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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천칭이 기울길 기다리지 않는다-52화 (5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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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정말로 신이 와 계시는구나.’

    고작 문 한 짝을 경계로 했을 뿐인데 신전 안으로 발을 딛자마자, 보이지 않는 손이 뒷머리를 찍어 누르는 것처럼 기이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신전 안을 가득 채운 공기는 매우 맑았으나 습한 수림에 있는 것처럼 그 농도가 과하게 짙어 숨 쉬기가 힘들었다.

    미카엘이 가슴팍을 위아래로 빠르게 달싹거리자, 데미안이 그의 어깨 위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데미안의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겨울바람 같은 성력이 몸 안으로 흘러들자, 더는 무거운 위압감도, 습한 공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미카엘이 잘 아는 그 신전으로 돌아왔다.

    ‘아, 나의 신은 여기에 계시지.’

    미카엘은 새삼스레 경탄하며 데미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키가 좀 작았다면 위대한 분을 우러러보듯이 할 수 있었을 텐데 시선이 꼭 맞는 게 약간 불만스러울 정도였다.

    문득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여긴 어디고, 나는 무엇이고, 난 대체 여기에 왜 있는 건지, 미카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한적한 길가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저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미카엘은 새하얀 하늘이 새파랗게 물들다가 새빨갛게 물들 때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고 그중 몇몇은 무슨 용건이 있는지 저기요 하고 미카엘을 불러 세웠다.

    하지만 미카엘은 멈춰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채 그저 걷고, 또 걸었다.

    등 뒤에서 듣기 좋은 저음이 들려오기 전까지 말이다.

    “미카엘!”

    뒤를 돌아보자, 정말 끝내주는 미남이 서 있었다.

    비단 미카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몇 안 되는 행인들이 그를 흘깃거리며 입꼬리를 실룩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래. 미남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지. 그것도 저렇게 키가 큰 데다 몸매도 좋고 비율까지 완벽한 미남이라면 더욱.

    남자는 그저 흔해 빠진 미남이 아니라 어둠 속에서도 홀로 빛이 날 것만 같은 황홀한 미남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오직 그만이 눈에 띌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 정도로 강한 존재감을 지닌 남신이었다.

    “왜, 어떻…….”

    그 정도로 남다른 자태를 뽐내는 이가 꼭 오래전에 잃어버린 자기 애를 되찾기라도 한 것처럼 두 눈을 일그러뜨리고 입술을 꽉 깨물자, 갑자기 미카엘은 두려워졌다.

    “저, 괜찮으세요?”

    미카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자, 남자는 뜨거운 것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흠칫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우와, 놀란 얼굴도 진짜 잘생겼네.’

    남자가 잠시 넋을 놓은 사이 미카엘이 그의 얼굴을 대놓고 훑어보았다.

    뜨거운 돌덩이를 삼키는 것처럼 목울대를 위아래로 힘겹게 움직인 남자는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드리웠다가 도로 깊은 눈동자를 드러냈다.

    달은 검은 색이 아니라 하얀색인데도 묘한 애상에 젖은 그의 눈동자가 왠지 달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지만 어딘가 음울하고, 아름답지만 어쩐지 처연한 달 말이다.

    “자네, 악마로군.”

    마른침을 한 번 삼킨 남자가 가만히 미카엘을 바라보며 차분한 저음으로 물었다.

    아주 비현실적인 말이 남자의 위압적인 입술에서 흘러나오자, 꼭 모든 세계에서 통용되는 진리처럼 여겨졌다.

    “당신은 제가 무엇인지 아나 보군요?”

    당신, 이란 말이 거슬리는 듯 남자는 아주 잠시 눈썹을 꿈틀했지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카엘은 어쩐지 마음이 조급해져서 당신이란 말을 대체할 수 있는 호칭을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떠올려 보았다. 대천사라는 걸 공공연히 밝혀선 안 될 테니, 신비로운 미남 씨? 아냐. 왠지 비꼬는 것 같아. 그대? 아니, 중세 시대 왕이냐고.

    “음. 악마라…….”

    그제야 미카엘은 그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렴풋하게 ‘나는 죄인’, ‘나는 악한 존재’라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심지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잘 몰랐는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머릿속이 좀 맑아진 기분이었다.

    “그럼 당신은 천사, 아니, 남신이겠군요?”

    남자는 가만히 두 눈을 깜빡이다가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표정일 땐 금욕적이고, 엷은 미소를 머금을 땐 품위 있어 보이던 얼굴이, 웃으니 끝내주게 야해 보였다.

    ‘아, 저 얼굴로 빨아 주면 좋겠다.’

    미카엘은 절로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혀로 핥으면서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대천사 데미안이라고 하네. 그러니 앞쪽이지.”

    “네? 저, 절 상대로 앞쪽을 쓰겠다고…… 아아아, 천사요! 천사란 말이죠?”

    젠장! 망할 놈의 입.

    다행히 남자는 미카엘의 실언을 듣지 못한 건지 빙긋 웃으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응보의 대천사인 데미안 페르페오라네.”

    만약 저 말을 한 게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미카엘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한 번 쳐다보고는 바로 발길을 돌렸을 거다. 하지만 그러기에 데미안은 정말 환장하도록 잘생긴 남자였고, 또한 미카엘의 취향에 딱 맞는 이였으며, 누가 봐도 사제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고, 또한 신전으로 보이는 건물 앞에 서 있었다.

    “날 따라오게. 안에서 이야기를 좀 나누지.”

    사실 앞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는 그리 상관없었다.

    설사 데미안이 술집 앞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서 있었더라도 결과적으로 미카엘은 그를 따라갔을 테니 말이다.

    “아 참. 이름이…… 어떻게 되나?

    지나가는 투로 말을 꺼낸 것치고 데미안은 조금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혹시 미카엘이 “하핫! 저는 강간의 대악마 미카엘입니다! 여기엔 당신을 따먹으러 왔지요!” 하고 외칠까 봐 겁이라도 나는 걸까.

    강간의 악마라.

    뭐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만약 미카엘이 그런 악마라면 세상에서 가장 편식하는 악마가 되어 눈앞에 있는 남자만 줄곧 따먹을 것 같았다.

    감히 단언하건대 이성하고만 관계를 맺어 온 남자든, 동성에게만 관심이 있던 여자든, 이 남자를 만난 순간 세상에 거꾸로 뒤집히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되리라.

    멍하니 남자를 쳐다보다가 맨바닥에서 넘어질 뻔한 남자와 여자를 그 짧은 사이에 세 번이나 봤으니 하는 말이었다.

    인간을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할 천사가 오히려 그들이 평지에서 나자빠지게 하다니.

    참으로 말세였다.

    ‘나도 넘어지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저 엉덩이에 좆을 갖다 대 볼까.’

    머릿속으로는 온갖 저열한 생각을 해 대면서 미카엘은 겉으로는 반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카엘 홀리브링어입니다. 아마도요.”

    새하얀 건물 안엔 유리시아를 본떠 만든 금빛 신상과 유리시아 교를 상징하는 펠름 문양이 걸려 있었다.

    ‘순애의 여신을 섬기기엔 지나치게 잘생긴 외모 아닌가.’

    미카엘이 앞서 걷는 이를 힐끔거리며 생각했다.

    사람들은 못생기고 말라비틀어진 남자의 유일한 부인이 될 바에 이 잘생기고 몸 좋은 남자의 다섯 번째 부인이 되길 바랄 것 같은데.

    뭐 적어도 미카엘은 그랬다.

    남자와 결혼하라고 하면 금실로 된 밧줄로 목을 매달고 죽어 버리겠지만. 요컨대 데미안과 결혼하거나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고를 것 같았다.

    “그런데 악마인 제가 신전 안으로 막 들어가도 되는 건가요?”

    외진 곳에 있는 자그마한 신전인데도 신도 수가 꽤 많은지 좁은 예배실 안엔 기다란 의자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아마도 데미안의 미모 덕분이겠지.

    미카엘이라도 매일같이 들락거리면서 신비로운 미남을 하루라도 더 눈에 담아 두려 할 테니 말이다.

    미카엘이 신기하다는 듯 건물 안을 둘러보며 묻자, 데미안이 그를 힐끗 돌아보며 물었다.

    “이곳이 신전이라는 건 알고 있나?”

    아, 반쯤 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힘이 들어간 목덜미가 퍽 성적인 매력을 풍겼다.

    미카엘은 무의식중에 데미안의 강인한 목덜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뭐,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죠?”

    “보통?”

    “유리시아 신상이 떡하니 놓여 있는 데다 신전 중앙에 떡하니 펠름 문양까지 걸려 있잖아요.”

    “그럼 나는…….”

    갑자기 걸음을 멈춘 데미안이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물었다.

    “나는 알고 있나?”

    “어…….”

    아마 미카엘은 동성애자가 아닐 거다.

    실제로 브로콜리를 먹어 보진 않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걸 싫어한다는 걸 아는 것처럼, 미카엘은 남성에게 성애를 느끼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달랐다.

    성별과 관계 없이 그는 미카엘의 이상형 그 자체였다. 설령 그가 아니라 그녀였더라도, 설령 내일 죽을 것 같은 노인이었더라도 미카엘은 반드시 이 사람에게 반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꼭 처음 만난 순간 영혼이 그에게 꽉 매인 것처럼 말이다.

    그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니 만약 미카엘이 한 번이라도 데미안을 만나 본 적이 있다면 반드시 그를 기억해 냈을 거다.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요?”

    데미안은 그저 등만 보였기에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그게 너무 불안하게 느껴져 미카엘은 슬쩍 걸음을 빨리해 그의 옆에 섰다.

    “우린…… 아는 사이가 아니라 앞으로 알아갈 사이지.”

    바닥까지 가라앉은 어조와 달리 데미안은 엷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부드러운 낯빛을 하자, 미카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내가 왜 이리 이 사람 눈치를 보는 거지,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심지어 그 의구심조차 마음에 들었다.

    “그럼 왜 당신을 아느냐고 물으신 거죠?”

    “나는 유명인이니까.”

    “아하, 절세 미남 대천사로요?”

    “그래. 절세 미남 대천사로.”

    미카엘을 따라 가볍게 웃은 데미안은 꼭 시선을 피하듯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미카엘은 그가 금방 말을 이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데미안은 한참이나 침묵을 지켰다.

    ‘혹시 내가 기분을 상하게 했나?’

    갑자기 불안해져서 미카엘은 입을 꼭 다물고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렇게 쉽게 동요해도 되는 건가? 이렇게 쉽게 반해도 되는 거냐고. 아니, 아니. 첫눈에 반한 건 아무 문제 없어. 봐! 이렇게…… 그냥 남신 그 자체잖아.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만나고 나서 첫눈에 반한다는 게 뭔지 깨달았습니다.’ 에 한 표를 줬을 거라고. 분명 99%의 득표율을 자랑할 거라니까?

    남은 1%는 시력이 무척 좋지 않거나 투표를 잘못한 사람일 테지.

    “잠자리는 마련해 두었나?”

    미카엘은 눈동자를 굴리면서 그의 반응만을 살피고 있었기에 데미안이 질문하자마자 바로 대답할 수 있었다.

    “어, 아뇨. 전 이제 막 여기로 온 거라서요. 사실 이곳이 어딘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럼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는 건 어떤가.”

    전혀 기대치도 못한 제안에 미카엘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발 그가 이런 제안을 한 노숙 악마가 나 뿐이기를. 이 신전에 나 말고도 데미안에게 투표한 99%의 악마가 득실거리지 않기를.

    미카엘은 복잡한 마음을 담아 질문했다.

    “신전에서 악마도 재워 주나요?”

    미카엘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은 건데 눈매를 부드럽게 휜 데미안은 그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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