷을 달라는 둥, 신발을 달라는 둥 해놓고 돈이라곤 1밧밖에 안 들어간 지갑을 내보여서 다들 그걸 공짜로 주게 하셨잖아요. 뭐, 상점 주인들은 선생님께 공물을 바칠 수 있어서 기뻐 보였지만요.”

“그건…….”

“하지만 저는 좀 창피했어요.”

마침내 할 말을 잃은 데미안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는데도 미카엘은 마지막 추격을 가하듯 일부러 다 들리는 크기로 중얼거렸다.

“……빈 지갑 전사.”

내가 원하는 자리를 내주지 않으면 당신의 수치심과 동정심을 모두 다 유발하겠다는 선전 포고였다.

“왜요? 제가 질투 좀 하면 안 되나요?”

대체 뭘 믿고 저렇게 뻔뻔할까. 아,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데미안은 기고만장한 얼굴로 절 똑바로 바라보는 푸른 눈에 대항하지 못하고 두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 하지만 순순히 접고 물러나는 대신 딱밤 한 대는 때렸다.

“해도 돼. 그 대신 할 거면 애먼 죄책감이나 미안한 감정 따위 버리고 이기적으로 해. 괜히 어쭙잖은 태도로 남을 불편하게 하지 말고.”

그제야 아래에 있는 소년에게 의식이 미친 듯 미카엘이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제브,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당신은 선생님의 제자가 아니고 그냥 가르침만 받은 거예요.”

“알겠습니다.”

하란다고 또 못된 말을 하는 미카엘이나 온순한 태도로 수긍하는 제브나 하찮고 귀여워서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귀여운 건 미카엘뿐이고 제브는 그냥 그랬다.

데미안은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어린 개와 새끼 고양이가 서열 정리를 마치는 걸 지켜본 뒤 데미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미카엘을 가르치러 나갈 때 너도 따라와라. 네 영혼은 미카엘보다 강하지 않으니 단련에 한계가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보단 나아질 테니.”

“알겠습니다.”

“세르비엘을 때려눕히진 못하더라도 사지가 잘리는 일은 없어야지. 안 그런가?”

데미안은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제브의 머리를 다시 한번, 이번엔 좀 더 상냥한 손길로 쓰다듬어 주었다.

“넌 너무 고분고분해서 탈이야. 제발 불합리한 고통에 저항할 줄 좀 알아라. 쓸데없이 다치지 좀 말란 말이야.”

제자라는 말을 괜히 입에 올린 게 아닌 듯 이름조차 불러 준 적 없다는 개에게 하는 말치곤 무척이나 그를 신경 쓰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유순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던 제브가 무릎으로 기어와 제게 머리를 비비려 하자, 데미안은 슬며시 인상을 쓰면서 그의 가슴팍을 구둣발로 슥 밀어냈다.

“망할 내면 무기. 내가 승천하기 전엔 확실하게 벗어날 수 있겠지?”

“네.”

제브의 내면 무기는 뭐지?

미카엘은 불안함에 사로잡힌 개가 주인에게 매달리는 것처럼 물끄러미 저희를 올려다보며 얼굴을 갖다 대던 제브의 행동을 떠올려 보았다.

타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매달리며 순종적으로 구는 의존성 성격 장애(Dependent personality disorder)일까. 그게 아니면 분리 불안장애(Separation anxiety disorder)?

데미안은 목줄이라고, 유리시아는 계속 갈아야 하는 발톱 따위라고 표현한 내면 무기는 모두 정신 질환을 기저에 깔고 있다.

데미안은 자살 욕구를 동반하지 않은 자해라고 했으니 비자살적 자해(Non-suicidal self-injury)일 거고, 미카엘 경우엔 강한 죄악감과 함께 내가 이대로 없어져야만 한다는 무력감에 휩싸이곤 했으니 우울 장애(depressive disorder)겠지.

데미안의 이야기를 토대로 추측해 보면 미카엘은 중세 시대 사람인 데다 일국의 왕자이기도 했으니 데미안과의 금지된 관계에 크게 압박감을 느꼈을 거다.

보통 과도하게 규제된 환경 탓에 크게 무력감을 느낀 이가 절망에 휩싸여 숙명론적 자살 충동을 느끼곤 하는데…….

‘자살……!’

서늘한 얼음으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자네의 것이 자살 욕구를 동반한 죄악감이라면.」

일전에 내면 무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데미안은 확신을 담아 말했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단 한 번도 자살을 시도한 적 없다.

적어도 지난 1년 동안은!

그런데 왜 그는 그렇게 단정 지어 말했던 거지?

「하리엘이 최초로 악마가 된 이유는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보다 가엾은 죄인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기 때문이라네.」

「그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내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인간이 결국 어머니께 용서받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했네.」

「당시엔 자살이 큰 죄였을 테니까요.」

갑자기 데미안이 했던 말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성애와 자살은 지옥에 떨어질 만큼 큰 죄였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지 않나. 그러니 언젠가 지옥에 떨어진 영혼이 구원받는 날도 올 걸세.」

데미안은 죄와 관련된 이야기만큼이나 자살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입에 올리곤 했다.

꼭 미카엘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자해나 자살 시도, 다른 사람에게 한눈팔아도 용서해 달라는 거나 다른 사람하고 관계하는 걸 보여 달라는 거나 말없이 잠적하거나 내게서 도망치는 걸 제외하고.」

「그 어떤 수단으로도 절대로 날 배신하지 마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파는 행위나 잠적, 도망 따위는 말 그대로 배신행위인데 그는 굳이 ‘그 어떤 수단’이라는 단서를 붙였으니까.

한마디로 직접적인 배신행위가 아닐지라도, 설령 그게 결과적으로 잠적이나 도망으로 이어지더라도, 설사 죽음으로 도피하는 행위라 할지라도 배신이란 뜻이다.

「한 번은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두 번은 그러면 안 되지.」

미카엘은 한 번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반복해서 짓진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던 거겠지.

이미 죽은 자가 어떻게 또 자살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게 내 죄인가.’

아마 많은 죄 중 하나일 거다.

자살은 당시 큰 죄이긴 했으나 고작 그것 하나 때문에 데미안이 천 년 동안 어머니께 빌어야 하진 않았을 테니.

데미안을 거세했다는 왕비는 아마 미카엘의 어머니일 테니 그것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을 수도 있다. 아, 어머니의 농간에 넘어가 그를 의심한 죄도 있지.

손발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천 년간 그를 위해 기도해 온 데미안이 정말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기나긴 2막일 뿐이었다.

데미안은 그가 자살한 후에도 86세까지 버티다가 죽었을 테니까.

‘내가…… 나 때문에…….’

바닥이 까맣게 타들어 가며 지옥의 아가리로 변해 가는 게 보였지만, 미카엘은 동요하지 않고 심장을 쿵쿵거리게 하는 불안함을 빠르게 자책이란 상자에 넣어 치워 버렸다.

‘개새끼. 네가 양심이 있으면 데미안 앞에서 힘든 티를 내지 말아야지.’

미카엘은 분노란 칼날로 자기 자신을 쑤시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웃어.

안 그러면 그가 너한테 못 할 짓을 한 것 같잖아.

“언제든 끊어 낼 수 있다고 자신해서 유예를 준 거다. 자신이 없으면 지금이라도 말해. 다소 의심을 사더라도 목줄부터 끊는 게 먼저니까.”

“자신 있습니다.”

“그래. 그럼 돌아가라.”

머리 숙여 인사한 제브가 모습을 감추자, 미카엘이 바로 데미안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다행히 옷이 두꺼워 미카엘의 손이 차갑게 식은 걸 데미안이 눈치채진 못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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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오랜만에 왔습니다...!

그간 밀린 책 좀 읽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세상엔 왜 이리 재미있는 게 많은지!

천천기기도 우리 아가씨들의 일상에 좋은 재밋거리가 되어 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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