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60화 (6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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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신분증은 왜?”

    “복권이 당첨된 사람을 죽인 뒤 그 복권을 빼앗아서 당첨금을 대리 수령한 사례가 하도 많았거든요.”

    “그 사람이 복권이 당첨된 사람이란 걸 어떻게 알고 죽인다는 거지?”

    데미안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미카엘이 살짝 입술을 비틀어 서늘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이야 다들 복권이 당첨되어도 그 사실을 주변에 숨기지만, 예전엔 아는 사람들에게 알리곤 했거든요.”

    한마디로 복권이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인이나 가족, 친척이 그를 죽이고 복권을 훔쳤단 말이었다.

    진한 눈썹을 치켜세운 데미안은 허, 하고 헛숨을 뱉어냈다. 한겨울에 부는 바닷바람만큼이나 아주 시린 숨결이었다.

    “그래서 요즘엔 복권을 구매할 때 아예 신분증을 검사한 뒤 구매 이력을 남겨 놔요. 다른 사람이 대리 수령할 수 없도록요. 이젠 법적으로 당사자가 아니라면 당첨금을 대리 수령할 수 없거든요. 부부든, 자식이든요.”

    슬며시 미간을 찌푸린 데미안은 싸늘한 낯빛으로 한마디 했다.

    “인간들이란.”

    보기 좋은 눈매를 가늘게 휜 미카엘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기분 탓인지 몰라도 일순 두 사람이 인간을 혐오하는 악마와 그가 사역하는 고양이로 보였다.

    “아, 자네 동료 중에 제니스란 사람이 있지 않나?”

    데미안은 언제 인상을 찌푸렸느냐는 듯 도로 온화한 무표정으로 돌아와 섀넌에게 물었다. 그가 다시 섀넌에게 눈길을 돌리자, 미카엘은 이번엔 그의 턱을 깨물었다.

    ‘역시 질투 때문에 저러는 거였구나.’

    의외였다.

    미카엘이 워낙 고상한 가문에서 곱게 자란 인상을 풍겨서 혹여 질투하더라도 저런 유치한 방식으로 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몸매를 한 미청년에게 한 말은 아니지만…….

    왠지 좀 귀여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흉포한 짐승처럼 보였는데 데미안이 워낙 거대한 산 같은 남자라 그런지 그의 품 안에서 뛰노는 미카엘이 이젠 새침한 산고양이처럼 느껴졌다.

    “제니스요? 처음 듣는 이름이에요.”

    데미안은 여전히 턱에 산고양이를 대롱대롱 매단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질문했다.

    “눈 밑에 점이 있는 여성인데…….”

    “아! 제니요.”

    그녀는 데미안이 이 꽃처럼 아리따운 청년에게 안기는 게 더 보기 좋다고 생각하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었다.

    섀넌은 소심한 그녀답지 않게 목소리까지 높이며 “데미안 신부님이 왜 나비야! 그분은 꽃이야!” 하고 주장하던 제니를 떠올리고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섀넌과 함께 온 여자들은 세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한지 시선을 모두 이쪽에 고정하고 있었다.

    이성애자임에도 현실에서 절 존중해 주는 선량한 남자를 만날 수도 없고, 값비싼 연극 티켓을 살 수도 없고, 글을 몰라 소설을 읽을 수도 없는 그녀들에게 있어 두 사람의 달곰한 연애 목격담은 살아 움직이는 연애 소설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명한 연극배우조차 명함을 내밀지 못할 정도로 둘 다 번듯하게 잘생긴 데다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 그들이 어딘가 비현실적인 존재처럼 느껴져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제니가 그렇게 흥분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간간이 두 사람의 목격담을 나누며 대리 만족감을 얻는 게 그들의 단 하나뿐인 취미였으니 말이다.

    “제니라면 저기에…….”

    “돌아보지 말고.”

    데미안은 바로 섀넌의 행동을 저지한 뒤 한층 낮아진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의 집 위치를 알려 줄 수 있나?”

    “네? 그건…….”

    만일 그가 자신의 집 위치를 물어봤다면 아무렇지 않게 알려 줬을 것 같은데 오히려 다른 사람, 아니, 다른 여자의 거주지를 묻자, 제아무리 데미안이라도 좀 주저하게 되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기나요?”

    갑자기 안색을 바꾼 미카엘이 슬며시 미간을 좁히면서 물었다.

    데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그녀에게 시비를 걸려다가 만 남자가 아주 안 좋은 짓을 할 것 같네.”

    덩달아 섀넌의 안색도 파리해졌다.

    “아, 경찰은 도와주지 않을 텐데…….”

    섀넌의 동료 중 하나가 집에서 성폭행을 당한 뒤 신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걸 쌍방 폭행 사건으로 처리했다.

    그 동료가 술집에서 남자에게 술 한잔을 얻어 마신 걸 화대로 인정하여 성폭행당한 게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남자를 집으로 초대한 적도, 성관계를 하겠다고 동의한 적도 없는데 법원은 오히려 남자에게 저항하다가 그의 얼굴에 상처를 낸 동료더러 치료비까지 물어 주라고 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걸까.

    그 동료의 죄는 그저 이성애자라서 정상적인 남자와 연애해 보고 싶은 게 다였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더러 네가 남자와 연애하고 싶어 했으니 그에게 성폭행을 당해도 감수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섀넌은 울면서 자기도 여자를 연애 대상으로 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고 토로하던 동료를 떠올리고는 절로 입을 앙다물었다.

    “거세해 버리면 좋을 텐데.”

    미카엘이 작게 중얼거리자, 데미안은 들어선 안 될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눈썹을 떨었다.

    “거세?”

    “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거세한 남자가 훨씬 덜 폭력적이고 수명도 길었다나 봐요.”

    데미안은 헛웃음을 터트렸다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쓴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래서였나.”

    “선생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데미안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섀넌에게 말했다.

    “경찰을 부르진 않을 걸세. 그냥…… 그녀가 오늘 밤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도록…… 좀 과격한 방법으로 도울 생각이네.”

    상당히 돌려 말했지만, 제니의 집 근처에서 기다렸다가 그 남자를 발견하면 흠씬 두들겨 패겠다는 말로 들렸다. 아니, 그 뜻이 확실했다.

    “그랬다가 데미안 신부님이 곤란한 상황에 처하시는 건 아닌가요?”

    섀넌이 걱정스레 묻자, 데미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들은 항상 이런 상황에서 날 걱정하는군. 참 신기하단 말이야.”

    자네들, 이라는 게 누굴 가리키는 건지 섀넌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쯤 되자 섀넌도 어떻게 데미안이 그런 미래를 알 수 있는 건지 더는 궁금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제니, 아니, 제니스의 집 위치를 데미안에게 알려 주었다.

    “저, 그런데…….”

    두 사람에게 인사한 뒤 자리를 떠나려던 섀넌이 갑자기 무언가가 떠오른 듯 도로 바 테이블 근처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제니는…….”

    “우리 신도가 아니지. 알고 있네.”

    섀넌이 깜짝 놀란 얼굴을 하자, 데미안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자네에게 소중한 사람이지?”

    소중하다는 말은 너무 과장된 것 같지만, 애초에 섀넌은 가진 게 많지 않았으니 그녀에게 가장 값진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실 제니와 과거사나 개인사를 깊게 나눠 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섀넌이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동료였다.

    섀넌이 다른 동료에게 사기를 당해 생활이 곤란해졌을 때도 그녀를 도와준 건 제니뿐이었다.

    제니가 목돈을 턱턱 내준 건 아니었지만, 그저 자신의 좁은 아파트 한구석을 빌려준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섀넌은 크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 작지만, 섀넌에겐 아주 큰 도움이었다. 제니는 아주 친하진 않지만, 섀넌에겐 현재 가장 소중한 이였다.

    “……네. 맞아요.”

    섀넌이 한참 만에 대답하는 데도 데미안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친구더러 유리시아를 믿으라고 할 필요 없네.”

    과연 성직자 입에서 흘러나와도 되나 싶은 말이었지만, 섀넌은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데미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그저 적극적으로 선행을 베푸는 이를 곁에 두고,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게. 그럼 그의 수호자도 자네 또한 지켜 주려 할 걸세.”

    내가 그러하듯 말이야.

    데미안은 뒷말을 잇진 않았지만, 섀넌은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섀넌은 두 손을 모은 채 말없이 짧은 기도를 올리고는 자신의 일행에게로 돌아갔다.

    “복권은…….”

    섀넌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미카엘이 나지막이 물었다.

    데미안은 조용조용한 저음으로 답했다.

    “당첨될 거야.”

    “그래도 되나요?”

    데미안이 한쪽 눈썹을 위로 올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뜻이지?”

    미카엘은 자기 동료와 웃으며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섀넌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완전히 데미안 쪽으로 돌아앉았다.

    “저 사람이 나쁜 사람 같진 않지만, 선행에 무척이나 관심이 많아 보이진 않는데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일확천금을 얻는 상을 받아도 되는 건가요?”

    “자기가 만든 적도 없는 빚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사창가로 팔려 가는 건 되고?”

    데미안은 툭 뱉듯이 대꾸했다가 자신이 너무 공격적으로 받아쳤다고 생각했는지 미카엘의 등허리를 부드러이 쓸면서 말했다.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아. 인간의 수가 너무 많으니 그들은 손에 닿는 아이들에게만 젖병을 물려 줄 수밖에 없지. 그러다 보니 자연히 챙기지 못한 아이가 나오기도 해.”

    데미안은 눈짓으로 섀넌을 가리키며 저렇게, 하고 말을 덧붙였다.

    “네 말대로 섀넌은 선행에 아주 관심이 많진 않았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그녀는 선한 사람이 맞아. 자기 앞가림도 하기 힘든 사람이 없는 여유를 짜내서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거든.”

    미카엘이 이제 그만 쳐다보라며 턱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자, 데미안이 검은 눈동자 가득 미카엘의 모습만을 담은 채 말을 이었다.

    “그녀는 상을 받은 게 아니라 보상을 받은 거야. 돈 따위가 상처를 대신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상처를 달랠 치료비가 되어 줄 순 있을 테지.”

    “알았어요. 이제 이해했으니까 다른 사람 이야기는 그만 해요.”

    자기가 먼저 물어봐 놓고 미카엘이 찡찡거리면서 데미안의 손목을 붙잡았다.

    순애를 바친다는 몸짓이 마음에 들었는지 미카엘은 그날 이후 툭하면 데미안의 손을 끌어 자기 심장 위에 올리곤 했다.

    물론 미카엘의 손은 데미안의 심장 위, 정확히는 심장 근처의 유두 위에 놓였다.

    “선생님, 저는 연애를 처음 하는 거잖아요.”

    그건 데미안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굳이 ‘저는’ 하고 자기만 순결한 척하는 게 무척이나 가증스럽고 귀여워서 데미안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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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후기]

    예약 날짜를 실수로 다른 날짜로 걸어 두는 바람에[..] 수동으로 올리고 갑니다.

    혹시 기다린 분이 계시다면 정말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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