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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57화 (57/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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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더는 하실 말씀이 없다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그녀 앞에 있는 건 단단하고, 차갑고, 여유로운 괴물이었다. 신의 위상에 걸맞을 정도로 아름답고 품위 있고 잔혹한 괴물이었다.

“야외 섹스를 하다가 바로 달려온 터라.”

도로 미카엘을 번쩍 안아 든 데미안이 그를 자신의 한쪽 팔 위에 앉힌 채 말했다.

“제자를 씻겨 줘야만 하거든요.”

“아가야.”

유리시아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절 부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미카엘은 아가라는 말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유리시아는 미카엘이 아닌 데미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면 무기를 목줄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단다. 그건 한번 끊어 냈다고 해서 다가 아니기 때문이지.”

그녀는 날카로운 눈매와 달리 다정한 눈빛으로 데미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톱을 자르듯이, 발톱을 자르듯이, 계속 날을 뭉툭하게 만들렴.”

그건 언뜻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고, 언뜻 걱정스러운 충고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무리 강해도 바위로 만든 존재가 아니잖니. 너나, 나나.”

데미안은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미카엘을 안은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조언 감사합니다, 어머니.”

* * *

데미안은 이를 악물지도, 주먹을 꽉 쥐지도, 손등에 핏대를 세우지도 않았지만, 미카엘은 그의 속이 절절 끓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건 차분한 분노 같기도 했고 편안한 슬픔 같기도 했다.

미카엘은 그 감정이 자기 때문에 생겨난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불안한 얼굴로 데미안의 옷깃을 잡아당기지만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가 잔인무도하게 미셸을 산산조각 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니, 생각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선생님, 제가…….”

데미안의 품에 안긴 채로 계단을 오르던 미카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하지만 입안에 맴도는 여러 상념은 그 어느 것도 실체화되지 못한 채 그저 애매한 사죄 한마디로만 흘러 나갔다.

“왜 사과하지?”

데미안은 평소와 달리 무미건조한 어조였지만, 미카엘은 그게 더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평소의 언행은 커다란 사람이 몸에 꼭 끼는 정장을 불편하게 차려입은 듯한 느낌이었으니 말이다.

데미안은 지나치게 다정했지만, 그 다정함은 모두 그의 노력이 빚어낸 거였다.

툭툭 튀어나오는 본성을 보면 그는 천성이 다정다감하고 정이 많은 사람 같지는 않았다.

“그냥, 잘은 모르겠지만요.”

“잘 모르겠으면 하지 마라.”

이전의 미카엘이었다면 그의 목소리 톤이 조금 건조해진 것만으로도 불안해 어쩔 줄 몰랐겠지만, 이젠 그러지 않았다.

이 무심하고 무정한 이가 자신만을 소중히 여긴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더욱 슬프고 미안했다.

“하지만 저 때문에 그렇게 잔인하게…….”

“난 원래 잔인한데.”

“온몸에 피도 묻히시고…….”

“씻으면 그만이지.”

“어머니와 형제를 척지시게 된 것도…….”

“원래부터 사이가 안 좋았어.”

툭툭 말을 뱉던 데미안은 자기가 너무 쌀쌀맞게 대했다고 생각했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불편한 거죽을 도로 뒤집어썼다.

“미카엘. 난 원래 혼자였다. 난 내 곁에 아무도 두지 않았어. 그러니 내가 너로 인해 잃은 건 아무것도 없다. 네가 나에게 사과할 이유도 없어.”

“하지만…….”

“귀엽다고 백만 번쯤 말해 줄까. 응? 내 귀여운 금색 고양이.”

한 번 본성을 드러내자,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기가 힘든지 데미안은 짐승의 이빨과 발톱이 달린 신사처럼 어설프게 다정히 굴었다.

“두 번 다시 나에게 사과하지 마라.”

미카엘은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이내 새초롬하게 웃었다.

금욕적인 성기사처럼 보이는 단정한 외모를 하고서 뒷골목 건달처럼 구는 그가 왠지 야해 보여서 좋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에게도 금지어가 하나 있으니 그에게도 하나 있는 게 공평할 테지.

그래. 앞으로는 사과하지 말자. 아니. 사과할 일을 만들지 말자.

“그런데요.”

또 시작이군.

미카엘은 한 번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성가신 열두 살짜리처럼 굴었기에 데미안은 벌써 피곤한 듯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 그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래.”

“만일 제가 개 같은 짓을 하면요? 그래도 사과하지 말아요?”

“해 봐.”

“저 아까 선생님 날개 위에 사정을 못 했어요.”

여전히 기억력이 좋군. 집요하기도 하고.

말없이 미카엘을 바라보던 데미안이 슥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애를 잘 키웠어.”

미카엘은 그가 자신을 애 취급하는 걸 정말 끔찍이 못 견뎠지만,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최악의 보호자예요.”

데미안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시원스러운 웃음에 이끌린 것처럼 미카엘도 픽 웃었다.

“결국 더러워지고 말았군.”

3층에 다다라 미카엘을 바닥에 내려 준 데미안이 물끄러미 그의 옷자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렇게 만들기 싫어서 멀리 떨어지라고 했던 건데.”

데미안을 따라 자기 옷을 내려다본 미카엘이 뒤늦게 아, 하고 침음했다.

데미안이 피가 물든 손으로 껴안은 탓에 미카엘은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꽤 흉측한 몰골이었다.

‘길을 모두 정리하고 난 뒤에 나타났다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더러운 건 하나도 밟지 못하게 했을 텐데.

꽃잎을 깔아 놓은 길 위만 사뿐사뿐 걸어 다니게 했을 텐데.

“선생님은 저보다 더러우시면서.”

“난 원래 이런 몸이고.”

“그럼 저도 원래부터 이런 몸 할래요.”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리는 미카엘에게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데미안은 붉은 피가 말라붙은 손을 내밀어 보였다. 미카엘이 그 딱딱한 손 위에 희고 고운 손을 얹자, 데미안이 마치 왕족이나 귀족을 에스코트하듯이 그의 곁을 걸었다.

“선생님?”

갑자기 데미안이 걸음을 멈춘 채 계단 쪽을 바라보자, 방으로 들어가려던 미카엘은 덩달아 멈칫했다.

계단 위로 얼굴을 보이기 시작한 건 젠티엘이라는 대천사였다. 그녀는 데미안과 눈이 마주치자 굳은 얼굴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떨궜다.

“데미안.”

“젠티엘.”

미카엘 앞에 선 데미안이 방어적인 태도로 슥 팔짱을 끼자, 젠티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대신 사과하고 싶어서.”

두 눈을 가늘게 뜬 데미안은 냉소적인 웃음을 흘릴 따름이었다.

“참으로 우습군. 자네가 감히 신의 대리인을 자칭하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야. 난 그저 어머니께서 자네에게 너무 가혹하셨던 것 같아서…….”

데미안이 싸늘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잘라냈다.

“신께서 당신의 천사에게 시련을 내리시는 게 뭐가 문제지?”

“하지만 미첼 때도 그랬고…….”

미첼은 누구지?

미카엘이 빤히 바라보는 게 느껴졌는지 데미안은 낮은 목소리로 이미 죽은 자라고만 답했다.

물론 젠티엘에게 답할 때와는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였다.

“그분은 내게 고통을 주어 날 강하게 해 주시고, 나는 그분의 신념 그 자체가 되어 신력을 실어드리지.”

유리시아 앞에서 노골적으로 빈정거리던 데미안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자리에 없자, 흡사 유리시아를 두둔하듯이 말했다.

“우린 그런 계약을 맺었어. 양자 동의한 사항이라고. 그러니 자네의 어쭙잖은 정의감으로 그분과 나를 재단할 생각 따위 하지 말게.”

젠티엘은 말솜씨가 썩 좋지 않은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야. 난 그저 내 마음이 좋지 않아서 왔어.”

“그럼 어머니를 대변하러 온 게 아니라 날 위로하러 온 거라고 해야지.”

“위로하러 왔어.”

“당사자는 원하지도 않는 쓸데없는 관심과 위로를 선사해 주어서 정말로 고맙군.”

미카엘의 허리에 팔을 두른 데미안이 그의 하얀 뺨을 피 묻은 손등으로 툭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자네가 졸졸 따라오지만 않았더라도 난 이 사랑스러운 제자를 물고 빨면서 알아서 정신적인 위안을 얻었을 텐데, 자네 덕분에 참으로 의욕이 나는군.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는 의욕 말이야.”

“그래? 내가 도움이 된 건가?”

데미안은 눈치를 빵에 발라 먹은 것처럼 구는 대천사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미카엘을 돌아보았다.

봐, 내가 까칠한 게 아니지? 저것들이 날 이렇게 만든 거라고.

가볍게 어깨를 으쓱한 데미안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눈치가 빠른 데다 영특하기까지 한 미카엘은 말없이 데미안의 등을 쓰다듬으며 그를 위로했다.

“그만 돌아가.”

데미안은 차갑게 웃어 보이고는 뒤로 돌아서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걸음을 멈칫했다.

“자네는 어머니를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있나?”

그 뜬금없는 질문에도 젠티엘은 차분하게 답했다.

“기도라면 늘 하고 있어.”

“어머니에게 기도하는 것 말고. 어머니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느냔 말일세.”

젠티엘은 슬며시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물었다.

“어머니께선 절대자이신데 어떻게 내가 감히 그분을 위해 기도할 수 있지?”

“절대자라고…….”

쓴웃음을 흘리며 젠티엘의 말을 곱씹어 보던 데미안이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지난 6백 년간 유리시아가 천하의 씨발 새끼라고 생각해 왔네.”

그 파격적인 발언에 양심적인 천사와 순결한 죄인은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그리고 다음 2백 년간 어머니의 의도를 의심했고.”

두 눈을 내리깐 데미안이 무거운 슬픔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음 2백 년간은 어머니를 동정했지.”

“동정이라니.”

“아주 먼 옛날의 인간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하더군. 그들은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상대에게 심장을 꺼내 주듯이 말했다고 하네.”

데미안은 아름다운 바다 같은 미카엘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말했다.

“내 순애를 당신에게 바치겠노라고.”

미카엘을 두 눈을 크게 떴다가 눈가를 붉게 물들였다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채 수줍어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건 대답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선언이었기에 설령 상대가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았더라도 남은 삶 동안 그의 심장은 상대방 것이었지.”

미카엘의 손목을 끌어 그 손을 제 가슴 위에 올리면서 데미안은 말을 이었다.

“그게 바로 순애라네. 순수하고 변하지 않는 애정 말일세.”

미카엘은 그도 따라 하고 싶은지 데미안의 손을 끌어 제 가슴 위에 얹었다.

‘이렇게 귀여운 짓만 골라 하는데 귀여워하지 말라니. 아주 고문을 하는군.’

데미안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절 빤히 바라보는 미카엘을 애써 담담하게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렸다.

“하지만 이제 이 세계엔 순애라고 부를 만한 감정이 거의 남아 있지 않지. 소설 속이나 연극 속처럼 거짓된 세계가 아니고서는. 이제 인간들은 순애를 바치겠다고 말하는 대신 그저 깃털같이 가벼이 사랑한다고 말하니까.”

사랑은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면 아예 썩어 버리는 순애처럼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그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씨앗과도 같다.

“불과 이백 년 사이에 인간의 평균 수명은 오십 년이나 늘었네. 사오십 살이면 죽던 인간들이 이제 그 두 배나 되는 삶을 살게 되었으니 긴 인생을 누군가 한 명에게 바치긴 아깝겠지. 사랑도 여러 번 경험해 보고 싶을 테고.”

데미안은 두 눈을 내리뜬 채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유리시아는 이제 잊혀져 가는 신일세. 강의 신이나 번개의 신처럼 말이야. 이제 사람들은 강을 위대한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번개를 두려워하지도 않지. 유리시아도 그처럼 석양을 맞은 신일세.”

데미안은 쓴웃음을 흘리고는 고개를 떨궜다.

‘그러니 그분이 내게 집착하고 날 시험하시는 거지. 자신의 신념이 어딘가엔 남아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서. 내 존재야말로 오래 묵은 순애 덩어리니까.’

데미안은 낯빛이 어두워진 젠티엘을 가만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도 여전히 그분을 위해 기도하고 싶지 않나?”

젠티엘은 맑은 눈으로 데미안을 마주 바라보며 답했다.

“나는…… 어머니의 평안을 위해 기도하겠어.”

“그래. 그분을 위해 기도하게.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어머니는 천진난만한 분이시지 않나. 순결한 사랑을 믿으시는 참 순진한 분이야.”

그분이 바라셨던 대로 그분의 최후가 품위 있기를. 절망적이더라도 웃음과 함께하기를. 희망이 없더라도 아름답기를.

‘그 최후는 내 손으로 맞이하시겠지만.’

데미안은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빚어낸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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