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55화 (55/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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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젠티엘 님.”

미카엘이 살짝 머리를 숙여 인사하자, 젠티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의 소개대로 그저 말이 없을 뿐 거만해 보이지는 않는 사람이었다.

두 사람과 인사를 마친 후 미카엘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어쩐지 데미안이 그들을 언젠가 상대해야 할 적처럼 소개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러고 보니 유렐도 일견 친근하게 대하는 듯 보이지만, 미카엘과 함께 있을 땐 그녀에게서 미카엘을 보호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곤 했었지.

미카엘은 그게 단순히 결혼을 종용하는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데미안은 종교라든가 대천사들에게 안 좋은 인식을 품고 있다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 왔다.

‘설마 유리시아를 배신할 생각이신가.’

눈앞에 있는 이들이 적이라고 생각하자, 심장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데미안이 원한다면 미카엘은 상대가 대천사이든, 신이든 언제든 인퀴지터를 손에 들고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니 전투 자체가 꺼려지는 건 아니었다.

미카엘은 그저 스승이 기대하는 만큼 잘 싸울 수 있을지 몰라 불안했다. 데미안을 실망하게 할까 봐 무서웠다. 데미안의 발목을 잡게 될까 봐, 더 나아가 그의 약점이 될까 봐 두려웠다.

데미안은 늘 그더러 강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지만, 미카엘은 그걸 전혀 실감할 수가 없었다.

미카엘은 이미 몇 번이나 과거의 일을 회상하다 휘청거렸고, 오늘은 데미안 앞에서 녹초가 되기도 했다. 상대해 본 이라고는 고작 인간뿐인데 데미안은 그때도 미카엘의 상태를 살피며 다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미카엘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까?

데미안이 다정한 사람이라서 그저 사탕발림한 거라고 생각하기에 그는 늘 진심을 담아 말했다. 아니, 애초에 미카엘은 그를 의심하지도 않았다.

그저 의아할 따름이었다.

어째서 데미안은 그렇게까지 확신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내가 바로 신의 위상에 올라 유리시아를 수호하게 될 응보의 대천사 데미안이라네.”

빠르게 뛰는 미카엘의 심장을 달래 주듯 그의 가슴께를 검지로 톡 건드린 데미안이 진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유의미한 말을 남겼다.

“하도 많은 신을 죽인 탓에 신멸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

뒤로 돌아선 데미안은 유리시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모든 것이 어머니의 영광을 위한 일이었네.”

난 당신에게 복종하니 감히 칼을 들이밀 생각은 없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카엘에겐 그의 말이, 모든 것이 당신의 명령으로 자행된 짓이라는 뜻으로 들렸다. 또한 불경하게도…….

네가 바란다면 눈앞에 있는 신조차 얼마든지 죽여 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시아 신을 포함하여 다른 천사들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나머지 두 가지 뜻, 특히 마지막 불경은 미카엘 혼자만의 생각인 것 같지만. 아니, 가만히 미카엘의 눈을 들여다보며 살짝 입꼬리를 올리는 데미안을 보고 있노라면 그 모든 게 착각은 아닌 것도 같았다.

“그런 멸칭을 입에 올리지 마라. 아들아, 너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예, 어머니. 감사합니다.”

“그 애가 내면 무기에서 벗어나게 했다면서?”

유리시아가 갑자기 급소를 찌르듯이 질문하는 데도 데미안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예, 어머니. 제자가 말뚝에 묶인 개처럼 목줄을 하고 돌아다니게 할 순 없잖습니까.”

데미안이 신 앞에서 제자라고 칭해 주자, 미카엘은 심장이 빨리 뛰고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에게 더 만족스러운 제자가 되어 주고 싶다는 열의가 끓어올랐다.

‘다음엔 좀 힘들어도 바로 찡얼거리지 말고 끝까지 버텨야지.’

하지만 데미안은 자신에게 무척이나 약해 엄격한 스승이 되어 주지 못할 테니 미카엘이 마음을 잘 다잡아야 했다.

“그것도 하나뿐인 제자인데 말입니다.”

“데미안.”

“저는 곧 유리시아의 호수천신이 될 몸 아닙니까.”

진한 눈썹을 위로 든 데미안이 근사한 웃음을 입가에 건 채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저도 체면이 있지요.”

체면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는 주제에!

입을 일자로 다문 유리시아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데미안을 노려보았지만, 그 건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는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넌 아직 신의 위상에 오르지도 못했는데 내 죄인을 너의 사도로 만들어? 네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알겠니?”

미카엘을 살짝 옆으로 밀어낸 데미안이 무릎 위에 양팔을 얹은 채 몸을 앞으로 숙이고는 유리시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죄요? 무슨 죄 말입니까? 저는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제가 유리시아의 종일진대 어찌 이것이 어머니의 밥그릇을…… 죄송합니다. 제가 조야한 표현을 사용했군요. 어찌 이것이 어머니의 신자를 빼돌린 게 된단 말입니까?”

“일부러 다 말해 놓고는 뭘 사과하고 있어!”

금빛 천칭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은 데미안이 두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가늘게 뜨면서 위협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의심이 가신다면 제 죄의 무게를 달아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데미안이 천칭의 한쪽 끝에 손바닥을 얹자, 천칭은 그를 드높여서 무고를 증명해 주었다.

“이 시스템엔 정말로 구멍이 많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염세적인 눈빛으로 천칭을 바라보던 데미안이 착 가라앉은 저음으로 말했다.

“이런 천하의 불경한 놈이 대천사가 하고, 그런 무고한 영혼이 죄인이 되다니 말입니다.”

유리시아는 그의 시커먼 눈동자에 비친 그 자신의 굳은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데미안은 유리시아의 속내를 샅샅이 뜯어 보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돌연 싱긋 웃어 보였다.

“어쨌든 전 어머니 덕분에 새로 태어날 수 있었지요.”

언젠가 죽을 괴물에서 죽지도 않는 괴물로 말입니다.

데미안이 감춰진 뒷말을 입 모양으로만 전달하자, 유리시아가 슬며시 미간을 좁혔다.

유리시아는 종교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괴물을 만들어 냈다.

그 괴물은 그녀의 교리에 가장 걸맞은 이였으나 그와 동시에 절대로 유리시아를 섬길 수 없는 인물이었다.

죄악감이 없는 무자비한 괴물.

그가 순애를 바친 대상은 오로지 유리시아의 지옥에 있는 이 하나뿐이었으니, 데미안은 그녀에게 있어 가장 자랑스러운 대천사이자, 가장 위협적인 괴물이었다.

“죄송합니다. 내면 무기로부터 자유로워졌는데도 자학을 멈출 수가 없네요.”

의자 등받이에 나른하게 등을 기대며 여유롭게 웃는 남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눈앞에 있는 진짜 신보다 더 신과 같은 존재처럼 보였다.

“전 자기 객관화는 잘된 놈이라서요. 어머니껜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넌 네가 얼마나 개자식인지 알고 있니?”

입술을 꼭 다물고 있던 유리시아가 한참 만에 말을 뱉어 내자, 두 눈을 크게 뜬 데미안이 짐짓 충격받은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니, 개가 되신 겁니까?”

“데미안!”

“말씀드렸잖습니까. 쓰레기 냄새를 풍긴다고 해서 탓하지 마시라고요.”

데미안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시원스레 웃었다.

“선택은 어머니께서 하신 겁니다.”

데미안은 살아서 수천 명의 추종자를 만들었던 인간이다. 그가 얼마나 매력적이고 말을 잘하는지는 그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세상이 좁아진 데다 언론이라는 게 있어 사이비 교주들이 신을 자칭하며 수백 명의 교원을 만드는 게 그리 어렵지 않지만, 데미안이 살았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종교적인 입김이 가장 강한 시대이자, 감히 신을 자칭하고 살아남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하지만 데미안은 신을 자칭하지도, 그 외모를 이용해 수많은 이들과 잠자리를 하지도, 술과 이성, 도박에 관여하지도 않고 금욕적으로 살아가면서 지나간 자리 뒤에 수두룩한 추종자를 남겨 댔다.

신들이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유리시아가 그 화제의 주인공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 그의 연인이 자신의 신도였기 때문이지, 그가 자신의 신도가 된 건 아니었기에 유리시아는 더욱 각별히 신경 써야만 했다.

“너의 새로운 형제가 널 제대로 계도할 수 있다면 좋겠구나.”

“새로운 형제 말입니까?”

“그래.”

유리시아가 누군가를 불러내자, 데미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미의 천사인 미셸이란다.”

밝은 금발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미의 천사는 성별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얇은 쌍꺼풀이 있는 커다란 눈과 높은 코, 도톰한 입술. 자의식 과잉인지 몰라도 그 얼굴이 묘하게 미카엘 자신과 닮아 보였다.

미카엘은 감히 그보다 자신이 더 곱고 예쁘다고 자부했지만, 문제는 미셸이 자신보다 더 작고 아담하다는 데 있었다.

얼굴은 천사보다 아름답지만, 데미안과 거의 비슷한 키와 체구를 지닌 미카엘과 달리 그는 몸이 자그맣고 날씬했다. 데미안의 품에 폭 안길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것이 미카엘의 열등감을 묘하게 자극했다.

입술을 깨물면서 데미안을 돌아보던 미카엘은 그가 미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하는 걸 보고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선생님?”

아마 데미안은 귀여운 걸 좋아할 거다. 그는 미카엘이 애교를 부릴 때면 프라이팬 위에서 녹는 버터처럼 검은 눈동자를 사르르 녹이며 달짝지근한 웃음을 흘렸으니까.

미카엘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미카엘은 자기가 일반 남자보다 한 뼘 반 이상 큰 데다 건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게 늘 불만이었다.

미카엘은 데미안의 너른 품에 폭 안기고 싶었으니까. 그의 신을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데미안이 저를 똑 닮은, 하지만 저보다 더 작고 어려 보이는 그를 검은 눈동자 가득 담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속이 미친 듯이 울렁거리고 심장이 아플 정도로 거세게 요동쳤다. 목 끝까지 차오른 새빨간 불안감이 미카엘의 연약한 눈가를 자극했다.

“선, 선생, 저, 선생님…….”

미카엘은 말까지 더듬어 가며 제 곁에 선 이에게 매달렸다.

그를 보지 말라고.

그보다는 덜 귀엽고 더 커다란 자신을 봐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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