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4. 천사는 누굴 위해 기도를 올리는가
“자네의 문제점에 관해 먼저 이야기해 보도록 하지.”
“어…… 굳이 여기에서요?”
미카엘은 깊은 숲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분지에 서서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도시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숲은 수백 년은 묵은 듯한 굵직한 나무가 빽빽이 들어선 곳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네. 자넬 여기에 파묻고 가려는 게 아니니까.”
“아니, 그걸 걱정하는 건 아니고요.”
참 발상이 신기하단 말이야. 보통 사람을 깊은 숲에 데려와선 널 여기에 파묻고 가려는 건 아니라고 말하나.
‘설마 이미 몇 명 파묻어 본 건 아니겠지?’
미카엘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데미안이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실은 대천사를 몇 명…….”
“아, 아니에요. 자세히 듣지 않을래요.”
자기 귀는 순결하다는 듯 미카엘이 두 손으로 귀를 막아 버리자, 데미안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미카엘의 손목을 다정히 잡아 아래로 내리면서 듣기 좋은 저음으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세상 모든 천사와 악마를 파묻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너에게 그럴 일은 없으니까.”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하나. 데미안은 가끔 참…….
미카엘은 괜히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무미건조한 말투와 달리 깊은 애정이 묻어나는 눈길로 절 바라보는 데미안을 그저 두 팔로 꼭 껴안고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그가 자신을, 아니, 자신만을 소중히 여긴다는 거지.
“이리 와서 이걸 주먹으로 쳐 보게.”
데미안은 성인 남성 다섯이 양팔을 벌리고 서도 밑동을 다 두르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나무 앞에 선 채 말했다.
미카엘이 시키는 대로 하자, 데미안이 물었다.
“아픈가.”
“네? 뭐, 아프겠죠?”
두 눈을 동그랗게 뜬 미카엘이 천진난만하게 대꾸하자, 데미안은 웃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로 부드러이 말했다.
“나무 말고. 자네 손이.”
“아! 제 손은 아프지 않아요.”
“그럼 이번엔 손이 아플 정도로 세게 쳐 보게.”
미카엘이 온 힘을 실어,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동작으로 나무를 후려쳤다. 그러자 나무 밑동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면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픈가?”
“아픈……것 같기도 한데요.”
자기 손에 관한 이야기인데도 미카엘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애매하게 답했다. 말없이 절 바라보던 데미안이 갑자기 앞머리를 꾹 잡아당기자, 미카엘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아야!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정말로 아파서 소리친 건가?”
“아니, 당연히…….”
어? 정말로 내가 아파서 소리쳤나?
미카엘은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저 말을 한 게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누군가 자기 생각에 의구심을 갖게 하려고 일부러 책략을 꾸민 거라고 오해했을 거다.
그 정도로 자기 감각에 의심이 들었다.
“아마 반사적으로 소리를 친 거라고 생각해요.”
미카엘은 생각보다 빠르게 평정을 되찾았다. 그는 다시 한번 나무를 주먹으로 세게 후려치고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뇨. 아프지 않아요. 저 나름대로는 세게 후려쳤다고 생각하는데도요.”
“이제 자네 문제가 뭔지 알겠나?”
미카엘은 바로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몸의 한계치를 모르니 제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는 발상 자체를 못 한다는 거죠?”
“그래. 내가 먼저 시범을 보여 주지 않았다면 자네는 높은 건물을 단번에 뛰어오를 수 있단 것도 몰랐겠지.”
그 말대로였다.
데미안이 아니었다면 미카엘은 계속 평범한 사람 수준으로 걷고 뛰었을 거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악마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미카엘, 난 지난 천 년간 잠이 든 횟수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네.”
“그런데 그 몇 번을 제가 유발했다는 말씀이군요. 그 말은 제가 적어도 선생님 정도로 체력이 좋다는 뜻이고요.”
데미안은 제 생각을 미리 읽고 술술 말하는 제자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며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께서 절 여기로 데려오신 이유는 제 한계치를 확인한 후 거기까지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서, 맞죠?”
미카엘은 주위를 한 번 더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 확인하고 싶은 한계치는 아마도 체력, 근력, 전투 능력인 것 같네요. 절 굳이 이런 곳까지 데려오신 걸 보면 말이에요.”
영특한 옛 제자의 얼굴이 떠올라서 데미안은 저도 모르게 애틋한 눈길로 미카엘을 바라보고 말았다.
옛날부터 뭐든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제자였지. 바느질도, 요리도, 데미안은 그저 전쟁터에서 몸으로 익힌 것을 가르쳤을 뿐인데 미카엘은 수습 요리사나 수습 재봉사 몫을 해냈다.
물론 그가 노력한 덕도 있겠지만.
언젠가 둘이 나라 밖으로 도망쳐 살게 된다면 그런 기술도 필요할지 모른다고 열심히 익혔으니 말이다.
‘그런데 왜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던 거지.’
분명 이유가 있었겠지. 절대로 자의로 그런 건 아닐 거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는데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다.
혹시 빠져나오다가 누군가에게 들켜서 중간에 잡혔던 건 아닐까. 그러다 감금 같은 걸 당해서 자살한 건 아닐까. 아니, 정말로 자살한 게 맞는 걸까. 그가 정녕 자살한 거라면 그토록 자신을 미워했던 왕비가 왜 사람을 시켜 그의 유서를 제게 건네줬던 걸까.
‘그만 생각하자.’
천 년 동안 잘만 파묻은 채 살아왔으면서 왜 이제 와서 그걸 꺼내 보려 한단 말인가. 중요한 건 이제 미카엘이 자신의 눈앞에 있다는 거다. 과거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잊어. 흔들리지 마. 아무래도 좋은 일에 매달릴 필요는 없어.
“선생님은 정말 선생님 같으시네요. 아, 말이 좀 이상한가? 혹시 예전에 제자를 두신 적이 있으세요?”
혹시 속내를 읽혔나 싶어서 데미안은 흠칫 놀란 얼굴로 미카엘을 바라보았다.
“아, 지금의 저 말고요.”
데미안은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꺼낸 거란 걸 깨닫고 부지불식간에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생전엔 선생님 노릇도 했었지.”
“제 기억이 맞다면 성기사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 그런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위치의 사람에게 명령을 받아서 말이야.”
“우와, 그럼 억지로 제자를 떠맡으셨던 거예요?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정말 최악이네요.”
데미안은 그 최악의 존재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처음엔 억지로였지만, 워낙 뛰어난 제자라 그런지 가르치는 맛이 있더군. 날 아주 잘 따르기도 했고.”
“어린애를 가르치셨나 봐요? 선생님은 종종 저를 어린애 어르듯이 하시거든요.”
“나보다 열 살이 어렸네.”
미카엘은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 옛 제자라는 놈이 자기 위치를 위협할 만한 존재인지 가늠해 보는 것 같았다.
“아, 그래요? 나이 차이가 그리 많이 나진 않았네요.”
데미안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많이 나지 않는다고? 열두 살과 스물두 살이었는데?”
“그게 왜요?”
“아…… 아니. 그렇군.”
데미안에게 있어 미카엘은 제자이기도 했지만, 또한 연인이기도 했기에 은연중에 나이 차이가 크게 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단순히 스승과 제자 관계라면 오히려 나이 차이가 적게 난다는 말이 맞았다.
“선생님은 타인에게 그리 관심이 없으시다고 생각했는데. 꽤 귀여운 제자였나 봐요?”
미카엘이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물론 이 질문은 함정이다. 데미안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금색 고양이는 그의 뺨을 콱 물어 버리거나 유두를 꼬집으려 들 테지.
“귀여운 건 미카엘 한 명뿐이지.”
데미안이 태연하게 웃는 얼굴로 답했다.
과거의 그도, 지금도 그도 미카엘은 미카엘이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흐음.”
거짓말을 판별하는 심판관처럼 예리한 눈초리로 데미안의 낯빛을 살피던 미카엘이 지나치게 해사한 웃음기를 거두었다. 다행히 데미안은 무죄 판결을 받은 모양이다.
“귀엽다고 하지 마세요.”
하지만 여죄는 추궁받았다.
미카엘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아랫입술이 깨물린 채로 데미안은 살짝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조심하도록 하지.”
입을 맞댄 채로 입술을 움직이자, 말캉거리는 살덩이가 살짝 입안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하지만 데미안은 그 간질간질한 자극에도 여전히 차분한 낯빛이었다. 그의 숨결을 들이마신 것만으로도 흥분한 미카엘은 그 사실이 분한지 일부러 데미안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 넣으려고 했지만, 그보다 먼저 데미안이 고개를 뒤로 뺐다.
“검을 소환하게. 내가 먼저 시범 동작을 보이도록 하지.”
미카엘은 예전과 같은 말투로 말해 달라고 했지만, 데미안이 생각하기에 그는 그 정도로 준비가 된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데미안은 좀 더 점잖게 굴면서 포악한 본성을 숨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성질을 죽이고 살 수는 없으니 그에게 아주 조금만 맛보기를 제공하기로 했다. 미카엘이 깜짝 놀라서 도망가지 않도록 그가 외면 무기를 들었을 때, 그러니까 분노에 찼을 때 은근슬쩍 말이다.
=============================
※ 조아라에 게시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거 보호받고 있습니다 ※
※ 저작권자의 승인 없이 작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복제, 전송, 배포 및 기타의 방법으로 이용할 경우,손해배상 청구를 포함해 강력한 민/형사상 처벌대상이 됩니다. (5년 이하의 징역, 5천만원 이하의 벌금부과) ※
[작품후기]
선작해 주시고 추천 눌러 주시고 댓글 달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