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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악마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나에게 이런 예쁜 지갑이 다 있었나?”
미카엘은 꼭 사르르 녹을 것만 같은 달콤한 눈동자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천진무구한 소년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 이끌린 것처럼 데미안도 마주 미소 지었다.
“네. 선생님 전용 지갑이라서 선생님만 절 채워 주실 줄 수 있어요.”
눈이 부신 미남과 눈에 좋은 미인 둘이라 그런가. 남이 연애하는 걸 보는데 왜 이렇게 행복한지 모르겠다.
팔짱을 낀 채 길을 걷는 연인들을 보면서 단 한 번도 그들이 귀엽다거나 보기 좋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말이다.
“그러니 제가 돈을 많이 쓸 수 있도록 제 안에 좋은 걸 가득 넣어 주셔야 해요.”
미카엘이 술잔을 쥔 손을 검지로 가만히 어루만지며 유의미한 어조로 속삭이자, 데미안이 조금 당황한 얼굴을 했다.
이런. 잠자리와 관련된 농담인 모양이었다.
‘제니의 예상이 틀렸네. 역시 데미안 신부님이 나비였어.’
매일 손님과 온갖 체위로 성관계하는 여자였지만, 그녀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사내들은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자란 죄다 얼굴에 철판을 깐 문란한 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여자는 순정도, 수치심도 있었다.
물론 모든 여자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녀는 그랬다.
비록 아버지 빚 때문에 끌려와 이전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녀는 그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여자였으니까.
평범한 여자.
그 말 자체가 이제 그녀는 평범하지 않다고 말하는 듯하여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좋은 거라니. 많은 애정과 관심을 말이지?”
“네. 선생님께서 늘 제게 밤에 해 주시는 거 말이에요.”
아, 농담이 아니라 견제였나.
미카엘의 새파란 눈동자가 아주 잠시 자신에게 꽂혔다가 도로 데미안에게 돌아가자, 여자는 어색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저렇게 잘난 남자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경쟁 상대로 여기는 것도 좀 웃겼지만, 그보단 좋아하는 이야기 속에 조연으로 등장한 듯한 기분이 들어서 재미있었다.
“애정과 관심이야 늘 주고 있지. 밤뿐만 아니라 낮에도 말이야.”
어떻게 해서든 잠자리 이야기를 무마하고 싶은지 데미안은 야릇한 의미가 담긴 그의 말을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했다.
애먼 사람을 경계하면서 치기를 부리는 어린 남자에게 성숙한 어른이 할 수 있는 좋은 대처였다.
“귀엽기도 하지.”
대체 어떤 말이 신경에 거슬린 건지 갑자기 정색한 미카엘이 우락부락한 사내들조차 두려워하는 데미안을 아무렇지도 않게 노려보았다.
더 놀라운 건 데미안이 눈앞에 있는 곱상한 청년의 눈치라도 보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두 눈을 아래로 내리떴다는 사실이다.
진심으로 겁먹어서 그런다기보다 괜히 무서워하는 척하면서 미카엘에게 맞춰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꼭 새끼 고양이의 유치한 사냥 놀이에 어울려 주는 것처럼 말이다.
“좋아요. 용서해 줄게요.”
정말로 그런 놀이였는지 새초롬한 금색 고양이가 턱을 치켜든 채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선언했다.
“고맙군.”
점잖은 경비견은 한주먹감도 안 되는 새끼 고양이에게 일부러 져 주면서도 조금도 분한 기색 없이 빙긋 웃었다.
아, 저게 연애라는 건가 보다.
힘의 차이나 권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이기기도 하고 져 주기도 하는 것. 이긴 사람이나 진 사람이나 마음 상하지 않고 간질간질하게 웃는 것.
다행이었다.
데미안은 단 한 번도 힘든 기색을 보인 적이 없지만, 그러니 아마도 여자가 자기감정을 투영해서 그를 본 것뿐이겠지만, 데미안은 늘 어딘가 외로워 보였으니까.
그가 웃을 줄 알게 되어서, 영혼을 되찾아서, 살아 숨 쉬는 사람이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순애를 동경하지만, 현실에선 더러운 육욕밖에 경험해 보지 못한 여자는 두 사람을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뒤로 돌아섰다.
“섀넌.”
“네? 제, 제 이름을 아세요?”
데미안이 말을 걸자, 여자는 흠칫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어린아이에게도 먼저 말을 걸지 않던 이였기에 여자는, 아니, 섀넌은 더욱 동요했다.
심지어 섀넌은 가게에서 사용하는 예명이 아니라 본명이었기에 더욱 놀랐다.
“물론이지. 나의 어린 영혼.”
하지만 데미안은 예전에도 자긴 이랬다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잖아요! 이런 분이 아니셨잖아요!
섀넌은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차마 그에게 무어라 반박하진 못하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운이 좋아 보이는군. 복권을 사 보는 건 어떤가?”
“네?”
비록 개인적인 접점은 전혀 없었어도 섀넌은 데미안이 무척이나 신중하고 성실한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복권처럼 일확천금을 노리는 행위를 부추기자 무척이나 생소한 기분이 들었다.
“복권 중에 기금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게 있던데…….”
“행복 복권이요, 선생님.”
데미안이 의외라는 얼굴로 미카엘을 돌아보자, 그는 묘하게 차가워진 음성으로 자신이 그 사업체를 설립하는데 투자를 좀 했노라고 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일은 잘 다녀왔나? 뭔가 마실 걸 주문해야지?”
미카엘이 대놓고 싫은 티를 낸 것도 아닌데 그의 기분이 안 좋아진 걸 바로 알아챈 데미안이 섀넌에게 슬쩍 양해를 구하는 듯한 눈길을 던지고는 미카엘을 위해 옆에 있는 의자를 뒤로 빼 주었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 의자에 앉지 않았다.
그는 그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종업원을 부르기 위해 고개를 돌린 데미안을 가만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대체 뭘 하려는 거지?
천천히 어깨를 아래로 수그린 미카엘이 마치 그를 물어뜯기라도 할 것처럼 데미안의 귀에다 대고 입을 크게 벌리자, 섀넌은 흠칫 놀랐다.
섀넌에게 있어 미카엘은 정중한 말씨를 사용하는 고운 도련님 같은 인상이었는데 일순 가면 너머로 검붉은 짐승의 입을 본 것만 같았다.
‘데미안 신부님께 경고해드려야 하나.’
섀넌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미카엘을 힐끔거리는 와중에도 데미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용의 숨결 한 잔과 체리를 넣은 푸른 열매 한 잔을 주문하고 있었다.
종업원이 주방으로 향하자, 마침내 미카엘이 그의 귓바퀴를 꽉 깨물었다!
“복권을 사라고 권유하긴 했지만, 대가 없이 얻은 거금은 생각보다 쉽게 손안에서 빠져나간다는 걸 잊지 말게.”
저기, 지금 귀에 짐승 한 마리를 대롱대롱 매달고 계시는데 괜찮은 건가요?
데미안은 보는 사람이 다 아플 정도로 야무지게 저를 깨물어 대는 미카엘이 신경 쓰이지도 않는지 옆에 놓인 의자를 더 뒤로 빼서 아예 그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그 돈은 빚을 갚고, 지금 일하는 곳에서 몸을 빼는 데에만 써야 할 거야.”
미카엘의 늘씬한 허리에 팔을 두른 데미안은 그를 의자 대신 자신의 한쪽 허벅다리 위에 앉히고는 등허리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절대로 가족에겐 돌아가지 말고. 그 돈으로 차라리 다른 곳에 정착해서 사는 게 나을 걸세.”
섀넌이 복권을 사는 건, 아니, 당첨되는 건 이미 확정된 사안인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데미안이 허황된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거룩한 계시를 내리는 듯하여 섀넌은 자연스럽게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한 태도를 보였다.
“부모는 자기 선택으로 자식을 낳았으니 그를 책임질 의무가 있지만, 선택의 여지도 없이 태어난 자식에겐 부모를 위해 헌신할 의무가 없네. 그러니 널 키우면서 얼마를 썼다는 둥, 너 때문에 어떠한 희생을 치렀다는 둥, 그런 말을 귀담아듣지 말게.”
데미안은 부드러운 음성과 달리 비정하게 들릴 정도로 차가운 말을 뱉으며 미카엘의 금발을 손가락빗으로 쓸어 주었다.
“부모라고 해서 항상 옳은 말만 하란 법은 없지.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부모가 항상 그에게 도움이 되는 말만 해 준다는 보장도 없고.”
절 아프게 깨물어 대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건데도 그 손길이 무척이나 다정다감했다.
“장성한 자식이 건강하게 잘 살면 그것 자체로 효도이지. 안 그런가?”
참으로 묘했다.
섀넌은 자신이 아버지 빚 때문에 팔려왔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데미안은 흡사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하지만 그게 무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하루아침 사이에 나락으로 떨어진 뒤 섀넌은 남자라는 존재에 치를 떨게 되었는데 말이다.
“정 갈 데가 없으면 신전에 와서 유렐과 상담하게.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도 그녀가 자네 가족보단 나을 테니.”
섀넌에게 아무 짓도 안 한 남자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무고한 자신을 노려보는 섀넌 때문에 억울해했지만, 그게 그녀가 유일하게 쥘 수 있는 무기였다.
단단한 경계심과 날카로운 의심.
한순간 방심했다가 죽은 동료가 너무 많았기에 섀넌은 차라리 나쁜 년이라고 불릴지언정 그 무기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포주와 동료에게 몇 번 뒤통수를 맞은 뒤 아예 인간 자체를 믿지 않게 된 섀넌인데, 유리시아 외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섀넌인데, 데미안은 그녀 안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신뢰를 크게 싹 틔웠다.
그동안 섀넌에게 눈길도 한 번 주지 않았으면서 말이다.
그간 그가 보여 주었던 행동이, 그리고 침묵이 많은 설교보다 더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정말 보면 볼수록 신기한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 맞긴 한 걸까?
혹시 악마가 아닐까?
천사는 무척 비정하고 냉철하다고 들었는데 데미안은…….
‘아, 다정하시진 않구나.’
섀넌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동자는 따스하긴 했지만, 애정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 차이는 그의 허벅다리 위에 앉은 청년 때문에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복권을 사는 덴 돈만 필요하나?”
빈 지갑 전사라 그런지 돈과 관련된 일에는 서먹서먹한 데미안이 다정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한참이나 데미안의 귀를 깨물어 대던 미카엘은 마침내 이갈이가 끝났는지, 아니, 드디어 만족한 건지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 데미안의 품에 옆머리를 기대고 있다가 제 입술을 날름 핥으며 대답했다.
“신분증도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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