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66화 (66/106)

66

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세르비엘이 3층으로 올라가는 걸 막다가 사지가 모조리 잘렸다고 들었는데.”

“뭐, 뭐라고요?”

“네. 유르엘 님께서 팔다리를 붙여 주셨습니다.”

“붙였어?”

“결국 세르비엘을 막진 못한 건가? 한심하군.”

“칭찬하려고 부르셨다면서요?”

“죄송합니다.”

“당신은 왜 사과해요?”

뭐지, 나만 지금 다른 차원에 있나. 왜 나한테는 아무도 대꾸를 안 해 주지.

데미안과 제브를 번갈아 바라보며 깊은 소외감을 느끼던 미카엘이 바로 관심을 요구하며 데미안의 무릎을 콱 깨물었다. 아주 깨무는 게 버릇이 된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데미안은 미카엘을 안아 도로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저도 머리 밟아 주세요.”

금이야 옥이야 아끼면 뭐하나. 이딴 지랄 맞은 요구나 하는데.

데미안은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눈길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왠지 열두 살 때 모습이 떠오르는 건 기분 탓이겠지.

“미카엘. 내가 힘 조절에 실수하면 네 머리가 터질 수도 있어.”

“제브는 밟아 주셨잖아요.”

“개야 죽으면 되살리면 되니까.”

데미안은 괜히 찔렸는지 말을 고쳤다.

“걔라고. 개 말고.”

미카엘은 이번에야말로 정이 떨어졌나? 하는 눈으로 제브를 쳐다봤지만, 오히려 그는 되살려 주겠다는 말에 감명받은 듯한 얼굴로 데미안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보다 그리고 데미안보다 피학적인 성향이 더 강한 것 같았다.

“어쨌든 고생이 많았다. 하지만 좀 더 단련해야겠어. 응징의 천사장이면서 이토록 약해서야 어디에 써먹겠나. 상대가 세르비엘이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 아니, 어쩔 수 없으면 안 되지. 만약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가 미카엘에게 접근하면 어떻게 막을 텐가?”

칭찬은 아주 짧고 지적은 무척이나 길었다. 자연스럽게 제브도 주눅 든 얼굴이 되어 두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개의 본능이 나온 건지 슬금슬금 네발로 기어온 제브가 용서해 달라는 의미를 담아 무릎 위에 턱을 얹자, 데미안이 인상을 쓰면서 그의 이마를 밀어냈다.

“망할 개새끼 같으니. 누가 달라붙어도 좋다고 했지?”

꼭 아이라인을 그린 것처럼 눈꼬리가 진한 검은색인 제브는 눈매가 날카로워서 매서운 인상인데 시무룩한 얼굴을 하자, 앳된 인상 탓인지 좀 불쌍해 보였다.

“응징의 천사들이 강한가요?”

데미안의 무릎을 확보하고 나자 비로소 남을 동정할 여유가 생긴 미카엘이 제브에게 향한 화살을 슬쩍 자기 쪽으로 돌려놓았다.

싸늘한 눈으로 제브를 내려다보던 데미안은 제 품에 안긴 어린 연인에게는 무척이나 부드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야 악인하고도, 악마하고도 전투할 일이 가장 많으니까.”

“제브는 강하나요?”

“일반 천사 중에선 독보적으로 강하지.”

“세르비엘은요?”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아마 젠티엘 다음으로 가장 강한 대천사…….”

비로소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린 데미안이 말을 멈추고는 빙긋 웃었다.

“그렇군. 비록 제브가 세르비엘을 막는 데 실패했다 할지라도 그의 노력은 칭찬해야 마땅하지.”

모처럼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에 미카엘은 뿌듯한 얼굴을 했지만, 이어진 데미안의 말에 바로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네가 제브를 많이 생각해 주는 것 같으니 머리도 네가 쓰다듬어 주는 게 좋겠어.”

“머리는 왜요?”

“잘한 일이 있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로 했거든. 그게 바로 내가 그와 맺은 계약이야.”

제브가 가엾긴 했지만, 데미안이 아닌 시커먼 남자―피부도 까무잡잡했다―를 만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으므로 미카엘은 곱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선생님이 쓰다듬어 주세요. 원래 그런 계약이라면서요.”

데미안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와 나는 혼이 하나로 묶였으니 내 계약을 네가 이행해도 괜찮아.”

미카엘은 이번엔 반항적인 어조로 말했다.

“선생, 당신이 쓰다듬으라고.”

데미안은 바로 위압적인 어투로 대거리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네가 해.”

“오. 좋은 말로 안 하면 어떤 나쁜 말로 하려고요?”

“욕 한마디 했다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던 새끼가 왜 이렇게 기어오를까.”

두 눈을 크게 뜬 미카엘은 일순 스물두 살 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이어진 말에 붉은 독기를 품었다.

“좀 그만해라, 아가야.”

“내가 왜 겁을 먹어! 당신은 날 지키는 사람인데 내가 왜 당신을 무서워하느냐고!”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데미안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나는 널 지키는 사람이지. 널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이고. 설사 내가 욕을 했다 한들, 내 칼끝이 네게 향했다 한들, 네가 겁먹을 이유가 무어 있단 말인가.”

미카엘은 멍하니 두 눈을 깜빡거렸다. 저 말을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만 같은데…….

「다 들었어요! 당신, 읏, 당신이 귀족들 앞에서 날 남색이나 하는 죄인이라고 비난했다고요!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요!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

「난 그런 말을 한 적 없어.」

「그럼 어마마마께서 제게 거짓말을 했단 말인가요!」

찌그러진 그림처럼 형태를 정확하게 판별할 수 없는 회상 속에서 슬픈 눈동자만이 확연하게 보였다.

「나는 널 지키는 사람이지. 널 거스를 수 없는 사람이고. 설사 내가 널 정말로 비난했다 한들, 내 칼끝이 진실로 네게 향했다 한들, 네가 겁먹을 이유가 무어 있단 말인가.」

순간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라서 미카엘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애써 담담한 척하는 검은 눈동자는, 긴 속눈썹을 아래로 드리운 눈은 분명 데미안의 것이었다.

“미카엘?”

데미안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심장을 더욱 꽉 조였다.

앞뒤 상황을 굳이 파악할 필요 따위 없었다. 단지 저 대화만으로도 미카엘은 자신이 그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데미안은 죄를 지은 이를 위해 천 년간이나 기도했다고 했다.

그런 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미카엘을 비난했을 리 없지. 그러니 진짜 배신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가 아니라 혈육인 어머니일 거다.

하지만 미카엘은 데미안을 의심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죄였다.

“죄…….”

아아, 사과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어떻게 그러란 말인가. 미카엘이 그에게 잘못한 게 있는데.

“괜찮다.”

가만히 미카엘의 안색을 살피던 데미안은 그가 파리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자, 미카엘의 어깨를 가만히 쓸어 주었다.

“우리 같은 정신체에게 고통은 좋은 거야. 그게 곧 영혼을 단련하는 재료가 되어 주니까.”

이전엔 깊은 심연 속으로 빨려드는 미카엘을 강인한 손길로 끌어올려 주었다면, 이번엔 빛 하나 들지 않는 심해 속으로 부드러이 당기는 것만 같았다.

“고통을 유발한 원인을 깊이 생각할 필요는 없어.”

미카엘이 두려워하지 않고 그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인도해 주는 것만 같았다.

“세월이 너무 흘러 네가 속죄해야 할 사람도, 복수해야 할 사람도 더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을 테니. 설령 누군가 남아 있더라도 네가 아는 그 형태가 아닐 테지.”

마지막 말은 꼭 데미안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과거에 알던 사람이지만, 이젠 인간 자체를 초월하게 된 존재.

데미안이 일렁임 하나 없는 심해처럼 서늘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고통의 원인이 아닌 형태에 집중해라. 이 아픔이 후회인지, 죄책감인지, 슬픔인지, 분노인지……. 그리고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서 네 영혼 안에 차곡차곡 쌓는 거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어둠이 안온하게 느껴지는 건 언젠가 그가 말했던 대로 미카엘을 이끄는 데미안이 그 안에 빛을 품고 있기 때문일 거다.

그저 그가 닦아 놓은 길을 뒤따라 걷는 자신과 달리 데미안은 그 긴 세월 동안 홀로 실패하고 좌절하며 그 안에 빛을 피웠을 거라 생각하자, 또 고통이 밀려왔다.

미카엘은 울면서 그걸 죄책감이라는 상자 안에 넣었다.

“나이가 들수록 고통에 무뎌지니 그 재료는 점점 떨어지게 되어 있지. 성격이 무던하고 긍정적인 이는 고통을 잘 느끼지 못해 그 재료를 잘 얻지 못하고.”

마음을 정리하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는 미카엘을 가만히 지켜보던 데미안은 그가 자기 발로 물 밖으로 나오자, 비로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너는 어린 영혼인 데다 까칠하고, 예민하고, 피해망상이 있고, 엄살이 심하고, 후회할 짓도 자주 하니 많은 재료를 얻을 수 있을 테지.”

미카엘의 머리를 토닥이면서 데미안은 말을 덧붙였다.

“좋은 일이야.”

칭찬 같긴 한데 “아유, 개같이 귀여운 내 새끼.” 같은 칭찬이었다.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린 미카엘이 눈물을 그친 후에도 멍해 보이자, 그를 올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던 제브가 이번엔 그의 무릎 위에 살포시 턱을 얹었다.

평생 인간에게 봉사하며 살았던 개라 그런지 정서가 불안정해 보이는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 하는 짓거리지? 네가 내 손에 죽은 지 너무 오래됐나?”

미카엘에게 한없이 자애로웠던 절대자는 바로 폭군으로 돌변했다.

“네가 감히 내 것에 손을 대?”

구둣발로 퍽 제브의 어깨를 걷어찬 데미안이 싸늘하기 그지없는 저음으로 경고했다.

“……선생님.”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낸 뒤 뒤늦게 고개를 들어 올린 미카엘이 커다란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데미안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질투가 덜 심한 사람이 참는 게 나을 테니 선생님이 저 사람을 쓰다듬는 게 좋겠어요.”

잠시 미카엘의 말을 곱씹어 보던 데미안이 그 말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쓰다듬는 게 낫겠군.”

쓱 손은 뻗은 데미안이 툭툭 제브의 머리를 두드렸다.

약간 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머리채를 흔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손놀림이 격렬했을 뿐 쓰다듬는 거였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미카엘의 질투가 기관총이라면 데미안의 질투는 핵폭탄과 같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