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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53화 (5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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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우린 길을 잃은 자라면 누구든 가리지 않고 재워 주지. 고양이든, 개든…….”

“악마든?”

“그래. 악마든.”

“그럼 저 말고 다른 악마들도 여기에 머물고 있나요?”

우뚝 걸음을 멈춘 데미안이 진한 눈썹을 말없이 치켜세우자, 그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그 금욕적이면서도 냉엄한 낯빛이 지독하게 섹시해 보여서 미카엘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천사라 그런 건지, 아니면 성품이 온화해 보여서 그런 건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자길 해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기에 생긴 여유였다.

“다른 악마는 없네.”

데미안이 위압을 가하다가 실수로 미카엘의 성기도 같이 억눌러 버렸는지 갑자기 중심부가 근질거리면서 이상야릇한 열기가 미카엘의 아랫배를 콱콱 자극했다. 몸이 급성장한 것도 아닌데 꼭 끼는 바지를 입은 것처럼 느닷없이 바지 앞섶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자네가 이곳…… 이곳의 유일한 객일세.”

무겁게 입을 열던 데미안은 어느 한 곳을 우연히 내려다보다가 돌연 몸을 흠칫했다. 그는 바로 표정 관리를 했지만, 자애롭게 미소를 짓는 입꼬리가 왠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미카엘은 그의 뒤를 따르며 마음에도 없는 말을 건넸다.

“흠.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 오히려 의심스러운데요.”

귀빈실……이나 뭐 그런 거로 보이는 커다란 방으로 미카엘을 이끈 데미안은 주전자에 담긴 물을 끓이면서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는 내가 의심스러운가?”

물론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미카엘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데미안은 하얀 찻잔 하나를 내놓으며 말했다.

“낯선 상황에서 남을 의심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고도 현명한 판단일세.”

미카엘의 뻔한 거짓말을 비난하거나 불쾌해하는 대신 데미안은 그의 날 선 태도를 칭찬해 주었다. 그렇지만 미카엘은 이미 그의 소굴 안에 들어와 있지 않은가. 그가 내준 차까지 아무런 의심 없이 홀짝거리고 말이다.

하지만…… 그래. 저런 절세 미남이라면 장기 좀 팔아먹게 배를 가르자고 해도 순간 “어, 그럴까요?” 하고 대답해 버릴 것만 같았다.

신뢰감을 주는 저음의 목소리는 또 어떻고. 그가 눈앞에서 대놓고 발을 닦은 물을 병에 담아 만병통치약으로 팔아도 “얼마인가요?” 하고 값부터 치를 것 같았다.

“이곳을 사용하게. 필요한 게 있다면 1층으로 내려와서 날 찾도록 하고.”

커다란 창문 옆에 놓인 책상과 의자, 깨끗해 보이는 1인용 침대, 2인용 소파와 테이블, 옷장과 서랍장. 화장실 겸 욕실이 딸린 방은 생각보다 넓고 필요한 물건은 모두 갖춘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 쾌적하고 깔끔한 공간에서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대천사는 그더러 쉬어도 좋다고 말했지만, 미카엘은 졸리지도, 피곤하지도, 어딘가 아프지도, 목이 마르거나 배고프지도 않았다.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던 미카엘은 소파에 몸을 앉히지도 못한 채 방 안을 배회하다가 결국 문을 열고 방 밖으로 뛰어나와 버렸다.

“아.”

대천사는 그가 나올 걸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계단 근처에 가만히 서 있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얼굴을 보자마자 마음이 놓여서 미카엘은 구명줄을 붙잡듯이 그에게 부탁했다.

“저, 선생님을 따라가도 될까요?”

데미안은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듣고 놀란 듯 일순 두 눈을 크게 떴지만, 이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느긋한 걸음걸이가 따라와도 좋다고 말하는 듯하여 미카엘은 얼른 그를 뒤따랐다.

“혹시 어머니나 다른 대천사들이 안 좋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귀담아듣지 말게.”

미카엘은 1년 동안 제가 줄곧 따라온 이를 열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미안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금발을 한 번 쓰다듬고는 오른쪽 회랑을 지나 응접실에 발을 내디뎠다.

“나는 죄인과는 동석하지 않는다.”

두 눈을 감은 유리시아가 일부러 미카엘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칼칼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 은발을 단정하게 위로 말아 올린 뒤 펠름 문양의 머리핀으로 고정한 그녀는 단아한 미인이긴 하지만, 약간 신경질적인 인상이었다. 유리시아는 유르엘과 더불어 중년 여성으로 그려지기에 그녀 또한 그런 외형을 취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외모였다.

미카엘은 그녀의 날카로운 호통을 듣고 핼쑥한 얼굴을 했지만, 데미안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응접실 입구 왼편에 있는 계단으로 발을 디뎠다.

두 눈을 번쩍 뜬 유리시아가 그를 향해 매섭게 소리를 질렀다.

“넌 어딜 가!”

데미안은 바로 두 손을 공손히 모으며 답했다.

“어머니께서 하림하신 걸 알고 나서 속으로 ‘망할. 한참 재미 보고 있는데 왜 오고 지랄이지.’ 하고 욕을 했기에, 저 자신이 죄인이라 생각하여 어머니와 동석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용서하지 않겠다고 말하면 냉큼 자리를 뜰 게 뻔했으니 유리시아는 총알을 깨물듯이 이 악문 소리를 내야만 했다

“용서해 줄 테니 내 앞에 앉아라.”

“예, 어머니.”

데미안이 자연스럽게 미카엘의 손을 잡고 소파로 향하려 하자, 유리시아가 다시 한번 노기 띤 음성을 냈다.

“그 애를 용서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말없이 유리시아를 바라보던 데미안이 도로 계단 앞으로 발길을 돌리자, 유리시아가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너는 또 어딜 가!”

“방금 또 속으로 죄를 저질렀기에 어머니와 감히 동석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이 죄인을…….”

“됐으니까 그냥 앉아!”

그제야 데미안은 유리시아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미카엘의 손을 꼭 잡은 채였기에 물론 그도 함께였다.

“쟤 진짜 미친놈인가 봐.”

유리시아 뒤에 서 있던 시원스러운 인상의 청년이 웃는 모양으로 휘어진 눈매를 더욱 가늘게 만들며 키득거렸다.

어두운 금발을 한 그는 준수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데미안 앞이라 그런지 상대적으로 이목구비가 뭉개져 보여서 참으로 안쓰러웠다.

데미안 앞에서 살아남는 미남이 얼마나 되겠느냐마는.

그가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린 채 말하는 데도 검은 머리칼의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정면만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녀는 아주 잠시 데미안에게 시선을 던졌지만, 그저 그 정도 반응일 뿐이었다.

여자는 짧은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반듯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는데 흑백으로 이뤄진 차분한 정장 차림과 달리 아주 화려한 귀걸이를 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색해 보이지 않고 퍽 차분하면서도 절제된 인상을 풍겼다.

“유리시아께선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을 가장 귀히 여기시지만,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 또한 애호하시기에 행실이 바른 예술인이나 성품이 훌륭한 지식인, 품격이 높은 교양인을 아끼시지. 그러니 자네도 어머니 앞에서 말과 행동을 삼가는 게 좋을 걸세.”

언뜻 엄중한 경고처럼 들리지만, 어머니의 성격이 이러이러하니 이런 걸 조심해야 한다는 당부였다.

미카엘은 바로 데미안의 의도를 알아차렸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층 예의 바른 태도로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유리시아 님.”

“어머니껜 드높이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네. 그 이름 자체로 영광스러운 분이시니 말이야.”

그러고 보니 유렐도 데미안에게만 드높이는 말을 사용했었지. 미카엘이 제 말을 정정하기 위해 입을 열자, 그보다 먼저 데미안이 말을 가로챘다.

“하지만 자네는 죄인이니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가 불경이네.”

살짝 위를 향했던 유리시아의 눈썹이 그 말을 듣고 도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위대하신 분을 뵙습니다.”

궁중 예절을 철저히 익힌 왕족답게 미카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고아한 자태를 뽐내는 우아한 도련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그가 과하지 않게 사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그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다우면서도 품격 있어 보였기에 죄인과는 동석하지 않겠다 선언했던 유리시아도 내심 마음이 누그러진 듯 무어라 호통을 치는 대신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리기만 했다.

“자기야, 오랜만이야~.”

금발 머리칼의 남자가 가벼이 손가락을 흔들면서 데미안에게 인사하자, 미카엘이 말없이 미간을 좁혔다. 흘깃 미카엘을 돌아본 데미안이 그의 얼굴 위에 떠오른 적개심을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카엘. 저자는 남색가다. 남자하고 자는 남자란 뜻이지.”

미카엘을 보호하듯 그의 어깨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며 데미안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 저자와 단둘이 있지 않도록 조심해라.”

마치 남색가란 어마어마하게 위험한 존재이니 미카엘은 그와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투였다. 하지만 미카엘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혼란스러워졌다.

‘네? 선생님? 그럼 우린 남색가가 아닌 건가요? 하지만 우린…….’

어쨌거나 데미안은 절 선택해 주었기에 미카엘은 비로소 안도하면서 두 팔로 데미안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이 절세 미남은 내 거니 당신이 넘볼 여지는 전혀 없다는 걸 과시하는 듯한 태도였다.

“와, 생마늘을 주식으로 먹는 놈들이 어쩌다가 한 번 마늘 빵 먹은 사람더러 마늘 냄새를 풍긴다고 욕하네.”

남자가 절묘한 비유까지 들어가며 비난했건만 데미안은 그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성욕이 없는 천사라 발기하진 않는다는 걸세. 그러니 저자는 강간범보다는 더러운 이물질이라 생각하고 피하는 게 좋을 걸세.”

“어머니! 데미안이 저한테 막말하는데요?”

남자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고자질하자, 유리시아가 두 눈을 감은 채로 한마디 했다.

“그러게, 너는 왜 데미안더러 안아 달라는 둥 그딴 망발을 해!”

“아니, 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데미안이 점잖게 말을 보탰다.

“생각이 없으면 말을 하지 말아야지.”

“그래. 입을 다물렴, 세르비엘. 네가 날 부끄럽게 하는구나!”

세르비엘이라 불린 남자는 짐짓 서운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와.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저도 어머니의 아들인데요. 저 상처받았어요!”

데미안은 다시 한번 그의 말을 무시했다.

“세르비엘은 일견 가벼워 보이지만 통찰력이 깊은 천사라네. 그러니 혹여 자네가 흉악한 짓을 꾸미려거든 그를 가장 조심해야 할 걸세.”

“뭐야, 나쁜 짓을 꾸미려고? 적어도 내 앞에선 하지 말아줘.”

세르비엘은 보기 좋은 눈웃음을 흘리면서 흘깃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난 데미안 님과 달리 폭력이나 고문을 좋아하지 않거든.”

데미안은 그에게 마주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미카엘은 드물게도 그를 질투하지 않았다. 세르비엘을 바라보는 데미안의 눈빛이 꼭 썩은 기름을 끓인 것처럼 찐득거리는 악의를 풍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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