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세르비엘은 거짓말을 해도 말의 힘이 약해지지 않는 천사이니 그의 말은 반만 믿는 게 좋을 걸세.”
“그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하지, 데미안 님. 우리가 지금 어머니 앞이란 걸 잊었어? 응? 형제여? 자기야?”
두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뜬 데미안은 검은 눈동자 위로 떠오른 적대적인 감정을 순식간에 감추고는 부드러운 눈길로 유리시아를 바라보았다.
“세르비엘은 어머니의 실패작이지.”
그전까지만 해도 내내 하얀 이를 보이며 싱글거리던 세르비엘이 처음으로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을 했다.
“그러니 그가 다소 경박한 말을 하거나 방정맞은 행동을 하더라도 그것이 어머니의 의지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는 걸 명심하게.”
날렵한 눈썹을 쓱 치켜세운 세르비엘이 날카로운 웃음을 입가에 건 채 말했다.
“말이 너무 심하지 않아, 자기야?”
데미안은 그가 자신을 자기야, 라고 부를 때마다 미미하게 눈꼬리를 꿈틀거렸지만, 유리시아 앞이라 그런지 험한 말을 하진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듣는 것보다 내게 듣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해서 한 말이야.”
미카엘은 조심스럽게 유리시아를 살폈지만, 그녀는 딱히 데미안의 말을 부인할 생각이 없는지 두 눈을 굳게 감은 채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낄 따름이었다.
미카엘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유리시아의 실패작이라고 말하면서도 데미안은 두 사람을 철저하게 분리하여 그의 허물이 온전히 그의 것인 양 유리시아를 두둔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사이에서 우스워진 건 오직 세르비엘뿐이었다.
“세르비엘 님.”
미카엘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세르비엘이 먹음직스러운 간식거리를 발견한 어린애 같은 얼굴을 했다.
“그래, 예쁜아. 네가 그 유명한 애구나. 천사고 악마고 장군이고 관심이 많았거든. 천하의 데미안 님의 동정을 누가 떼 줄지를 두고 말이야. 그런데…….”
세르비엘은 야릇한 눈길로 미카엘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무 의외성이 없어서 흥미가 떨어지네. 내가 화제의 그 사람이 되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텐데.”
데미안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난 남자의 불결한 신체에 관심이 없어서.”
“우와, 불결하대. 자기도 남성체면서! 게다가 그 예쁜이도 남성체잖아!”
데미안은 짐짓 새삼스레 깨달은 척하며 미카엘의 양 뺨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미카엘, 너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깨끗한 미카엘이니 말이야.”
속은 시커멓지만.
데미안은 객관적인 평가를 속으로 집어삼키면서 연신 미카엘의 새하얀 뺨과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과한 애정 표현이 눈에 거슬렸는지 유리시아가 슬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그만 좀 쓰다듬으렴. 아주 닳아 없어지겠구나.”
유리시아가 매서운 어조로 말하자, 미카엘은 채찍으로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움찔했다.
“이 정도로 쓰다듬었다고 사람이 닳아 없어진다니.”
하지만 데미안은 채찍 따위에 맞았다고 겁을 먹는 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은근한 웃음을 입가에 건 채 대꾸했다.
“그럼 전 진작 닳아서 없어졌겠습니다, 어머니.”
말을 마치자마자 뺨에 집요한 시선이 꽂혔다. 물론 시선의 주인은 미카엘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리시아 안전이라고 고개도 못 들고 벌벌 떨더니 분노라는 외면 무기를 지닌 사람답게 미카엘은 질투에 사로잡히자마자 바로 공포에서 벗어났다.
눈앞에 있는 신보다 품에 안은 새끼 고양이를 더 두려워하는 데미안은 말없이 식은땀을 흘리다가 가만히 말을 덧붙였다.
“어머니께서 그리 절 예뻐하셨으니 말입니다. 아니, 어머니만 절 예뻐하셨지요.”
다른 사람 말고 어머니 이야기다. 저분 말고 누가 날 쓰다듬겠나.
점잖은 말 뒤에 숨겨진 다급한 변명을 알아들은 미카엘이 사나운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여전히 입술을 꼭 깨문 채 데미안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마 유리시아가 앞에 없었다면 바로 그의 유두를 꼬집거나 뺨을 깨물었으리라.
“네가 지금 데미안을 노려본 거니? 어딜 죄인이 감히!”
물론 유리시아는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했다. 그녀는 가난한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시아버지처럼 날카로운 눈매로 미카엘을 노려보았다.
“제가 그리해도 좋다고 허락했으니 그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아예 미카엘의 얼굴을 제 품에 묻어 버린 데미안이 그의 뒷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두둔하자, 유리시아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주 머리 꼭대기에 올려 두지 그러니?”
“저보다 많이 어리잖습니까.”
“애니까 봐 달라고 하기엔 너무 커다랗다고 생각하진 않고?”
데미안은 얼굴은 아주 예쁠지언정 몸은 그의 품에 꽉 찰 정도로 튼실한 미카엘을 흘깃 내려다보고는 답했다.
“원래 연하는 까칠하게 구는 걸 어르고 달래 주는 맛으로 데리고 사는 겁니다.”
맙소사, 데미안!
유리시아 앞이라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뱉지 못한 미카엘이 황당하단 얼굴로 데미안을 쳐다보았다. 젠티엘조차 불편한 낯빛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가운데 세르비엘만이 푸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쟤 취향 좀 봐!”
데미안이 채찍으로 자기 자신을 후려치면서 반성할 때부터 이상한 취향을 알아봤다는 둥 세르비엘이 막말해 대자, 데미안이 나지막이 대꾸했다.
“난 나를 때리는 것보다 남을 때리는 걸 더 좋아하는데 말이야.”
“오. 그래? 하지만 난 맞는 걸 싫어하니까 네 새끼 고양이나 두들겨 패는 게 어떨까. 응? 자기야.”
세르비엘이 생글 웃으면서 말하자, 데미안이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슨 소리. 맞는 걸 싫어하는 사람을 죽도록 두들겨 패야 즐겁지.”
그 잔인한 대꾸엔 세르비엘조차 할 말을 잃고 경악에 찬 얼굴을 했다.
“어머니! 데미안 님이 절 때리시겠대요!”
“조용히 해라, 세르비엘. 경박하게 웃지 말고, 크게 떠들어 대지 말고, 호들갑 떨지 말고. 대체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을 거니?”
“노고가 많으십니다, 어머니.”
“너도 그만 부추기렴. 왜 너희 둘은 만나기만 하면…… 아아, 머리야.”
절레절레 고개를 젓던 유리시아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자, 데미안이 걱정스레 말했다.
“그러면 안 되지요. 어머니께선 신이신데 병이 들면, 말 그대로 병이 든 신이 되잖습니까.”
입술을 안으로 당겨 문 데미안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흘리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유리시아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이 불효자가 또 인간식 패륜 농담을 한 모양이었다.
“이 미친놈아! 넌 아주 숨 쉬듯이 신성 모독을 하는구나!”
유리시아가 신력까지 실어서 팔뚝을 후려치는데도 데미안은 그저 느물느물 웃을 따름이었다.
“어머니께서 손수 쓰레기를 주워 놓고 왜 쓰레기 냄새를 풍기느냐고 구박하시면 전 정말로 할 말이 없습니다만.”
“네가 왜 쓰레기야! 누가 그런 막말을 해!”
“어머니께서 그리 여쭈셔도, 저는 형제를 고자질할 순 없습니다.”
데미안이 대놓고 세르비엘을 쳐다보며 답했다.
아주 얄미운 작태인데도 유리시아는 그저 한숨만 한 번 내쉬고 말았다.
순애를 가장 귀히 여기는 유리시아는 성미가 까탈스럽고 예민하여 그녀의 피조물 또한 창조주를 닮아 자존심이 높고 고고했다.
데미안을 본떠 만들었다가 기괴한 실패작이 된 세르비엘을 제외하고는.
그리하며 유리시아는 당신을 닮은 천사들보다 인간 출신 천사인 데미안을 더 아꼈다.
무슨 말을 꺼내기만 하면 굳은 얼굴로 “하지만!”, “그렇지만!” 하고 서두를 여는 천사들과 달리 데미안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을지언정 늘 부드럽게 웃으면서 사근사근하게 말하니 그 모습이 무척이나 유리시아를 흡족하게 했다.
유리시아가 여러 신과 성전을 벌였을 때 가장 선두에 서서 심하게 피를 흘렸던 것도 데미안이었다.
유리시아가 직접 빚은 천사들조차 이런 무의미한 전쟁은 그만두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을 때도 오직 데미안만이 그녀의 앞에 섰다.
「어머니의 말씀이 곧 율법이네. 자네들은 고작 손바닥만 한 자를 들고서 감히 하늘을 재려 하는군.」
나중에 데미안이 직접 자기 입으로 그냥 명령대로 하는 게 편한데 자꾸 옆에서 천사들이 찡얼거리니 짜증이 나서 한마디 한 것뿐이라고 밝히기 전만 해도 유리시아는 그에게 크게 감명을 받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속내까지 다 끄집어 보여 주어서 그 솔직한 폭로 뒤에 더 감명을 받았다.
당연히 아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젠티엘은 말이 없지만, 공명정대하면서도 정이 깊은 대천사지.”
미카엘을 품에서 살짝 떼어 놓은 데미안이―유리시아의 표현을 빌리자면―그를 아주 닳도록 쓰다듬으면서 소개를 마저 했다.
“사고 방향이 참으로 여러 갈래 흘러가는 대천사들과 달리 그녀는 상념이 범람하여 넘칠지언정 그 방향이 크게 변하지는 않으니 내가 부재할 땐 그녀를 의지해도 좋을 걸세.”
한마디로 대천사들은 하나같이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는 미친놈 같으나 젠티엘만은 욱하는 성질이 있을지언정 신뢰해도 좋다는 의미 같았다.
“젠티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며 천사와 동등하게 여긴다네.”
슬며시 미카엘을 돌아본 데미안이 허공에서 입맞춤을 보내듯이 입술을 살짝 앞으로 오므렸다가 입꼬리를 길게 위로 올렸다.
“방심하지 않는다는 건 좋은 거지.”
천사들은 자기가 보는 앞에서 애정 행각을 벌이는 데미안을 보고 슬며시 인상을 찌푸리거나 히죽히죽 웃었지만, 미카엘은 그 짧은 순간 데미안의 입술이 전해 준 말을 분명하게 알아들었다.
‘조심.’
젠티엘은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한편으론 방심하는 구석이 없으니 그녀를 경계해야 한다는 뜻 같았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선작해 주시고 추천해 주시고 댓글 달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PS
좀 늦었습니다ㅠㅠ 백신 2차 접종을 마쳤는데 후유증이 은근히 있네요...
다들 무사히 2차 접종 마치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